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기억할 것이다

by Moon

퇴원일이다. 아내와 아이를 데리러 집을 나섰다. 짐을 실어야 해서 첫째와 둘째는 집에 남겼다. BGM은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 군대 있을 때 휴가일도 이것보다 더 기다리지 않았던 것 같다. 지난 6개월 수없이 오갔던 길인데, 그날따라 유독 멀었다. 그 거리를 종이접기 하듯 말끔히 접어버리는 상상을 물리학적으로 하면서 달렸다. 화물차들이 고속도로서 통곡의 벽을 세우면 갓길로 내달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빈 차 안에서 나 혼자 벌렁벌렁 흥분해 있었다. 큰 숨을 여러 번 내쉬었다.


아내는 6개월 동안 사용해 왔던 세간살이들을 박스에 포장하고 있었다. 입원하기 전엔 몰랐는데, 아내는 맥시멀리스트였다. 그 좁은 병실 공간에, 어쩌면 그렇게 많은 짐들을 욱여넣고 살았는지 병원에 갈 때마다 신기했는데, 그걸 다 꺼내놓고 보니 더 신기했다. 좁은 곳에 착착 맞게 들어갈 수납용 도구들이 시중에 이미 있다는 것도, 그것을 꼭 당근에서 찾아내 무료 나눔으로 받아오는 아내도, 나로서는 문화 충격이었다. 죽었다 깨어난다 한들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은 지난 6개월의 자취들을 상자에 넣고 봉하면서, 다시 오고 싶지 않은 병원 공간을 둘러봤다. 다시 보고 싶은 꼬마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난 열심히 테이프를 뜯어 상자들을 여몄다.


나와 아내가 짐을 싸는 동안 막내는 병원 내 놀이터에서 마지막 이쁨을 받고 있었다. 틈이 나는 간호사 선생님들이, 자기 아이를 수업에 보내고 시간이 남는 엄마들이 돌아가면서 막내와 놀고 있었다. 가족이 왕고라는 건 참 편리한 거라고 다시 한번 느꼈다. 아직 걷지 못하지만 활달해질 대로 활달해진 막내는 놀이터를 빠져나와 병원 복도를 네 발로 기면서 소리를 꺅꺅 지르고 있었고, 그 뒤를 사람들이 엉거주춤 줄을 지어 따르고 있었다. 가족이 슈퍼스타라는 건 참 편안한 거라고 다시 한번 느꼈다.


처음 해보는 장기 재활 입원, 우리는 적잖은 성과를 거뒀다. 최초의 목표였던 걷기를 이뤄낸 것이 가장 컸다. 물론 아직 완벽하지는 않았다. 손을 잡고 일으켜주면 겨우 서너 걸음 앞으로 갈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어딘가. 처음 입원했을 때 배밀이만 조금 할 줄 알던 녀석이 6개월 만에 이 정도 발전한 거면, 날개가 돋아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집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맨 땅에서 혼자서 일어나기와 스스로 걷는 거리 늘리기만 달성하면 된다. 정말 많이 왔다. 정말 많이 컸다.


심지어 인지도 많이 좋아졌다. 장난감을 봐도, 사람이 아무리 옆에서 이름을 불러도 천장만 보던 녀석이었다. 이제는 장난감만 보면 쏜살같이 기어간다. 밥을 먹다가도 옆에 지나가는 사람들만 보면 손가락질을 하며 아는 척을 한다. 아직 자기 이름을 부를 때 명확히 이해하고 쳐다보는 느낌은 없지만, 입원 전보다는 높은 확률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심지어 짜증도 낼 줄 알게 됐으며, 엘리베이터 버튼도 손가락 하나로 꾹 누른다. 기적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다음 도착지가 정해지지 않았음에도, 이 6개월 간의 기적을 등에 업고 있어 우리는 막막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감이 전류처럼 우리 사이를 흘렀다. 그 많은 수업들을 버텨준 아이가 새삼 뭉클했다. 난 열심히 테이프를 뜯어 상자들을 여몄다.


