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숙하지 않은 불효녀의 맛
감동란, 짭짤한 소금 간에 부드러운 반숙란의 첫 입은 나에게 큰 감동이었다.
계란을 삶을 때 항상 반숙란 건져 올리는 타이밍을 잡지 못해 아직 익지 못한 노른자에 탄식하거나, 퍽퍽한 완숙란을 먹던 나에게 2천 원에 이렇게 완벽한 계란을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신세계였다. (참고로 감동란은 2014년에 국내 편의점에 처음 유통 되었다)
근데 2년 전 엄마가 나한테 감동란을 아냐고 물었다.
우연히 학원 학생덕에 먹었는데 너무 맛있다고 했다. 그때의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엄마가 감동란을 몰랐다는 것, 내가 엄마에게 감동란을 권하거나 사주지 않았다는 것, 딸 아들이 아닌 다른 제3의 아이에 의해 감동란을 알게 되었다는 것,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정보의 시차가 8년이 날 수 있다는 것 등의 생각 때문에 복잡한 감정이 몰려왔다.
어릴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의 미식에 대한 관심은 부모님에 의해 발달했다.
나는 음식을 좋아하는 걸 넘어, 음식에 관해서는 6~7살 때 기억일지라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너 6살 때 삼촌 상견례 기억나?"라고 하면 "응! 앞산 중국집에서 수타 짜장면이랑 탕수육 먹었을 때 맞지? “라고 대답하는 수준이다. 음식과 결부된 기억은 아주 어릴 때라도”완전 기억"을 자랑한다.
우리 집에 자가용이 없었던 시절, 대구에서 대관령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가 양 떼목장을 구경하고 먹었던 곤드레밥과 오삼불고기,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지도로 겨우 찾아가 먹었던 고성 장어구이.
치과를 무서워하던 우리 남매를 위해 진료 후에는 항상 롯데리아라는 보상을 줬던, 시리고 소름 돋는 치과의 감각을 지나고 보상처럼 찾아오는 새우버거의 바삭한 패티의 맛.
모든 미식과 제철음식은 부모님한테서 배웠다. 이제 시간이 지나 내가 더 맛있는 것, 새로운 것을 많이 알게 되고 정보의 방향이 역전되었다.
사실 이것뿐만은 아니다. 밤새 열보초를 서고, 성장통에 시달리면 자다가도 딸의 다리를 주물러주던 엄마는 한차례의 수술을 겪고 더 작고 약해졌다. 내 생애 최초의 야후코리아 이메일을 만들어주던 아빠는, 이제 나에게 구글 계정 비밀번호 찾는 방법을 물어본다.
감동란에 큰 충격을 받았던 나는, 이제 대구 본가에 내려가면 "이게 최신 유행이라면서" 요아정을 시키고, (아이스크림에 2만 원씩 쓰냐고 한소리 들을까 봐 영수증은 숨긴다) 마켓컬리에서 파스타 밀키트와 창억떡, 템페칩을 주문해 본가로 보낸다.
그들의 입맛을 따라 자랐듯이, 내 입에 맛있는 건 우리 부모님한테도 맛있으리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