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여행
해 질 녘의 후시미이나리타이샤도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낮 시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예전 붉은 도리이로 이어진
긴 산도[参道]에 도전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세에 밀려
발만 딛고 뒤돌아선 기억이 있다.
문뜩 그때 생각이 나 사진첩을 뒤적이니
7년 전 유월의 어느 비 내리는 날이었네.
비가 내리면 한산할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서 아쉽지만
그냥 발길을 돌렸다는 짧은 기록이 있다.
일본 전국에 약 3만 개 있는 [이나리신사]의
총본궁이 바로 후시미이나리타이샤다.
후시미이나리타이샤의 가장 큰 볼거리라면
뭐니뭐니해도 센봉도리이[千本鳥居].
1300년의 역사를 느끼게 하는
붉게 칠해진 도리이가 즐비한 풍경은
보는 이들을 압도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이나리후시미타이샤는
교토의 하츠모데[初詣 : 새해 첫 참배]
참배객 순위 1위로도 유명하다.
(참고로, 전국 1위는 도쿄의 메이지진구)
아무튼,
사람이 많기로 유명한 신사다.
만약 조금이라도 한적한 시간을 찾는다면
저녁 시간이 아닐까 싶다.
오픈 시간이 정해져 있는 다른 신사들에 비해
이곳은 24시간 오픈이라
하루 일정의 마지막에 넣기 좋고
위까지 오르면 야경까지 볼 수 있으니
그런 점에서 저녁시간 방문은 꽤 매력적이다.
(물론 나도 해 질 녘을 일부러 맞추었다)
센봉도오리 입구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사람이 줄어드니 입구에서 포기하지 말고
올라가 보라던 어떤 이의 말을 떠올리며
앞사람과 적당한 간격을 둬가며
나는 발에 힘을 주어 앞으로 전진했다.
오르다 보니 신기할 만큼
사람들의 모습이 점점 줄어들어
속도를 조금 낮춰 걷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도리이를 교체하는 곳이 있었는데
그 풍경도 신기했다.
미로 속을 헤매는 것처럼
아무리 걸어도 끝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산도를
그렇게 타박타박.
도리이 안쪽으로 걷다
바깥쪽으로 나와
줄지어 있는 도리이를 뒤돌아보았다를
계속 반복했다.
크고 작은 도리이가 즐비한 풍경은
어느 각도에서 담아도 신비로운 그림이 된다.
사람이 없는 풍경을 찍는 건
불가능이라 생각했는데
감사하게 작은 행운이 몇 번 있었다.
고양이는 고양이 전용 길이 있다.
숨을 헐떡이는 사람들 틈을 지나
아주 여유로운 자태로 자신의 길을 걷던 고양이.
신사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그렇게 덥다고 못 느꼈는데
걷다 보니 어느새
얼굴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호흡도 점점 거칠어졌다.
여기가 어디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음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올라왔을까...
이제 더 이상은 못 올라가겠다
나는 두 손을 들고 싶어졌다.
여기가 어디쯤인지도 궁금했고
또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하는지도 궁금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내려오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반쯤 더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그쪽 경치는 어떠냐고 다시 물었더니
너무 멋지다며 힘내라고 했다.
하지만 난 이 이상은
도저히 올라갈 수 힘이 나질 않았다.
올라가는 건 둘째치고
다시 내려갈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떡하면 좋을까 고민하며
잠시 발을 멈췄는데
위쪽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음료를 파는 곳이 있나 싶어
마지막 힘을 다해 한 계단 위 쪽으로 오르니
거기엔 커다란 바위가 있었고
그 바위엔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교토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살 것 같았다.
정상을 찍고 내려온 것인지 아니면
나처럼 더 이상은
오를 수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탁 트인 풍경과 선선한 바람에
몸과 마음이 녹아든 것처럼 아주 평온해 보였다.
그제야 나에게도
바람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바위 한 편에 걸쳐 앉아 해가 떨어지고
서서히 불이 밝아오는 마을과 눈을 마주하며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을 때까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시간을 즐겼다.
이곳 이나리산을 일주하는 데는 약 4Km,
시간은 2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하니
사실 마음먹고 오르지 않으면
오르기 힘든 곳이다.
그래서 이나리산을 한 바퀴 다 돌아야 그제야
진정한 후시미이나리타이샤를 알게 된다고 한다.
언젠가 한 번쯤은 정상까지 올라가 보고는 싶지만,
그게 아쉽게도 이날은 아니었다.
참,
정상에는 스에히로타아샤[末広大社]라는
신사가 있는데
좋은 운기가 끝까지 널리 잘 퍼진다는 뜻이 있어
뭘 빌어도 잘 이루어진다고 한다.
바위 위에서 쉬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자
나도 내려갈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할 것은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마음의 준비랄까.
(사실 내려갈 일도 꿈만 같다)
사람들의 발걸음은 빨랐고
사람들의 모습은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불빛이 약해서 그런지
어둠은 점점 더 짙어갔고 무서웠다.
내려가는 길 곳곳에는
키츠네(여우) 크고 작은 동상이 있는데
정말이지 무서워서 눈길을 줄 수도 없었다.
나는 혼신의 힘으로 앞사람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센봉 도리이로 들어갔던 길과
나오는 길은 분명 달랐지만
완전히 세상이 깜깜해진 후에야
후시미이나리타이샤에서 나올 수 있었다.
정문에서 JR 역까지는 1분 정도의 거리,
전철을 기다리며 맞은편 플랫폼을 보니
애니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여우한테 홀린 것처럼,
깜깜하던 내려오는 길을 생각하니
살짝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힘들고 신비하고 조금은 무서운
그렇지만 아주 특별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