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여행
에이덴[叡電]의 넓은 창이 좋다.
데마치야나기역[出町柳駅]을 출발해
조금만 달려도 모습을 들어내는
창을 가득 채우는 고즈넉한 풍경이 참 좋다.
목적지는 기후네신사(貴船神社).
에이덴 기부네구치[貴船口]에 내려
버스를 타고 5분 정도 산속을 달리면 되니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명은 기부네, 신사 이름은 기후네)
하지만 기후네신사의 오픈 시간은 6시,
첫 버스의 출발 시간은 9시경이라
이른 아침의 산사 산책을 즐기려면
버스는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아마도 기부네구치에 도착한 시간은
7시쯤이었던 것 같다.
에이덴에서 내린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3명.
역 밖으로 나가서
가장 먼저 [곰 출몰 주의] 표지가 보였다.
살짝 멈칫한 나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속삭이는 듯
어디선가 작은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렇다.
에에덴은 나를 또 비현실의 세계에 데려다 놓았다.
잠시 주위를 서성이다 보니
어느새 함께 내린 2명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물소리에 마음을 빼앗긴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앞을 향해 걸어나갔다.
반쯤 뛰듯 빠른 발걸음으로 조금 앞으로 나아가니
함께 역에서 내린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좀 더 속도를 내어
그 두 사람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그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몸짓으로
그들의 발걸음에 내 발걸음을 맞췄다.
그들과 특별한 눈인사도 말을 나눈 것도 아니지만
이 시간 기후네신사를 향하는 우리는
일종의 공통점이란 게 있다.
우리 중 누구 하나 마냥 앞만 보고 걷는 사람은 없었다.
중간중간 계곡의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고
코끝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기도 했으며
그림 같은 풍경에 마음을 내어주기도 했다.
시선이 향하는 방향은 각자 조금씩 달랐지만
신기하게도 걷는 속도는 비슷했다.
아무리 혼자가 좋은 사람이라도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숲속을 걷는 건
조금 두려웠던 모양이다.
곰 출몰 표지만 아니어도
조금 덜 무서웠겠지만.
기후네신사를 오르는 오른편 계곡 쪽은
신사에 가까워질수록 계곡 속에 펼쳐진
가게들이 모습을 들어냈다.
이른 아침의 고요도 좋지만
계곡에서 쉬어가는 휴식도 못지않게 좋을 것 같다.
버스를 타면 5분 정도의 길은
걸으면 20분 정도가 소요되는 것 같은데,
이 길은 버스를 타고 5분 만에 지나쳐가기엔
너무 신비롭고 아늑해서 다시 오더라도
버스보다는 걷는 쪽을 택할 것 같다.
그렇게 도착한 기후네신사.
나무 뒤에 몸을 살짝 숨기고
엿보는 기후네신사를 오르는 계단은
마음을 더 설레게 했다.
어느 길에서 나타난 것인지
계단 끝자락에서 새로운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풍경이다 바로.
나를 여기로 이끈 풍경이.
오르는 사람이 있는 풍경도
아무도 없는 계단 풍경도
신비롭고 멋지긴 마찬가지였다.
끝없이 하늘로 쏟은 하늘거리는 나뭇잎들까지,
이 신비로운 에너지를
뭐라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기후네신사는 지어진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카모가와[鴨川]의 수원지[水源地]에 해당하는
물 공급을 담당하는 신을 모시고 있다.
헤이안쿄[平安京] 천도 이래
수원[水源]을 지키는 신으로서
황실의 각별한 숭배를 받아왔으며
특히 인연을 엮어주는
엔무스비[縁結び] 신사로도 유명하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숲의 공기나
신사의 기운도 그렇고
왜 이곳이 파워 스폿인지
막연히 알 것 같았다.
신사에 들어와
가장 먼저 발이 닿은 곳은 테미즈야[手水舎].
테미즈야는 참배를 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장소를 말하는데,
기후네신사의 테미즈야는
다른 곳들과 다른게 신성한 느낌이 강했다.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니
히샤쿠에 세계 진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そうだ 京都、行こう。]
[그래 교토, 가자 ]
티브에서 CM이 흘러나올 때마다
귀에 콕 들어오던 그 말,
그때가 가을일 때는 그 말에
얼마나 마음이 흔들리던지.
그렇게 교토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이 말은
JR토우카이가 1993년부터 실시하고 있는
캠페인의 캐치프레이즈다.
지금은 이 이름으로 웹사이트도 운영하고 있는데
교토의 알찬 정보가 많다.
물론 기후네신사도 소개되어 있고.
아무튼,
히샤쿠에 새겨진 글귀를 보니
교토를 한숨에 달려가고 싶었던
그때가 잠시 떠올랐다.
신사에서 내려다보는 숲은
올라올 때 보던 숲보다
더 깊이가 느껴졌다.
더욱더 신비로워진 숲은 새소리도 물소리도
세상 모든 것들을 감싸 안은 것처럼 포근했다.
나는 그 자리에 홀로 앉아
조금 길고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다음은 아무도 없는 적막한 신사의 아침을
느린 걸음으로 돌았다.
작은 소원도 빌었다.
올라왔던 길로 내려가는 사람이 없다 했더니
뒤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따로 있었다.
기후네신사는 사람들이 어디로 들어와서
어디로 사라져가는지 알 수 없는 것까지도 신비로웠다.
아래까지 내려와 뒤를 돌아보니
조금 전까지 발을 딛고 있던 그 시간이
몽롱하고 뿌연 안개처럼 흩어지는 것 같았다.
신사를 벗어나니
날이 조금 더 환해졌다.
신사를 향해 올라올 때보다
모든 것들이 선명해져서 그런지
근처의 크고 작은 가게와 식당들도
확연히 그 존재감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가을을 연상하게 만드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 길에서 술을 가득 실은
자그마한 트럭도 만났다.
아마도 조금 후면
계곡에 펼쳐진 테이블에는
사람들로 가득 찰 것이다.
나는 잠시 저 계곡 안 테이블 앞에 앉을 날이
어느 날 좋은 가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다시 역으로 향했다.
역으로 향하는 길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기부네구치 역에서 에이덴을 기다리다
그제야 올라가던 길 중간에
쿠라마데라[鞍馬寺]로 빠지는 길이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바보처럼.
아쉽지만,
쿠라마데라는 다음번 여행의 즐거움으로
남겨두기로 하고 나는 에어덴에 몸을 실었다.
데마치야나기 역으로 향하는 에이덴은
한적했고 창밖 풍경은 변함없이 고즈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