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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편치 않았다

by 무량화

부메랑이 되었다.


며칠 전 팔십도 넘은 상옥이형제를 단죄하며 딴에는 독기 최대치로 올려 마구 갈궜더랬다.

면전이라면 펄펄 더 화염 불탔겠지.

그 에미는 죽어 합당한 벌을 받았을 테지만 그 에미의 자식에게라도 한바탕 욕설을 퍼부으며 잘근잘근 씹어제켜야 속이 풀릴 거 같았다.

당사자가 오래전에 죽어 없어진 판국이니 이제는 잊고 묻어둘 일임에도.

반세기도 더 전의 일이니 미움도 원망도 내려놓고 응당 잊고 살았던 이름들이다.

뒤늦게 그것도 우연히, 내가 모르고 지냈던 그들 모자의 과거 행적을 듣게 되면서 분노가 재점화되고 말았다.

그 에미의 아들들에게라도 죄를 묻지 않고는 도저히 화기가 사그라들지 않을 것 같았다.

오랜 세월 꾹꾹 눌러두고 살았던 응어리 그 마그마를 터트려 분출시키자 분기가 식으면서 잠시 시원하고 후련했다.

칠십 년 묵힌 감정의 찌꺼기를 쏟아냈으니 마음의 평화가 올 줄 알았다.

당연히 해묵은 상처도 치유가 이뤄질 줄로 여겼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부정적인 정서의 파동은 결국 내게로 되돌아왔다.



그 치들을 글로 써갈겨 갈군 것은 토요일이다.

주말 지나 월요일.

아랫집에서 고기를 굽는다며 저녁을 함께 먹자고 했다.

맥주를 곁들여 즐겁게 식사를 하는 도중 슬그머니 빠져 화장실로 갔다.

평소 건강한 사대육신에 오장육부 허락해 주신 하늘에 감사하며 산 사람이다.

급체였다.

토악질을 시작으로 위아래로 마구 쏟아졌다.

한바탕 난리를 조용히 수습하고 자리에 돌아왔다.

본래 천천히 먹는 편이라 판이 끝날 때까지 수저질을 하던 다른 때와 달리 그쯤에서 수저를 놓았다.

마무리로 나온 레몬티로 입가심을 하고 거처로 올라왔다.

밤새도록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그렇게 월요일 밤부터 수요일 오후까지 분수처럼 폭포처럼 쏟아냈다.

뭐가 그리 속에 쌓인 게 많았던가 싶게 꾸역꾸역 나왔다.


민간요법에 주로 의지하는 내 식대로 따끈한 보리차에 죽염을 연하게 타서 마시고 또 마셨다.

매실청을 진하게 타서도 마셨다.

음식은 생각만 해도 니글거렸다.

계제김에 잘 됐네, 한동안 접었던 단식 한다 치자.

말이 그렇다 뿐이지 하루 굶었다고 정말이지 무릎 힘이 스르르 빠지며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매일 퇴근시간에 전화하는 아들이 화요일 저녁, 통화 중에 당장 감을 잡았다.

항상 활기차던 엄마였는데 온종일 물만 넘긴 내 목소리를 들었으니 상황 파악될 만도.

눈으로 보고 내리는 진단 외에도 문진만으로 증상을 알아채는 의사들이다.

왜 낮에 병원 가질 않았냐며 볼멘소리부터 해댔다.

복통이나 열은 없다니 그나마 다행이나 내일 아침 당장 내과에 가서 지사제 처방받고 영양수액 맞으란다.


이튿날 오후 소식 들은 딸내미로부터 카톡이 왔다.

약간 기운이 차려져 청둥호박 썰어 얼려둔 거 꺼내 새우젓 간해서 푹 고아먹고 이번엔 된장 슴슴하게 풀어 청정채와 당근 채쳐 끓이려던 참이었다.

전에 단식 후 보식을 하며 익혀둔 대로다.

딸은 한방이라 당연히 처방전이 다르다.

그 정도면 속 편히 잘 다스렸다며 위장 정리 다됐으니 따뜻하게 쉬면서 유동식부터 서서히 시작하란다.

나 또한 외과적 문제라면 모르지만 지사제며 영양수액 보다 자연치유력을 포함한 동양의학을 더 신봉하는 터.

감기 걸려도 해열제로 열기 내리기보다 수분만 충분히 보충해 주며 편히 쉬면서 면역체계가 바이러스와 잘 대처하도록 해준다.

물론 심한 경우엔 병원을 찾아야 되지만.

사흘째인 오늘에야 겨우 컨디션이 정상 가까이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할 단계는 아직 아니다.

일단 식재료만 봐도 메슥거리던 속이 어느 정도 안정돼 먹음직스러운 음식 사진을 대하자 식욕이 동하기도 하니까.


여기 이르기까지 꼬박 이틀 밤낮이 걸렸다.

내일은 흰 죽에 참기름 떨어뜨려 먹어볼까.

누룽지 끓여 땅콩버터 녹여 먹어볼까.

주말엔 샤부샤부도 괜찮을 거 같다.

점점 다리에 힘이 생기니 먹고 싶은 것도 이것저것 생긴다.

정신이 70에 몸이 30이라더니 그대로 무력하게 넉아웃 당한 며칠간.

과거 오하고 경멸했던 사람 늙어빠진 지금, 죽기 전에 용서는 못할망정 욕지거리 실컷해봤자다.

아마도 악의 꼬드김이 준동하는 시기가 따로 있긴 있나? 아무튼!

용서도 자선이라는데 까짓것들 그래, 풀어주자.

다만 삶의 끝자락에 선 그들, 마지막 기회이니 과거 한창 때 또는 젊은 날 나아가 어릴적 어떤 모습으로 살았던가 한번 돌아나 보길.

성깔 있는 대로 부렸다가 괜히 며칠 불편한 속으로

오지게 혼나고 대오각성.


결국 나만 부메랑 맞고 쌩고생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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