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다음 단계를 바라봐야 할 때

by Moon

더웠던 날들이 지나고 두꺼운 옷을 꺼내 입을 때가 됐다. 돌을 갓 지났던 아이의 두 해째 삶도 반을 훌쩍 넘기고 두 돌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내는 매트 하나 펼 공간에서 자고 일어나 아이와 재미있게 놀고, 심지어 다른 병상의 아이까지 초대할 정도로 소형 면적에 적응했다. 나도 아빠와 엄마 역할 동시에 해내기에 익숙해져 코피를 흘리지 않게 됐다. 가족 전체의 1주일 루틴도 점점 확고해졌고, 잡음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모든 전쟁사가 그렇듯, 모처럼 평화가 찾아온다는 건, 커다란 변수가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였다. 우리에겐 ‘퇴원’이 그것이었다.

숱하게 말했지만, 장애 아동에 비해 의료 시설이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에 한 환자가 병원에 입원할 수 있는 기간에는 한계가 있다. 예외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는 그 예외에 포함되지 않았다. 입원하고서 3개월 후 한 차례 연장을 거쳐 6개월을 채웠기 때문에 그 부족한 의료 시설을 충분히 누리기도 했고, 이제 슬슬 다른 병원을 경험해보고 싶기도 했다. 아내는 미리부터 여러 병원에 예약을 걸어두고서 각 병원의 장단점을 조사하고 있었다.

아내가 미리부터 움직였던 건 병원 내 치료사 선생님들로부터 ‘옮기셔야 할 것 같다’는 뉘앙스의 피드백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막내를 너무나 귀여워했던 선생님들, 나중에 아이가 퇴원할 때 개인적으로 선물까지 사다 주셨을 정도로 애착을 강하게 형성하셨던 분들이 왜 떠나라는 제안을 하셨을까? 아이가 선생님들과 치료실 환경에 적응해 버렸기 때문이다.

적응했다는 건, 긴장감이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아이는 슬슬 불량한 수업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시키는 거 하지 않기, 대놓고 하품하다 잠들기, 수행 과제 거부 및 하고 싶은 것만 하기 등 ‘꾀를 부린다’는 증언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선생님들 개인적으로는 이 귀여운 아이가 커가는 걸 직접 보고 싶지만, 아이를 위해서 다른 환경을 제공하는 게 좋겠다는 진심 어린 충고들이었다. 물론 그런 꾀부리기조차 사랑스러워하셨지만.

우리가 있던 병원은 전국 재활 어린이 병원 중 가장 무난한 평판을 가지고 있던 곳이었다. 근처에 조금 더 오래된, 비슷한 계열의 병원이 있었는데, 오래되다 보니 시설이 매우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는 대신 베테랑 선생님들이 많아 수업 효과가 확실하다는 곳이었다. 아내는 여기를 가장 가고 싶어 했고, 나는 내키지 않았다. 지금 있는 곳보다 환자와 보호자가 있어야 하는 곳이 더 좁았고, 수업이 없는 시간에 아이들과 부모가 놀 만한 놀이 공간조차 없었다. 심지어 세탁 시설도 없어 보호자들은 수업 시간에 빨래를 챙겨 외부 세탁방에 다녀와야 했다. 주차 공간도 당연히 없었다. 선생님이 좋으면 뭐 하나, 아내가 죽어 나올 것만 같은데,라는 거부감이 확 들었다.

아내와 다음 행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나는 반대 의사를 적극 표현했다. 병원에 거기밖에 없냐고 물었다. 아내는 자기가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을 때 열악하지만 최고라고 소문난(장애아 커뮤니티에서 이 병원 선생님들을 어벤저스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병원에 입원해 아이를 치료하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 아내 몸은 이미 많이 상한 상태였다. 입술이 늘 부르트거나 터져 있었다. 누구 한 사람 주춤하기만 해도 전체가 무너질 것만 같았던 우리의 팽팽한 생활을 유지하려면 모두가 건강해야 했다. 지금처럼 서로의 건강이 필요한 때가 우리 가족에 없었다.

