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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섶섬이 있는 풍경'을 선사한 ㅈ ㅜ ㅇㅅㅓㅂ

목련 만개

by 무량화 Mar 1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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섶섬이 보이는 방 - 이중섭의 방에 와서 / 나희덕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 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질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 껍데기를 그릇 삼아 상을 차리는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게 가질 수 있었다


꿈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 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질에 세 든 소라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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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의 시가 당시 이중섭 일가의 삶 그대로를 그려놨다.


올레시장을 나오면 바로 보이는 맞은편 길이 바로  이중섭거리다.


이중섭 가족이 곁방살이하며 11개월 거주했던 섶섬이 보이는 언덕배기 초가집이 오늘따라 유독 환하다.


만개한 목련이 보얗게 흐드러져서다.


날씨가 좋아 새파란 하늘로 벋은 백목련 자태 고아하기 그지없다.


송이송이 목련화야말로 여왕같은 기품 지닌 흰 봄꽃 중의 백미(白眉)가 아닐지.


꽃등불 하얗게 밝힌 목련이 어쩐지 초가로 이은 납작한 지붕과 언밸런스하긴 하지만.


피난지 서귀포의 언덕배기 반장집 창고방 하나를 얻어 세 든 이중섭 가족.

네 식구는 한 칸 남짓한 셋방에 얹혀살았다.

그래도 네 식구 오손도손 따습고 정겨웠으나 그 행복은 그리 길지 못했으니 겨우 몇 달 정도 이어졌을 뿐이다.

이 방에서 복닥거리며 자구리해변에 나가 게를 잡고 한라산 발치에서 나무새 뜯어 식량 삼아야 했던 곤궁한 생활이었다.

훗날 이중섭의 그림에서 게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이때 게를 많이 잡아먹어 미안한 심정에서 그리게 됐다고 한다.

아이들까지 영양실조로 시난고난 비칠거리자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냈다.

해방 후 한일 간 국교단절이 된 데다 전쟁통의 혼란기라 이중섭은 함께 갈 수가 없었다.

일본 동경 문화학원 재학 시절 미술과 선배이자 천재화가로 소문난 키 큰 미남 유학생 이중섭과 사랑에 빠진 일본 처녀 마사코.

1945년 현해탄을 건너와 함경남도 원산에서 이중섭과 전통혼례를 치렀으며 이때 이남덕이란 이름을 신부에게 선물했다.

남쪽에서 온 덕 있는 여인이라는 의미의 새 이름으로 살며 그녀는 아들 셋을 낳았으나 맏이가 돌 전에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남을 잃은 이중섭은 아들이 관 속에서도 쓸쓸치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발가벗은 채 즐겁게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을 많이 그렸다.

죽은 아들이 천국에서 따먹으라고 주로 탐스러운 천도복숭아를 그려 넣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중섭이 "유일한 나의 빛, 나의 별, 나의 태양, 나의 애정의 모든 주인인 나만의 천사"라 불렀던 아내 이남덕.

그는 죽음 직전까지 아내를 위해 붓을 들었고 가족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편지에 쏟아냈다.

"아고리의 생명이요, 오직 하나의 기쁨인 발가락군, 조금만 더 참으면 되오. 태현이와 태성이에겐 꼭 자전거 한 대씩 사주겠다고 일러 주시오. 그럼 몸성히 힘을 내어 기다리시오."라 썼으나 끝내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젊은 아빠인 그는 마지막까지 가족과 다시 만날 날만을 간절히 기다렸으나 서울의 한 병실에서 행려병자처럼 홀로 눈을 감고 말았다.

아고리는 일어로 턱이 긴 이 씨라는 뜻의 이중섭 애칭이고 발가락군은 아내 이남덕의 별호다.


물 빠지면 바닷가에 내려와 온가족이 게를 잡으며 평화로이 노닐었던 자구리해변물 빠지면 바닷가에 내려와 온가족이 게를 잡으며 평화로이 노닐었던 자구리해변
정방폭포 측면 절벽과 섶섬이 보이는 자구리해안정방폭포 측면 절벽과 섶섬이 보이는 자구리해안
이중섭과 이남덕의 혼례식 사진-1945년 원산이중섭과 이남덕의 혼례식 사진-1945년 원산

수수만년 너울 치며 밀려온 파도는 오늘도 서귀포 앞바다 자구리해변에서 물거품으로 산화한다.   

전쟁통의 피난처였던 서귀포에서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던 일본인 아내 마사코는 살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푸른 물결은 지침 없이 바다 넘나들며 서귀포와 일본을 오가건만 바다를 사이에 두고 그리운 이들은 꿈길에서나 만날 수 있었다.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며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을 다시 만나서 행복을 가꾸리라 꿈꾸었던 이중섭.

그의 소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중섭 생애에서 그나마 가장 오붓한 한때였던 서귀포에서의 11개월.

가족들과 어울려 바닷가에서 게를 잡고 은박지일망정 그림도 그렸으니 그에게는 유토피아가 바로 여기였으리라.

서귀포와 관련된 그림들은 그래서인지 하나같이 따뜻하고 즐겁고 포근한 순간들로 사랑 스러이 표현됐다.

원래 향토적 소재인 소를 즐겨 그려온 화가로 대표작 '흰 소'와 '황소' 그림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일 정도다.

원산에서 하루는 소를 유심히 관찰하다가 소도둑으로 몰려 도망가야 했던 일도 있었다고 회고하는 아내.

그러나 서귀포 시대에 이르러 그는 섬·게·물고기·아이들을 소재 삼아 동심처럼 천진난만하고도 단순한 그림을 주로 그렸다.

훗날이긴 하지만 '그리운 제주도 풍경' 같이 게를 주제로 하여 가족의 단란했던 한때를 회상하는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들로부터 기증받은  ‘섶섬이 보이는 풍경’, ‘해변의 가족’, ‘아이들과 끈’ 등등. 


이중섭이 가족과 함께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서귀포와의 인연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한국 근대화단의 거장인 이중섭은 사후에 그 진가를 인정받아 작품이 고가에 거래된다는 점에서 고흐와 비교되기도 한다.


한편 야수파에 가깝게 강렬한 선과 원색을 즐겨 쓴 점에서 한국의 고흐라 평가받는 그다.

이중섭은 제주를 떠나 부산, 통영, 대구, 서울 등지로 떠돌며 <소> 연작과 <부부> 등 걸작을 쏟아냈지만 날로 건강이 악화됐다.

가족들과 헤어진 뒤 사무치는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심신이 피폐해져 한창나이인 41세에 적막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동안의 애틋하고 애절한 마음들은 백수십 통의 편지글 되어 그림과 함께 영원히 남겨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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