맥시멀리스트의 짐답게 바닥 공간이 부족해졌다. 일단 짐 싸던 것을 멈추고, 다 포장된 것부터 차에 싣기로 했다. 간호사실에서 대형 카트를 빌려주어 아래층으로 오르내리는 횟수를 줄일 수 있었다. 몇 번 상자들을 내리고 올라오니, 아내는 본격적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어느 병실의 어느 엄마가 언제 수업을 마치고 올라오는지 다 외우고 있는 듯,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손을 맞잡고, 연락처를 확인했다. 그렇게 흐지부지, 짐 싸는 건 나만의 몫이 되어 있었다. 왕고의 품격이 몸에 밴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그것만은 여기서 버리고 가고 싶었다.


이 병원에서는 작별 인사를 “다신 보지 말자”라고 한다. 이제 이런 병원 시설을 이용하지 않을 정도로 쾌유하라는 의미다. 노부부가 서로에게 ‘먼저 죽으세요’라고 덕담하는 것과 비슷하다. 일평생 함께했던 이가 떠난 빈자리를 내가 남아서 감당하겠다는 뜻이 숨어 있는 말이다. 짐들이 슬슬 없어지고 바닥 공간이 드러나면서, 같은 층의 보호자 엄마들도, 막내를 귀여워했던 간호사 선생님들과 치료사분들도, 심지어 청소를 담당하시던 분들까지도, 아내와 막내를 마지막으로 한 번 보러 들리셨다. “다신 (여기서) 보지 말자”는 악담 같은 축복이 작은 병실 안에서 수없이 이어졌다. 아내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난 열심히 테이프를 뜯어 상자들을 여몄다.


여기 이 꼬맹이들과 부모들도, 그리고 어쩌면 우리도, 한국의 여러 병원들을 각자의 속도와 순서대로 돌아다닐 것이다. 서로의 경로가 겹칠 수도 있고, 영원히 엇갈릴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절뚝이고 어눌해도, 나중에는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말 못 해도 어느 날 어디선가 우연히 마주친다면 날 보고 ‘삼촌!’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날 기억 못 한다면, 내 옆에 있을 막내의 이름을 부르고, 막내도 화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반듯이 서서 서로를 보고 웃다가, 서로의 발전에 놀라 말문이 막히는 미래의 장면들을 상자와 함께 차곡차곡 쌓았다. 그 상상들을 카트에 싣고 오르내리는 길에 지난 6개월 간 오며 가며 보던 꼬마들을 스쳐 지나갔다.


난 너희들을 기억할 것이다. 이름과 얼굴을 똑똑히 연결해 외우지 못하더라도, 너희의 아픔과 불편함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난 너희들을 기억할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근육을 움직일 때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던 너희의 작은 표정들을 기억할 것이다. 그 얼굴을 쓰다듬던 네 땀들도 기억할 것이다. 육체의 한계에 부딪혀 울기 시작하던 그 울음을, 그러다가 엄마 아빠 껴안고 세상 걱정 없는 얼굴로 웃던 그 웃음을, 난 기억할 것이다. 어린이가 와글와글한 여느 공간들과 조금 다른 듯 비슷했던 이 공간을, 너희가 채웠기에 존재할 수 있던 이 공간을, 나는 기억할 것이다. 조금 다른 아이를 키우는 우리의 일상을 난 기억할 것이다.


그래, 꼬맹이들아. 다신 여기서 보지 말자. 다신 어느 병원에서도 보지 말자.





태어나 처음 해보는 연재를 마쳤습니다. 연재가 주는 압박, 상당히 무겁고도 짜릿했습니다.

‘가족이라서 누리는 기쁨’이라는 걸 나누고 싶었는데, 그게 얼마나 잘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여러 분들께서 보여주신 응원, 격려, 위로에 큰 힘을 받았습니다. 졸글을 읽어주시고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후의 이야기들 역시 연재로 이어갈 생각입니다만, 당분간은 글거리도 좀 모으고 마감 마친 해방감도 좀 누리고 싶습니다.


조금 다른, 아니, 조금 특별한 아이를 키우는 모든 가족들을 축복합니다.

아, 생각해 보니 이미 그 아이들로 인해 축복을 받으신 것도 같네요.

축복을 충분히 누리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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