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훈과 성자의 이야기
지금부터 편의상 호칭으로 할아버지는 영훈, 할머니는 성자라는 가명을 쓰겠습니다.
부부는 성격이 비슷해야 다툼이 적어 좋다는 주장과 달라야 약점의 상호보완 측면에서 좋다는 주장은 양쪽 다 일리가 있지만 영훈과 성자는 여러 모로 다른 사람이었다. 둘은 여느 부부들처럼 시대의 분위기에 맞춰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만나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영훈은 두 번째 결혼이었고 성자는 초혼이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부장적 권위와 질서가 지배하던 시절임에도 영훈과 성자의 위치는 정 반대였다. 아주 어릴 때는 별다른 의심 없이 이런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을 받아들였는데 학교에 들어가고 머리가 커지면서 뭔가 두 사람의 관계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훈은 말수가 적고 온순하며 사춘기 소녀처럼 부끄럼을 많이 탔다. 체격이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남자다운 박력이 부족하고 바람 빠진 풍선마냥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반면 성자의 뚱뚱한 체형에서 축적된 호쾌한 음성은 멀리서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하고 싶은 말은 절대 참지 못하고 남 눈치 보는 일 없이 일단 내지르는 타입이었다. 이런 성격상의 차이는 권위의 크기와도 자연스레 연결되었다. 성자는 집안에서 수렴청정을 하는 대왕대비처럼 행동했고 영훈은 별다른 이의 없이 성자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다. 아버지는 이런 영훈의 태도가 못마땅한지 집안의 주도권을 놓고 성자와의 충돌이 잦았지만 성자를 이기기란 쉽지 않았다.
이런 기울어진 관계의 정황상 성자에 비해 영훈의 능력과 매력이 떨어지나 의심해볼 법도 하지만 그건 아니다. 일단 외모. 젊은 시절 영훈의 사진을 보면 열에 아홉은 미남이라 부를만했고 성자는 완전 박색은 아닐지라도 예쁘다는 표현을 붙이는 건 누가 봐도 무리였다. 나이가 들면서 영훈의 젊은 시절 미모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성자와는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요즘 시대에 태어났다면 영훈이 성자를 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고 다른 조건에서 영훈이 처지는가 하면 그 역시도 아니다. 영훈은 초등학교 교육을 마쳤고 한자와 한글에 능통한 반면 성자는 정규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고 한글도 잘 몰랐다. 물론 이건 시대를 감안한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둘의 지적 능력은 그 이상으로 차이가 컸다. 혹 성자의 집안이 경제적으로 더 우월한 위치에 있었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일제치하에서 다 같이 못 살던 시절이라 두 집안 모두 여유롭지 못한 살림인 건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은 무려 70여년을 함께 살다 세상을 떴다. 아무리 옛날 사람이라지만 요즘 같이 100세 시대도 아닌데 70년간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부모님의 입을 빌리자면 가끔 자잘한 다툼들은 있어도 둘의 관계에 위기를 느낄 만한 순간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 나는 이 점이 참 오묘하게 다가왔다. 애정 표현이 없는 건 그렇다쳐도 분명 남들이 생각하는 금술 좋은 노부부의 그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첩까지 두고 살던 시절임에도 영훈은 여자 문제를 한 번도 일으킨 적이 없고 이는 성자도 마찬가지였다. 사랑? 정? 70년의 세월을 한 두 단어로 정의내리기엔 불가능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성자가 영훈을 많이 좋아했던 건 맞는 것 같다. 다만 영훈은 성자에게 이성적인 애정보다 모성애적 안정감을 더 많이 찾지 않았을까. 성자가 영훈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폭력적인 측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결과 영훈은 외부로부터 상처를 덜 받고 품위를 지키며 살 수 있었다. 성자는 어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악역을 스스로 자처하며 전면에 나서 문제를 해결했다. 비록 그 방식이 현명하거나 세련되진 않았어도 성자는 그게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 믿었다. 둘은 이렇게 강한 연대의 매듭을 만들어 70년의 시간을 버티고 이어왔다. 영훈이 치매에 걸리자 성자에 대한 의존성은 극단적으로 커졌고 성자는 모든 게 자신의 운명인 양 죽을 때까지 옆에서 수발을 멈추지 않았다. 영훈을 보낸 지 얼마 안 돼 거짓말처럼 성자도 치매에 걸렸다. 얼마나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영훈을 보살펴야 한다는 강한 의지력이 적잖게 작용했을 거라고 본다. 이처럼 다른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로 존재할 때 가장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