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처음 느끼고 가져본 것들

by Moon

막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첫 돌이 막 지난 무렵이었다. 그 당시 아이가 할 줄 아는 건 배밀이 조금이었다. 데굴데굴 굴러서 이동할 수는 있었으나 실생활에서 그걸 자주 하거나 길게 하지는 않았다. 장난감에 간혹 손을 내밀긴 하였으나 적극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른 사람의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으나, 아주 가끔 자기가 잡으려는 것에 눈길을 주곤 했다. 쉽게 말해 12개월짜리가 3개월 수준의 발달을 보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우리 동네 재활센터 선생님은 곧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우리 가족을 북돋았고, 실제로 아이를 걷게 하기 위해 엄격한 훈련을 계속 진행했다. 사실 그 선생님의 그런 엄격함 속에는 아이에 대한 사랑만 있는 건 아니라는 느낌이 있었다. 자신의 업적을 쌓고자 하는 열망도 드문드문 보였다. 그래서 우리가 가끔 다른 선생님을 뵙거나 시설에 다녀오면 좋아하지 않았다. 온전히 자기 힘으로 우리 막내를 걷게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빠르게 아이를 발달시켜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좋은 특성인데, 가끔 훈련 중 아이에게 하는 말의 강도가 높을 때가 있었다. 훈련이 궁금해 한 번 참관하셨던 장모님이 보다 보다 우실 정도였다.


그 선생님은 우리가 입원 재활을 시작할 거라는 말에 많은 아쉬움을 나타내셨다. 자기 손으로 걷게 하고 싶었는데 이루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도 들었다. 아이와 수개월 구르고 같이 땀 흘린 정은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내와 아이를 저녁에 따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아이가 병원 가서 입을 옷도 사주셨다. 우리 역시 당시에는 그분의 강력한 훈련 스타일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리고 열정이 앞서서 가끔 센 발언을 할 뿐이지 의도 자체가 나쁘지 않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사했고 아쉬웠다. 그분은 병원에서 훈련받고 1달 안에 걷지 못하면 다시 오라고 여러 번 말했다.


이런 선생님과 집중적으로 수개월 보내서였을까. 서울 병원에 도착했을 때 우리의 목표는 따로 논의하지 않았어도 ‘걷기’로 통일돼 있었다. 3개월만큼만 발달한 아이를 6개월의 입원 기간 동안 걷게 하겠다는 결의가 우리 사이에 굳었다.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걸으면 시야가 높아지고 보고 접하는 게 많아져 뇌가 훨씬 빠르게 발전한다고까지 하니, 그 아이의 자발적 한 발짝은 우리 모두의 꿈과 소망이 됐다.


병원에 도착해 짐을 다 풀고 가족들까지 다 보낸 아내는, 같은 병실 엄마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나중에는 이해하게 됐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입원 초보였던 아내는 무척 생경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엄마들 사이에 목표라는 게 없거나 너무 희미했기 때문이다. 모두 다 우리처럼 ‘걸어서 이 병원 문을 나서겠다’는 식으로 마음 굳게 먹고 아이를 열심히 훈련시키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랜 재활과 더딘 성과로 엄마들은 지쳐있었다. 그래서 아내가 ‘아이를 걷게 할 것’이라고 목표를 말하자 코웃음 비슷한 반응이 나왔을 정도였다.


사실 나도 짐을 내리며 재활 병원 입원실이라는 공간을 난생처음 접하게 됐는데, 그 발랄한 듯 무거운 분위기기에 압도될 뻔했다. 그곳의 아이들 중 상당수는 말을 하지 못하거나 어눌했고, 이동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니 아이들과 보호자들이 많은데도, 뭔가 알 수 없는 조용함이 공간 전체에 깔려 있었다. 도서관처럼 조용했다는 게 아니었다. 분위기 전체가 침울한 것도 아니었다. 엄마들끼리 웃고 대화도 나누고, 아이들의 앙증맞은 소리도 있긴 한데, 뭔가 비어있거나 허전한 느낌들이 있었다. 포기할 수도 없고 희망도 가질 수 없는 그 중간 지대의 공기가 아니었을까, 지금 와서 짐작한다.


아이들의 어려움이라는 것도 너무나 다양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웃으며 누워만 있는 아이, 이상한 자세로 걷고 이상한 발음으로 말하는 아이, 신나게 뛰어노는 개구쟁이 같은데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아이, 너무 작고 힘이 없어 안아 드는 것조차 두려워지는 아이, 십 년 넘게 걸음마에 성공하지 못하는 아이, 온몸에 화상을 입은 아이, 외부와 소통이 되지 않은 채 마치 자기 영역 확보하듯 작은 원 모양으로 주야장천 뛰어다니는 아이... 우리 막내의 발달 지연은 생각나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런 아이들을 보자 내 마음에 안도감 비스무레 한 게 찾아들었는데, 화들짝 놀랐다. 마른 장작 위 불씨 보듯 부랴부랴 꺼버렸다. 난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삼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본능처럼 드는 그 기분이 스스로 역했다. 우리 아이에게 집중해야 하는데, 그래서 우리 아이 자체로부터 행복과 만족을 느껴야 했는데, 남과 비교해서야 그동안 내 마음속에 나도 모르게 있었던 조바심이나 위기감 같은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완화된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우리 아이 그렇게 조급해야 할 아이 아닌데, 조금 다른 속도로 자라고 있을 뿐인데, 나는 입으로만 그렇게 말하고 사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순식간에 내 안에서 일어난 이 일은 꽤나 오랜 시간 내 안에 뭔가를 남겼다. 난 아직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다만 ‘나 당신들과 같은 처지면서, 당신들과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으면서, 감히 당신들을 내 안도의 재료로 삼으려 했어요’라는 그 찔림이 죄책감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채무감 같은 묵직한 것으로 존재했었다는 것 정도로만 표현할 수 있다. 또 그것은 우리 아이를 향한 미안함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지금은 그 무게가 줄어든 상태다. 입원 생활이 길어지고, 그 아이들과 가정의 사연을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 아이의 상태를 그들과 비교하지 않게 됐다. 털끝만큼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아 마음이 편하다.(비교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비교의 시선을 가진 당사자가 제일 괴롭다는 걸. 비교하지 않게 되는 것만큼 마음을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는 게 없다.) 그들의 아픔을 나도 최대한 느껴보려 했더니 그 파렴치한 면모가 사라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채무감으로부터 훌훌 자유롭지 않은 건, 어찌 됐던 그날 그 한순간에 안도감이 들었다는 사실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 후 난 아픈 아이들을 여러 병원에서 마주칠 때마다 어쩐지 빚진 기분이 들곤 한다. 막 괴롭고 힘든, 슬퍼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나는, 그런 류의 감정은 아니다. 다만 내 앞날에 저 아이들에 대한 빚을 갚는 과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예감처럼 스치는, 그 정도의 감각이다. 내가 우리 막내 앞에서 안내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막내가 날 이끌고 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keyword
이전 14화입원하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