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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un Feb 21. 2020

스물아홉의 인생 배팅 - 피자집 창업

2편. 왜 하필 피자예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다. 무려 22년이나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다. 나로서도 아주 오랜만에 꺼내보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로서도 쉽지 않은 이야기다.




1. 나는 피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일이 줄을 세워보면 싫어하는 쪽에 속했다. 싫어한다? 미워했다, 가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엄마를 빼앗아 간 피자]


어렸을 때, 엄마는 언제나 내 옆에 있었다.

나는 마마보이였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요즘의 나를 보는 사람들은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까지 지독한 마마보이였다. 엄마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엉엉 우는 아이, 자면 서도 엄마 팔을 꼭 끌어안고 자는 아이, 4살 터울 여동생이 태어났을 때 기뻐하기 전에 슬퍼했던 아이였다. 그래서 엄마는 숨을 쉬는 모든 순간 내 옆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실재로도 그랬다. 1998년 까지는.


엄마가 사라졌다.

1998년, 엄마가 사라졌다. 충분한 설명 없이, 별 다른 예고도 없이. (엄마는 몇 번이고 얘기를 했다고 했지만, 내 기억에는 지금도 없다. 내가 납득하고 받아들이기엔 설명이 한참 부족했나 보다)

엄마는 피자를 배우러 갔다. 3개월, 고작 100일도 안 되는 점 같은 시간. 그 시간이 너.무.너.무. 길어서,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다. 아니 그때의 기분이 선명하다.

나의 순간 순간을 지켜준 엄마


엄마가 돌아왔다.

엄마는 돌아왔지만, 내 삶은 확실히 전과 많은 게 달라졌다. 엄마는 피자집에 있어야 했으니까. 더 이상 예전처럼 내 옆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유치원도 혼자서 가야 했고, 수영도 혼자서 가야 했고, 학습지 숙제도 이제는 혼자서 해야 했다.


엄마가 만들어 준 피자

어떻게든 하루를 보내고 나면, 곧장 엄마가 있는 피자집으로 갔다. 테이블에 앉아 숙제를 하거나, 배달하는 형 따라 배달을 다녀오고, 그러다 보면 엄마가 내게 왔다. 엄마는 항상 피자를 만들어줬다. 그런데 그 시절의 나는 지독한 마마보이면서 동시에 심각한 편식쟁이였다.


어느 정도였냐고?

편식하는 내가 못마땅했던 엄마는 나를 어떻게든 먹이려고 온갖 시도(믹서기에 채소를 갈아서 밥을 비빈다거나, 먹으면 미니카를 사준다거나)를 했었는데, 나는 그래도 먹지 않았다. 유혹에도, 눈속임에도 넘어가지 않았다(똑똑하고, 소신 있었다). 그런데 피자 위의 피망, 올리브, 양파.. 이런 걸 내가 먹었냐고?


마마보이 시절의 나, 그리고 엄마

먹어야만 했다.

먹어야만 했다. 먹지 않으면, 엄마를 실망시키면, 언제고 다시 엄마가 내 세상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으니까. 씹지도 않고, 코를 막고 삼켰던 것 같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피자가 내 7년 인생 첫 극복이었고, 첫 도전이었다


아무튼 나는 피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피자집을 차린다 이거지..




2. 피자에게서 "극복하는 법"을 배웠다.

일곱 살, 그때까지 나라는 인간의 일생(고작 7년?) 동안에 "극복"이란 단어는 없었다. 채소가 잔뜩 들어간 피자를 꾸역꾸역 먹으면서,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는 없구나"라는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자명한 사실 한 가지를 배운 셈이다.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9살까지 엄마는 피자집을 했다. 그리고 9살, 나는 우리 집의 유일한 남자가 되었다. '이 집에 가장은 너야', '엄마랑 동생은 네가 지켜야 해' 어른들은 내게 어른이 되어야 한다 말했다. 어리광 같은 건 부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더 이상 엄마가 늦게 들어와도 기다리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내가 지켜야 하는 동생과 엄마

스무 살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모든 순간이 극복이었다.

노량진 월 26만 원 고시원에서 2년을 보냈다. 당장 700원이 없어서 삼각김밥도 못 사 먹었다. 내일은 없었고, 오늘만 걱정하던 시절이었다.

스물둘. 신림동 보증금 300, 월세 50만 원 원룸에서 1년을 보냈다. 먹고 싶은 걸 먹고 싶을 때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게 목표였고, 꿈이었다.

스물셋. 과외 4개,  주 3일 클럽 알바, 주 5일 학원 알바, 휴대폰 판매업(다시 말해 폰팔이)까지. 한 달 가운데 7일이 돈 들어오는 달이었다. 통장에 찍히는 숫자가 좋았다.

다시 노량진. 반지하 투룸에 전세를 구했다. 그리고 곧장 군대에 갔다. 자고 싶었다. 그냥 22시 소등, 06시 기상이 하고 싶었다.

전역을 하고부터 불과 얼마 전이었던 2019년 12월 31일까지 여전히 매주 3일은 클럽에서 밤새 일했고, 학교를 다니고, 스타트업에서 일했다.


넘어서야 하는 상황들이 닥칠 때면 7살에 참고 먹었던 피자가 생각났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주하는 모든 극복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 나는 언제나처럼 7살에 마주했던 피자를 생각할 것이다.


오른팔과 오른다리에 새긴 피자

그렇게 내 삶이 되었다.

그 좋아하지 않았던 피자가 시간이 흐르면서, 적지 않은 일들을 겪으면서,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라는 인간에게 조금씩 다른 존재가 되어갔다. 더 이상 넘어서야 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나름대로 치열했던 내 삶에 아주 작은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엄마가 떠오른다.

2019년 7월 엄마랑 방콕에서
2018년 겨울 엄마랑 뉴욕에서

내가 지구에서 가장 의지했던 사람, 사랑하는 사람, 존경하는 사람, 지키고 싶은 사람, 보답하고 싶은 사람, 미안한 사람, 그리고 행복했으면 하는 사람, 엄마. 피자를 보면 엄마가 떠오른다. 엄마가 세상에 전부였던, 7살의 내가 떠오른다. 그때가 떠오른다.


그래서.. 그래서.. 피자다.




스물아홉의 인생 배팅 1편 왜 하필 지금이에요?(보러 가기)


2018년 겨울 뉴욕에서 엄마를 생각하며 쓴 글

다음 편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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