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왜 하필 지금이에요?
연남동에 아주 작은 피자집을 준비하고 있다. 주변에서는 '지금 경기가 이런데 무슨 요식업이냐,,'라고 걱정 어린 얘기를 많이 해준다.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럴지도 모른다. 이것저것 하며 10년 가까이 모은 돈이 종이조각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크게 걱정되거나, 신경 쓰이지 않았다. 상황은 상황으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오히려 의욕을 불러일으킨다고 할까. 낙관적이고 심플하고 태평하다 못해 난폭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스물아홉의 나는 기본적으로 이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나름대로의 결의와 나름대로의 배짱"
다시 말하지만 나는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런 건 나한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겨먹었다(정말이다). 돌이켜보니 매번 그랬었다.
1. 편입
나는 편입학을 했다. 편입학 역사상 역대 최소 인원을 뽑는 상황. 거기다가 나는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고시원 월세, 학원비, 생활비 등 생계를 위해 일도 하고 있었다.
서강대의 경우 2012년도에 110명을 모집했지만 올해는 15명 모집에 그쳐 86%에 달하는 감소율을 보였다. 중앙대도 서울캠퍼스 기준으로 전년 202명에 비해 82% 줄어든 36명만 모집한다. 자연히 경쟁률은 하늘로 치솟고 있다. 서강대의 경우 1명을 뽑는 신문방송학과에 148명이 지원했다. 전체 15명 모집에 1863명이 지원, 평균 124:1의 경쟁률이다. 중앙대는 2명을 뽑는 역사학과에 무려 421명이 지원해 210.5:1의 경쟁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원서비(학교마다 10만 원 가까이한다)도 없어서 붙어도 안 갈 대학은 쓰지도 않았다. 6개 정도 썼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고려대학교를 제외하고 모두 합격했다. 아직까지도 졸업은 못했지만 한양대학교에 갔다.
솔직히 말해서 많이 쫄았었다.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스물한 살의 나는 무너졌을 거다. 아무렴 어때, 붙었으니까. 요즘도 이때를 떠올리면 당시의 찌릿함이 느껴진다.
2.더뉴그레이
나는 아주 작은 스타트업을 운영하고 있다. 군대 전역 후 2016년 직원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공동대표가 되었다. 학교를 다니며, 일주일에 3일은 이태원 클럽에서 밤을 새우며 바텐더로 일하면서, 3년을 제대로 된 월급도 없이 일을 했다(정말 무모하긴 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없는 시장을 만드는 일이다. 없는 시장도 만들고 있는데, '이미 있는 시장이라면 못할 게 뭐 있겠어?'라고 생각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닌가.. 싶기도 하고.
수십 번 제안을 하고, 수십 번 거절을 당하고, 겨우겨우 하나의 프로젝트를 따오고, 그 프로젝트에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작년 15곳의 브랜드와 기업이 고객이 되었고, 올해는 벌써 10곳이 넘는 고객이 생겼다.
[어쩌다 보니 내가 스타트업의 대표가 되었다] (궁금하면 읽어보시길)
아무튼 나는 그렇게 생겨먹은 것 같다.
상황 탓은 하지 않는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과정을 만드는 것만 생각한다.
이 두 가지만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경기가 어떻다느니, 네가 생각하는 거랑 다르다느니..' 그런 얘기들은 귀담아듣지 않는 편이다. 아니, 들리지 않는 편이다.
"오랜 시간 좋아했고, 푹 빠져 살았으니까"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라는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타임머신이 있고 딱 한 번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당신은 무얼 하고 싶은가?"
내 대답은 꽤 오래전부터 명확하게 정해져 있다. 1954년의 뉴욕으로 날아가서 그곳 재즈클럽에서 클리퍼드 브라운&맥스 로치 5중주단의 라이브를 원 없이 들어보고 싶다. 정말 그거면 되겠어? 피라미드 건축 현장이나 마라톤 전투, 히틀러가 주도한 뮌헨 봉기 같은 역사적 사전을 직접 목격하고 싶진 않으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십 대 초반을 지나고(이때는 정말 오늘을 살기에도 벅찼다), 어느 정도 나의 미래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을 때가 되었을 때부터이지 않았을까. 아무튼 나도 하루키처럼 꽤 오래전부터 명확하게 "내가 만든 피자를 파는 공간"을 갖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서른 전에는 꼭 이었다.
아무튼 이 얘기를 계속하려면, "왜 피자를 오랜 시간 좋아했고, 빠져 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지키고 싶어서"
스물다섯부터였나.. 서른 살이 되기 전에는 꼭 피자집을 차리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새 스물아홉이 되었다. 왜 하필 서른 전이었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늘 이런 식이었다. 그저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 타협하지 않는 것.
짐작해보건대, 이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서른 살이 되면 여유라는 것도 어느 정도 부리면서, 아둥바둥이란 단어는 더 이상 나라는 인간의 일생에서 조금은 멀어져서, 대단한 게 아니라도 조금씩은 베풀면서,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을까. 스물다섯의 나는 그런 서른을 기대하고, 상상하고, 꿈꿔왔던 것 같다.
아무튼 혼자라면 절대 서른 전에 못했을 피자집. 좋은 형을 만나서, 그리고 언제까지고 옆에 있을 친구가 함께라서 스물아홉에 시작한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