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 우중충하던 날씨가 맑게 갠 아침.
푸른 하늘과 햇살이 반가워 바닷가 쪽을 걷기로 했다.
내면에 자기 세계를 구축한 사람, 몰두할 자기 일이 있는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혼자서도 충만한 시간을 누릴 수 있는 법.
휘적휘적 무심히 걷는 산책도 그러하지만 무언가 골똘히 한 가지에 집중하다 보면, 사유만이 아니라 얻게 되는 수확물도 분명 있더라는.
오늘은 사색을 동반한 유의미한 산책이 아니고 실속 있게 봄맞이 햇쑥을 뜯어올 예정이다.
진작에 보아둔 쑥을 뜯으려고 작은 봉다리를 주머니에 넣었다.
봄이 되자 여기저기서 보얗게 올라오는 쑥이 눈에 띄었으나 너무 어려 때를 기다렸다.
도로변 쑥은 먼지가 많겠고 밭두렁은 제초제 뿌리는 걸 봤기에 먹으면 안 되겠다 싶었다.
소나무가 선 바닷가 언덕은 깨끗하기도 하거니와 해풍 맞고 자란 쑥은 풍미가 더 진하다고 들었던 터.
도다리 쑥국이 아니어도 제철 음식은 뭐든 보양식, 특히 쑥은 비타민 C가 풍부해 감기 예방에도 좋은 건강식품이란다.
햇빛 담뿍 쬐며 쑥 뜯노라면 비타민 D도 얻을 테니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격이자 자연 비타민 무료 보충도 되므로 일석이조.
자급자족까지는 아니어도 스스로의 힘으로 재료를 준비해 흐뭇한 식탁을 만들 수 있다는 자체가 나름 재미지고 신났다.
삶을 스스로 운전한다는 느낌이 나서 행복하고, 매 순간 건강히 살아 숨 쉬는 기분이 들어 즐겁고, 생을 쫀득하게 채워가는 것 같아 만족스러우니까.
이유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하늘에 감사한 건, 쌓은 덕 미미하건만 이리도 안성맞춤인 자리로 데려다 안착시켜 놓으셨음이다.
시골 태생이라 그런지 원래 달래, 냉이 캐고 미역, 굴 따는 일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취미와 적성에도 딱 맞았다.
하여 미국살이 바쁜 틈새에도 화단 만들듯 채전 싱그러이 꾸몄으리라.
그러나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뉴저지 살 때 텃밭 잘 가꾸는 교우가 한국 다녀오며 가져온 쑥 뿌리와 머위를 나눠 줘 심은 적이 있었다,
쑥은 이태 만에 방석 자리만큼 무성히 번지긴 했으나 겉모양만 쑥일 뿐 쑥 향기가 전혀 나질 않았다.
같은 종류의 쑥이라도 기후와 풍토가 다르면 그 성질이 달라진다는 걸 그때 절감했다.
환경이 변함에 따라 본래의 특성이 바뀌어 고유의 향을 잃어버린 쑥은 무정란 같았다.
저 아래 파도 소리와 해풍 배경음악으로 깔아 두고 쑥을 뜯기 시작했다.
금세 손끝에서 퍼지는 쑥 내음은 더할 나위 없이 향그러웠다.
그래, 바로 이 향이야! 후각이 기억하는 오래전 그 향이 울컥하게 만들었다.
길냥이 한 마리 언덕배기에 오도카니 앉아서 말끄러미 그러는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