평소 아내 의견에 잘 반대하지 않는 내가 계속 우려를 표하니 아내는 또 다른 후보지를 추렸다. 우리 집 기준 서울과 정 반대 방향에 있는 도시의 병원이었다. 거기도 나름 입소문이 나긴 했는데, 최고로 손꼽히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비교적 신설에 가까운 곳이라, 시설도 깨끗하니 쾌적할 것으로 예상됐고, 보호자들 사이에서도 다른 무엇보다 그게 최고의 장점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도 여러 병원들이 물망에 올랐다. 대부분 서울에 있는 곳들이었고, 언제 입원이 가능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여러 병원들이 있었지만 아내는 그 ‘어벤저스’ 병원에 대한 미련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퇴원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었고, 우리가 어느 병원 가고 싶다고 정한다 한들 우리 마음대로 일이 이뤄지는 것도 아니었다. 이러쿵저러쿵 해도 먼저 불러주는 곳에 가야 하는 게 우리 상황이었다. 여러 곳에 예약을 해두고, 우리는 되는 곳부터 가자는 데 합의를 보았다. 나는 나의 골방으로 들어가 제발 그 열악한 곳은 피하게 해달라고 아내 몰래 기도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무조건 아이에게 가장 좋은 곳으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는 조금씩 걸음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손만 잡아주면 꽤 긴 거리도 걸을 수 있게 됐고, 벽을 잡고서 혼자서 주춤거리며 일어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번 벌러덩 넘어지곤 했었는데, 아이는 일어서서 걷는 게 재미있었는지 개의치 않고 일어나고 또 일어났다. 맷집만큼은 어디서도 뒤지지 않았다. 아마 아이가 가진 희귀병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데, 통각이 둔했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는 자극에 반응하지 않았고, 그래서 소아과에서도 주사 잘 맞는 아이로 통했다. 우리는 아이가 입원하기 전에, ‘도대체 언제 울음을 터트릴 것인가’ 보려고 아이 팔뚝을 꼬집고 깨물기도 해 봤는데, 결국 우리가 먼저 포기했었다. 어른의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도록 아이는 무덤덤했다. 아이의 감각을 활성화시키는 게 우리의 커다란 숙제였지만, 걸음을 배우는 단계에서는 그 약점이 강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게 역설적이었다.

맷집 좋았던 막내는 일단 걸음이라는 것을 맛보자 거침이 없었다. 어디든 가려했고, 성미 급하게 움직이려 했다. 아직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몸을 일으킬 수도 없는 녀석이, 오른발과 왼발을 리드미컬하게 섞어 내딛는 감각도 모르는 녀석이, 자기 손을 붙들고 있는 사람(대부분 아내였다)을 호령했다. 본인 스스로도 넘어지는 걸 아무렇지 않아 하니, 그 누구도 그 아이를 막을 수 없었다. 아내는 구부정하게 아이 손을 붙잡고 계단을 오르내리고, 병동을 뱅뱅 돌고, 심지어 병원 밖 보도블록도 걸어 다녔다. 그러다 허리와 골반에 무리가 가고 절뚝이기 시작했다. 외박 주간에 집에 와서는 주말 내내 누워만 있었다.

“몸이 이런데 무슨 그 열악한 병원이냐?” 내가 힐난했다. “거긴 절대 안 돼. 아무리 선생님이 좋아도 안 돼.” 아내는 별 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여러 생각이 드는 듯했다. 조금씩 설득이 되는 것도 같았다. 첫 번째 병원에서의 일정이 다 끝나갈 무렵, 아내 몸이 이렇게 고장 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종종 보호자 교대를 해 병원에서 막내와 단 둘이 주말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내는 첫째와 둘째에게 보냈다. 교대하러 집을 나오기 전 첫째와 둘째에게도 주입식 교육을 해두었다. 주말 동안 엄마한테서 다음 병원 이야기가 나오면 절대로 엄마가 원하는 병원은 안 된다고 하라고. 아이들까지 나서면 아내 마음도 움직일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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