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쳐야 미친다, 불광 불급(不狂不及). 글자 그대로해석하면 미친 사람마냥 시간을 보내야 특정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다. 여기서 '특정 지점'이라 함은 '고수의 반열'쯤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고수의 반열'에 도달한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아 고수임이 널리 알려질 수도 있고, 혼자 묵묵히 고수임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목적을 달성한 고수는 마냥 기쁘기만 할까? 고수가 되기 위해 미쳐 지낸 지난 시간 동안 소홀했던 소중한 인연에 대해 미안해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가보지 못한 다른 길에 대한 후회의 벽 앞에 서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쳐서 미친 들 그것이 결과적으로 좋은 일로 여겨질지 나쁜 일로 생각될지는 그때가 되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과정이 중요한 사람이 있고, 결과가 중요한 사람이 있다. 추구하는 삶의 방향성은 사람마다 다르며, 도착지점 역시 각자만의 시공간이다. 어느 누구도 잘하거나 잘못한 삶을 살지 않는다.모두의삶이옳을 뿐이다. 자기만의 방향성이 있고, 시공간이 있는 것이다.명리(命理)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있다.
사실, 미치지 않고도 미치는 사람이 있다. 미쳐도 못 미치는 사람도 있다.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 또한 있을 것이다. 미쳐야 미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쳐서 미친 사람도 있는 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이것이 세상이고 명리(命理)인 것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지인들의 질문에 수년간 내 대답은 '명리 공부'였다. 그야말로 나는 명리 공부에 미쳐 지냈고, 여전히 미쳐있다. 하지만 고수의 반열은 언감생심 택도 없는 이야기이고, 도대체 언제까지 얼마나 더 많은 공부를 해야 이 공부가 끝이 날지 종잡을 수도 없다.
미쳐있긴 하지만 미치게 될 기미 조차 보이지 않는 내가 명리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부끄럽기는 하다. 하지만 이 공부가 왜 나를 미쳐있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명리 공부는 사람과 자연과 우주를 보여준다. 삶과 인연과 관계를 이야기한다. 얽히고설킨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게 하며, 그 얽히고설킴이 극히 단순함을 역설한다. 이 공부는 참으로 매력적이다. 명리가 내게로 왔다.
명리학은 음양오행의 순환 원리를 기본으로 우주 만물에 대해 설명한다. 원자, 전자, 원소, 빛, 파동, 공명 등의 단어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들리는 반면, 음양(陰陽)이나 오행(五行)과 같은 단어는 참으로 고리타분하게 여겨진다. 기(氣)라는 단어 역시 왠지 모르게 이단처럼 들린다. 서양식 교육과정에 익숙한 우리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이나 기(氣)와 같은 단어에서 이질감을 느낀다.
그래서일까? 내가 명리 공부에 빠져있다고 이야기하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주춤거리는 태도를 보인다. 도대체 왜 그런 미신에 얽매여 있냐는 반응부터 나이 들어서 점집이라도 차리려는 노후준비냐는 질문까지 각양각색이다. 명리를 공부하기 이전 같았으면, 조소 섞인 태도를 참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안다. 타인의 태도는 참거나 참지 못하는 것과 관련한 문제가 아니다. 추구하는 삶의 방향성과 자기만의 시공간이 있음을 그냥 알 뿐이다.
명리는 과학인가?
명리학(命理學)은 생명의 이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학문이다. 이때 생명은 사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수렴해 들어간 근원적 단위부터 확산해 나간 무한의 단위까지를 대상으로 한다. 태양계 너머 우주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원자 단위까지 느끼게 한다. 물질의 정체와 변환을 설명하는 화학(化學)이 명리(命理)와 닮아있다.
원자 내부의 원자핵과 원자핵 안의 양성자와 중성자, 이들을 쪼갠 '쿼크'는 인간이 실험으로 알 수 있는 가장 작은 크기의 규모이다. 쿼크부터 경계를 설정할 수 없는 우주까지 다루는 물리학(物理學) 또한 명리(命理)와 그 결이 유사하다. 우주를 이해하는 지구과학(地球科學)과 우주를 기술하는 수학(數學) 역시 명리학의 기반이 된다. 작은 세포부터 동식물의 완전한 개체까지 다루는 생물학(生物學)도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하는 명리(命理)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명리는 과학일까?
