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막내를 병원으로 보낸 다음 날, 눈 뜨자마자 새로운 현실이 들이닥쳤다. 당시 나는 작은 전문 매체의 국제부 기자 자격으로 집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국제부라 시차 때문에 업무 시작 시간이 늦어도 아침 여섯 시여야 했다. 일어나자마자 구독하고 있던 모든 외신들의 인터넷판을 열고 간밤에 일어난 일들을 확인해 요약했다. 그 후 우리 분야의 사건들도 똑같이 해 전파하는 것이 나의 정해진 오전 일과였다. 각종 사건 파악과 정리, 전파까지 마치면 11시 반~12시가 됐다. 그러면 아내가 차려준 맛있는 밥을 먹으로 부엌에 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오후 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랐다. 해외 소식들을 파악하고 요약하면서 아침을 차려야 했다. 여기서 아침을 차린다는 건 애들을 깨워서(초등 고학년 아이들 깨워보았는가? 지독히 안 일어난다), 아침 상 앞에 앉히는 것도 포함된다. 학교 시간표와 숙제, 준비물도 대략이나마 확인해 아이들에게 상기시켜줘야 했다. 회사 일 때문에 내가 직접 나서서 챙겨 주지는 못했고, 챙겨 가라고 채근했다. 아이들과 같이 상에 앉아 아침을 떴으면 좋았겠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어떤 날은 식빵만 식탁에 꺼내놓고 알아서 토스트 해 먹으라 아이들에게 말해놓은 채 서재로 돌아가기도 했었다.
오전 기사를 쓰면서도 다른 머리 한쪽으로는 아이들 점심 차려줄 고민을 해야 했다. 아침에 토스트나 시리얼 먹인 날에는 이 고민이 꽤나 큰 비중을 차지했다. 점심이라도 잘 먹여야 한다는 아비의 마음이, 더 좋은 기사를 쓰고 싶다는 사회인의 마음보다 우위에 있었다. 문제는 내가 요리를 못한다는 거다. 할 수 있는 건 미역국과 김치찌개가 전부였다. 잘 먹여봤자 스팸이나 꽁치 들어간 김치찌개 아니면 황태나 참치로 끓인 미역국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 점심 고민이 큰 날에는 기사 질도 떨어지고, 아이들 점심도 크게 나아질 것 없는, 이도저도 아닌 결과만 나왔다.
오후가 되면 나에게 크게 두 가지 임무가 주어졌다. 그날의 주요한 사건을 취재해 기사화하는 것이 하나, 회사에서 발간하는 주간지의 콘텐츠를 마련하는 게 둘이었다. 국제부라 취재를 발로 뛸 수가 없었다는 게 다행이었다. 여기저기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고, 때론 이메일로 인터뷰를 해가며, 기사를 만들었다. 나름 국제부 기자일 10년 차라 이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주간지였다. 한 주 동안 해외에서 나온 주요 보고서들을 번역하고 로컬라이징 해야 했는데, 세계의 전문가들이 수많은 날 동안 집단으로 연구하고, 추론하고, 실험하고, 확인해서 낸 결과물을 충주에 사는 어느 비전문가 아저씨가 뚝딱 번역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매일 처음 듣는 개념과 처음 보는 온갖 전문용어들을 학습하고 이해해야 했다. 외부 번역가들이 있었지만, 결국 감수는 내가 해야 했기 때문에 업무량이 실질적으로 줄어들지는 않았다. 이런 보고서를 일주일에 4~5개씩 완료해야 주간지 하나가 완성됐다. 수년 째 주말도 없이 살았다.
그래서 아내가 있을 때도 나의 오후는 온전히 회사의 것이었다. 2~3시에 시작한 오후 일과는 빨라야 새벽 12~1시에 끝나기 일쑤였다. 아이들은 늘 ‘아빠가 재택근무 해봤자 같이 놀지도 못한다’는 게 불만이었다. 아내도 늘 시간에 쫓기는 나 때문에 덩달아 불안해했다. ‘당신 마감 괜찮아?’라는 질문을 아내는 만성적으로 입에 달고 살았다.
여기서 아내가 빠지니 큰일 났다. 아침과 점심 설거지, 빨래와 빨래 개기, 장에 옷들 넣어 놓기, 집안 청소 전부 일과에 포함돼야 했기 때문이다. 먹어야 했기 때문에 설거지는 늘 1순위였다. 입어야 했기 때문에 빨래와 개기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설거지된 식기들을 제자리에 넣어주기만 해라, 다된 빨래를 제자리에 잘 넣어두는 것도 너희가 해라, 아빠는 식기세척기랑 세탁기 돌릴게. 처음에는 삐그덕 댔지만, 점차 이 체계가 자리를 잡아갔다. 저녁은 점심에 먹고 남은 걸 다시 덥혀서 먹는 게 대부분이었다.
난 멀티가 도무지 되지 않는 유형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여기저기서 펑크들이 나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기사 요약만 해놓고 전파를 하지 않기도 해 회사에서 난리가 나기도 했고, 기껏 찌개를 끓여놓고 아이들을 기다렸는데 밥이 없어 옆집에서 공깃밥을 급히 빌리기도 했다. 관공서나 은행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항상 뒤로 밀리기도 했고, 아내가 병원에서 필요하다고 한 물건을 챙기지 못하고 병원에 가기도 했다. 모르긴 해도 기사질도 그 당시는 좋지 않았을 것이다.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서도 점점 문제가 나오기 시작했다. 회사 일은 줄어들지 않고, 집안 일도 쓰나미처럼 몰려왔기 때문에 내가 아이들에게 요구하고 바랐던 건 딱 하나, 차려준 음식 잘 먹으라는 거였다. 애들이 먹을 거 불평만 하지 않아도 나는 많은 시간을 아낄 수 있을 것 같았고, 실제 그랬다. 입맛을 일일이 맞춰줄 시간도 능력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 둘째는 입이 좀 짧은 편이었다. 아빠와 집의 급박한 상황을 알고 있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그 입맛이 갑자기 개선되지는 않았다. 음식 불평을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먹는 양이 크게 줄었다. 식탁에서는 매일처럼 나에게 혼났다. 아이는 말라갔다.
첫째는 첫째대로 말수가 줄어갔다. 한창 이런저런 고민과 생각이 많을 나이인데, 아빠는 바쁘기만 했다. 그 아빠에게서는 늘 ‘조금 있다가’라는 답만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답해주는 경우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가 그나마 말 상대가 되어주었는데, 그 엄마는 멀리에 있었다. 가장 사랑하는 막내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무렵 딸아이는 속으로 뭔가 많은 걸 삼켰던 것 같다. 그중에 말이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렇다.
그 생활을 한 반년 했을 무렵, 나는 코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난 피곤하거나 몸이 안 좋아서 코피를 흘려본 적이 살면서 한 번도 없었다. 튼실한 체형과 체질을 가지고 있어 건강에 있어서는 크게 어려움이 없이 살았다. 그래서 처음 코피가 났을 때 웃어넘겼다. 하지만 연달아 서너 번 출혈이 있고 나서부터 살짝 걱정이 들었다. 너무 몸을 갈아 넣고 있었나.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데...
우리 집이 뭔가 엉망진창으로, 겨우 구색만 갖춘 채 돌아가고 있었다. 찝찝했다. 하지만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막내만 나아진다면 뭐든 희생해도 돼,라고 생각했는데, 그 희생이라는 게 생각보다 커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