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어떤 치료를 해야 하나, 늘 그렇지만 쉬운 고민은 없었다. 부모인 우리가 하는 선택이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이의 미래를 크게 좌지우지할 것만 같은 압박 때문에 우리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무리 인생이 태생과 죽음 사이의 선택들(b와 d 사이의 c)이라고 하지만, 장애 등록까지 완료된 아이를 두고 하는 선택은 그 무게감이 달랐다. 혹시 다른 병원에서 이런저런 치료사를 아이가 만났다면 더 멀쩡해지지 않았을까. 혹시 다른 치료 과정을 선택했다면, 지금보다 아이가 더 나아질 수 있던 것 아닐까. 미래의 우리가 아이를 두고 할 후회들이 벌써부터 넘쳐났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한다 한들 우리의 앎과 지혜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무엇보다, 맞는 결정을 하건 틀린 결정을 하건 그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의사와 치료 전문가들조차 하나 같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고만 답을 해주는데,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뭘 안다고 딱 부러지게 결정할까. 고민하면 할수록 부모로서 우리는 작고 초라했다. 아내는 이런 선택의 난관들 앞에서 기도라는 장대를 짚고 날아올랐고, 나는 그런 아내의 발목을 붙들고 공짜로 허들을 넘었다.
입원 6개월 차를 바라보는 시기에 되돌아보니 순전히 기도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게 확실했다. 가장 큰 증거는, 우리를 번뇌케 했던 그 수많은 고민들이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굵직한 결정 사항들이 기억나긴 했지만, 결론(무엇을 선택했는가)만 떠오르지 우리가 어떤 근거와 이유를 가지고 그 선택에 도달했는지는 새까맣게 잊힌 지 오래였다. 상황에 떠밀려 한 결정들이 대부분이었다.
무슨 의미인가? 아이를 양육한다는 우리의 의도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적잖은 시간들이 지나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 아이는 우리가 소원했던 대로 직립보행의 코앞에 와 있다.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 우리보다 훨씬 거대한 존재가 이 아이를 여기까지 오게 한 걸 부인할 수 없었다.
게다가 보너스도 있었다. 아이와의 소통이 점점 원활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가 다르다는 걸 처음 발견했을 당시 자폐가 좋은가, 지능 문제가 좋은가를 두고 아내와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올 수도 있었지만, 아내와 나는 자는 아이를 두고 침대에 누워 가끔씩 둘 중 하나만 오는 상상을 하곤 했었다. 나는 자폐 쪽이었고 아내는 저능 쪽이었다. 나는 지능만 똑바로 살아 있다면, 자폐가 언젠가 고쳐질 때를 희망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고, 아내는 아이가 자기를 엄마라고 부르고, 눈을 맞춰 이야기를 나누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기도를 들으시던 그분은, 아내의 이런 소원을 그냥 두지 않으셨다.
물론 아이의 말문이 갑자기 트인 건 아니다. 아이의 언어란, 매우 원시적인 차원에서부터 시작됐다. 바로 손가락질과 고개 젓기였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는 밥을 먹다가 식탁 저쪽에 놓여 있는 물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기 시작했다. 입에서는 ‘어, 아’하는 외마디 감탄사만 나왔지만, 누구라도 그 아이가 물을 먹고 싶다는 걸 알아챌 수 있기에 충분한 몸짓이었다. 그걸 모르고 물병 근처에 있던 다른 그릇이나 수저 등 엉뚱한 것을 가져다주면 고개를 젓기도 했다. 정상 아이들이라면 진작에 자연스럽게 익힐 것들이었지만, 우리로서는 바라기 힘든 것이었다.
바라기 힘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의 그런 놀라운 변화가 처음에 어떻게 시작됐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기고, 물건을 건드려 상호작용하고, 걷는 건 우리가 항상 바라고 기대하던 것이었기 때문에 아이가 그와 비슷한 움직임을 살짝이라도 보이면 금세 알아채고 아낌없이 기뻐했지만, 아이가 자기의 의사를 표현한다는 건 너무나 먼 훗날의 일이라고만 여겼기에 큰 기대가 없었고, 따라서 그 순간을 포착하지 못했다. 어느 날 보니 아이가 손가락을 허공에 찌르고 있었던 것뿐이다. 얼마나 놀랍던지. 얼마나 예쁘고 대견하던지.
기대란 그런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믿게 한다. 그리고 온전히 모양을 갖추지 않은, 작은 씨앗 단계의 시초만 보더라도 아름드리나무를 본 것처럼 만족하게 한다. 기쁨을 힘껏 누릴 수 있게 한다. 아이가 살짝 몸을 일으킨 것만으로 우리에겐 이미 걸음마를 뗀 것이나 다름없었던 건, 우리의 기대가 거기에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의 첫 손가락질 요구를 놓친 건 거기에 대한 기대가 뒤로 미뤄졌기 때문이다. 뼈아픈 실책이었지만, 대신 우리는 아이를 기대해야 한다는 ‘부모 수업’을 수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이의 모든 성장을 기대하는 건, 아이의 모든 발전상을 놓치지 않게 해주는 것이니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이 선택이 혹여 아이의 성장을 막을까.
저 선택이 혹여 아이의 성공을 방해할까.
그러고 보니 이 고민들은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있든 아니든 모든 부모가 마음속 깊이 품고, 365일 내내 부화시키는 것들이었다. 그 끙끙 거림들이 무엇을 낳는가? 달콤한 기대 충족과 보람? 대부분은 후회다. 아이가 잘 크든 못 크든, 입맛 쓴 후회는 어느 구석에나 존재를 드러낸다. 당연하다. ‘이 선택이 혹여 아이의 성장을 막을까. 저 선택이 혹여 아이의 성공을 방해할까.’ 문구 자체가 후회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니 말이다. 고민의 탈을 썼지만 사실은 후회인 것으로 아이를 키우니, 후회라는 열매가 맺힐 수밖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것만 한 만고의 진리가 없다.
우리는 아이의 다음 단계를 놓고 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기대의 폭을 넓히기로 결정했다. 이 병원이 좋고, 저 병원이 용하대? 지금은 이런저런 재활 코스에 더 집중해야 한대? 미로 안에서 단 하나의 탈출로를 찾아야 하는 입장이었다면 이런 소문과 조언들 앞에서 걸음 하나하나가 덜덜 떨렸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의 폭을 넓히기로 한 우리는, 언젠가 차례가 오면 우리 아이가 다 해야 할 것들, 우리 아이를 더 풍성하게 키워줄 것들로 기대하고 있다.
이 선택은 지금 아이의 성장에 꼭 필요한 거래, 야호!
저 선택은 나중에라도 아이의 성장에 꼭 필요한 거래, 야호!
아직 할 게 많으니 얼마나 좋아. 성장할 방향이 많으니 얼마나 기대돼!
아이가 손가락질할 때마다 우리는 부지런히 몸을 일으켜 물이고 장난감이고 과자를 가져다주며 다음을 기대할 수 있었다. 또 손가락질해봐, 라며 일부러 물컵을 더 멀리 숨기고, 또 고개를 저어봐, 라며 일부러 엉뚱한 물건을 가져다주었다. 아이의 반응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싱글벙글이었다. 후회 대신 자리 잡은 기대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아이가 콕 찔러 준 건 허공이 아니라, 부모의 고질병인 ‘후회’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