명리는 인문학인가?
초등학교 4학년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하다 넘어진 아픔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기억이 날뿐, 지금 아프지는 않다. 키 135cm, 청군 띠를 머리에 메고 넘어져 울고 있는 아이는 '나'인 것인가? 키 163cm, 파자마를 입고 야심한 시각에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지금 여기 중년의 여자는 '나'인 것인가? 인간의 인식체계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흐른다.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찰나'들의 연속선상에 나라는 존재가 있는 것일까.
138억 년 전 빅뱅과 동시에 시간과 공간이 생겨났다. 138억 년 가운데 한 인간이 태어나 삶을 영위하는 100년 남짓의 시간은 '찰나'처럼 여겨진다. 138억 년 가운데 한 인간의 삶이 찰나와 같이 여겨지는 것과 나라는 존재가 지나온 수많은 시간 중 운동회에서 넘어진 찰나의 기억은 지금 여기를 살고있는 나에게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 우주의 시간이나 내 어릴적 시간이 마치 교과서 속 이야기처럼 덤덤하게 여겨진다. 나는 누구일까?
명리학의 다양한 관법 중 12운성을 활용하는 것이 있다. 12운성법은 인간의 생로병사와 윤회를 기본으로 에너지의 순환을 설명한다. 순환적 시간관을 기저에 두고 있으며,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는 것과 같은 당연한 이치를 기반으로 한다. 어쩌면 인간의 생로병사는 해가 뜨고 지는 것과 같은 당연함일 것이다. 명리 공부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생로병사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한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종교들의 교리가 명리와 맞닿아 있으며, 인생과 세계에 대해 연구하는 철학(哲學)이 명리와 닮아 있다.
우리는 흔히 명리학을 사주학 또는 사주명리학으로 이야기한다. 학(學)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그나마 준수해 보이나, 그마저 없게 되면 명리는 사주팔자 운세보기 등의 용도로 국한되어 버린다. 사람이 태어난 년, 월, 일, 시를 가지고 인간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허무맹랑하게 여겨지기도 할 것이다. 명리학이 허무맹랑함이 아님은 천천히 이야기해 가도록 하겠다. 다만, 명리학이 사람의 심리와 삶의 패턴을 읽어내는 놀라운 도구라는 점에 대해 말하고 싶다.
명리(命理)의 이치를 인간에게 적용하면, 심리학(心理學)이 된다. 인간이 이해하는 시간에 적용하면 역사학(歷史學)이 되고, 공간에 적용하면 지리학(地理學)이 된다. 사회 및 국가와 세계에 적용하면 정치학(政治學), 법학(法學), 사회학(社會學), 경제학(經濟學)과 통한다. 그렇다면 명리는 인문학일까?
묵직한 울림을 주는 공부
사주팔자나 명리를 재물운이나 궁합을 보는 미신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신문 한 귀퉁이의 띠별 운세나 별자리 운세와 비슷하게 여기기도 한다. 혹은, 혈액형 해석이나 가벼운 심리 테스트와 유사하게치부할 때도 있다. 명리학이 과학인지 인문학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명리학은 인간 심리를 깊숙하게 들여다보고 있으며, 우주 만물의 관계들을 큰 틀에서 제시한다.
명리학을 공부하다 보면 굳이 사주팔자를 해석하는 방법을 알아야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떤 삶이 내 앞에 주어지든 해가 뜨고 지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이해 역시 명리에 대한 공부가 선행되어야 한다.명리 공부에 미쳐있는 내가 도착하여 미치게 될 특정 지점에서 이 공부가 공(空)함을 알게 될 것 같은 예감이 있다. 결과가 어떻든 명리 공부의매력은 치명적이다.
갈 길이 멀지만, 나는 명리 공부에 미쳐있다. 재야의 종소리 같은 묵직한 울림이잔잔한 파도처럼 스며들고 스며나가는 이해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