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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사 종소리

by 무량화 Sep 0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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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재처럼 한해에 두 번씩이나 중국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그것도 한여름에는 중국의 북쪽을, 한겨울엔 중국의 강남지방을 여행하게 된 것이다.

‘上有天堂 下有蘇杭’ 말 그대로 지상의 낙원이라 일컬어지는 우와 항저우.

춘추시대 오나라와 월나라가 강남의 패권을 잡고자 서로 대처하던 지역으로 오월동주니 와신상담의 고사가 비롯된 곳이기도 하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천명(天命)인 양 목숨 걸고 그 땅을 취하고자 하게 했던가.

천국에 비유되는 아름다운 자연경관? 아니면 인간의 원초적 탐욕심 때문?

 

피난행렬을 연상케 할 정도로 붐비는 상해역에서 기차로 세 시간 거리에 쑤저우는 자리했다.

등성이 하나 없는 광활한 평지의 연속이다.

밋밋한 들판의 단조로움이 끝나고 소주에 다다르니 의외로 바람결 부드럽다.

괜히 강남이겠는가. 길가엔 처음 보는 상록 교목이 단아한 자태로 눈길을 끈다.

이름을 물으니 계수나무라고 일러준다.

달나라 옥토끼와 짝지을 만큼 수형이 품격 있어 보인다.

계피를 떠올리며 가로수 가까이 다가가 향을 맡아보나 묵묵부답임이 아쉽다.

동양의 베니스라는 쑤저우.


운하와 정원의 도시이자 비단과 자수로 이름난 소주엔 역시 곳곳에 흔한 것이 수로(水路)다.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 남쪽지방이라 운하는 사철 삶의 유통로로서의 몫을 다하나 보다.

정비된 물길 양편에 늘어선 마을. 물 위에 걸린 아치형 돌다리.

탁한 물결 따라 부초가 흔들거리고 운하를 오가는 배는 물빛만큼 구지레한 행색이다.

쪽배 같은 어선에다 수상생활을 하는 배까지 거의 다 궁기가 흐른다.

그것이 오늘의 중국 모습이기도 하지만 급성장 추세대로라면 내일의 중국은 섣부른 속단을 불허한다.

무한대의 잠재력을 뒷받침하는 방대한 땅덩이.

북경과는 또 다른 지역적 특색이 두드러진 점에서도 그것을 거듭 실감하게 된다.

 

소주를 상징하는 관광지는 명원으로 손꼽히는 졸정원과 호구사탑, 그리고 한산사 등이다.

명나라 어사였던 왕헌신이 만든 졸정원은 연못, 동산, 건축의 조화가 절묘해 그 전체가 뛰어난 예술품이라 칭해진다.

적절히 배치된 크고 작은 호수. 심산유곡을 표현하고자 태호석이라는 괴석을 대나무 매화와 어우러지게 꾸며 놓은 축산(築山) 형식은 중국인 취향에 맞춘 미감의 결집체다.

뿐이랴.

긴 회랑과 돌다리로 연결된 정자마다 사방의 전망까지 고려시킨 풍경 연출은 놀라운 수준이다.

졸장부의 정원일 따름이라고 짐짓 겸손을 떨었던 졸정원의 주인.

그는 부정한 돈으로 풍류놀음을 즐긴 부패관료의 표본이었다.

결국 그가 누린 영화는 대(代)를 넘기지 못하고 그 아들이 하룻밤 도박판 끝에 졸정원을 통째로 날렸다던가.

옳지 못한 방법으로 취한 재물이니 그렇게 흩어짐 또한 당연한 일.

여기에도 인과법칙은 예외가 아니리라.



천인석이라 불리는 너른 반석에 서서 올려다본 언덕 위의 호구사탑.

오랜 세월 풍우에 시달려 고색이 창연한 데다 약간 기우뚱한 팔각탑이 솟아 있는 곳은 바로 호구검지의 머리맡이다.

오나라 왕 합려가 생전에 아끼던 검 삼천 자루와 같이 묻힌 자리에 탑을 세운 것이다.

훗날 진시황이며 삼국시대 손권이 그 명검을 찾으려고 손을 써봤으나 한 자루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전설만 자못 신비로울 뿐 현재 역시 합려의 검을 찾고자 시도할 수 없음은

이미 기운 호구사탑이 무너져 내릴까 저어돼 아예 손도 못 댄다는 것이다.

선견지명이 있어 일부러 탑을 기울게 세운 건 아닌지 모르겠다.

후대에 무참히 영지(瑩地)가 파헤쳐지는 수난을 모면키 위한 옛사람의 기지일까.

또 한 곳, 보너스처럼 만난 사탑의 뒤편 숲 속에 숨은 황금빛 부조 와상(臥像).

편안한 자세가 보는 이의 마음도 아늑히 쉬게 한다.

 

관광지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특이한 점은 산책로의 표정이다.

거의 모든 도로가 무뚝뚝한 시멘트 포장이 아니라 질감이 서로 다른 돌로 기하학적 무늬를 놓아가며 고르게 박아 보기에도 좋고 맨발로 걸으면 지압이 되어 일석이조였다.

운하를 끼고 돌아앉은 한산사의 바닥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 크지 않은 평범한 분위기의 한산사.

당대의 시인 장계가 남긴 절창이 없었다면 조명받을 이유가 없는 예사 절이다.

장계의 그 시는 중국인 모두가 즐겨 애송할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선화의 화제로 자주 등장하는 두 기인 한산 습득이 모셔진 법당의 음습함보다

한층 기억에 남는 것은 비좁은 종루 계단 올라가 뎅그렁 세 번 울려 본 범종이다.

규모가 작은 종이라 에밀레종 같은 그윽함은 없지만 울림이 꽤나 깊고 맑아 절창을 탄생시켰나 보다.

 

종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는 마루에 나와 족자의 글씨를 바라본다.

한산사 산문 앞에서 구한 족자다.

『楓橋夜泊』의 시구가 든 당대 명인들이 남긴 예서체 전서체 비석을 절 경내에서 둘러보았기에

탁본이라도 구할까 싶어 가게를 기웃거렸다.

허름한 외양과는 달리 가게 안에는 글씨와 그림이 수두룩했다.

시커먼 탁본보다 눈을 끄는 행서 글씨가 있기에 얼른 샀다.

표구값은커녕 종이값에도 못 미치는 아주 낮은 가격이었다.

족자 한 폭에 한산사 종소리까지 담아 안고 오며 내심 얼마나 흐뭇했던가.

 

“… 고소성 밖 한산

한밤 종소리에 객선이 떠난다.”

라고 읊은 시의 끝부분이 여운 되어 감돈다.

비록 천여 년 전 시인이 듣던 그 종소리가 아닌 들 어떠리.

우리 집 마루에 걸린 족자의 글귀를 음미하다 보면 뎅그렁 그때 그 종소리를 듣게 되는 것을.

글씨의 가치야 있든 없든 그건 내가 따질 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게 때때로 한산사의 범종 소리를 듣게 해 준다는 점이니까.

실제 종이 아니라도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 뜻밖의 인연 덕에 소주는 내게 천상의 이미지로 남겨져 있다.

 

혼자 있는 고즈넉한 시간,

은밀히 정표를 꺼내 보듯 글씨에 취해본다.

그러면 가만히 눈이 감긴다. 한산사 종소리가 들려온다.       -1994년-


한국으로 리턴한  아들집에서 박스 하나를 가지고 왔다.


이민 가면서 맡기고 간 소품들이 담긴 박스다.


그림 액자도자기 사이로 누렇게 변색된 족자도 나온다


족자 글씨라 두루마리 상태로 오랫동안 돌돌 말려있었.


누옥으로 데려와 벌써 며칠 걸어놨어도 주름이 말끔 펴지질 않는다.


아랫단에 저도 글씨 써본다고 어린 손주가 볼펜으로 끄적거려 놓은 20여 년 전 낙서조차 이제는 하기만 하다.


한산사는 중국 소주성 운하 바로 곁에 있는 작은 절로 당나라 시인 장계의 시 '풍교야박(楓橋夜泊)'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당시 아들친구 엄마들과 몇 년째 이어온 모임에서 처음 가진 해외나들이였다.


항주 소주에는 일찍이 남북조시대 이전부터 운하가 발달, 수상교통수단으로 배가 널리 이용됐으며 당나라 역시도 주요 운송로였다.


과거시험에서 세 번째로 고배를 마신 뒤 장안에서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장계가 소주의 풍교다리를 지나는 중에 한산사 종소리를 듣고 읊은 시라는 풍교야박.


한산사 종을 세 번 치면 속인에게는 행운이 따라와 사바의 번뇌 사라지게 해 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그때 댕그렁~댕~댕~종을 쳐봤다 하여 세상풍파 비껴갈 리야 없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한 생애 축복 따른 여정이니 감사.


글은 소주성 한산사 인근 다녀와서 쓴 글로 전에 한번 포스팅 올린 적이 있다.


요새 같아선 중국 구경 공짜래도 손사래질부터 칠 테지만.


사실 지난 2월 중국 서안관광을 계획한 바 있었는데 그때 갔더라면?


궁~~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자칫 격리생활 맛보거나 공항에서 국제미아 될 뻔.


하느님 두루 살펴주셔서 고맙습니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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