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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 가는

말과 말 사이, 손으로 남겨지는 것들은

by 현정아

말과 말 사이, 손으로 남겨지는 것들은

때는 바야흐로 1999년 4월. 갓 입사한 신규 간호사가 열심히 뛰어다닌다. 머리에 쓴 하얀 간호 Cap이 뛰어다닐 때마다 흔들거린다. 병실 문을 열고 혈압을 재고 체온 측정을 하다 보면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지금은 간편하게 자동 혈압계와 고막 체온계 또는 비접촉 체온계를 이용해서 측정하지만, 그때만 해도 수은혈압계와 청진기, 수은 체온계를 이용해서 환자의 상태를 평가했다.


혈압계 뚜껑을 열고 수은이 제일 아래로 떨어져 있는지 확인한다. 공기주머니처럼 생긴 가압기 밸브를 잠가 펌프질 한다. 손목의 요골동맥에 손을 갖다 댄 후 맥박이 뛰지 않는 지점(환자의 예상 수축기압)에서부터 20~30mmHg 수준으로 압력을 더 올린다.


여기에 진입하면 비로소 그대로 멈춘다. 서서히 가압기(고무공 모양의 bulb)의 공기를 빼면서 처음 들리는 음(수축기 혈압)과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음(이완기 혈압)을 정확하게 잡아낸다. 청진기로 들리는 박동의 첫 음과 끝 음 사이를 의학에서는 코로트코프 소리( Korotkoff’s sound)라고 한다.

과거 수은 혈압계 / 이미지 출처, 의협신문


청진기를 통해 ‘톡톡’ 울리는 맥박 소리가 바로 코로트코프 소리( Korotkoff’s sound)다. 이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운다. 그 음이 들리던 처음 이 순간이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거의 다 왔다. 이완기압만 측정하면 이 환자의 활력징후 측정은 드디어 끝이 난다. 갑자기 환자가 온갖 말로 떠들어 댄다. 아뿔싸! 다시 측정해야 한다. 이번에도 실패!


“환자분 말씀하지 마시고 가만히 계세요.”

“응. 알았어.”


노인 환자의 팔에 다시 혈압계를 감는다 ‘뿌까’ 공기를 부풀리며 귀는 쫑긋 세우고, 눈은 부릅뜬다. 소리를 통해 수은이 가리키는 위치의 숫자를 잡아내려 신경을 곤두세운다. 협조가 더딘 특수환자(아동, 노인 등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의 혈압을 제대로 재기까지 신규의 업무능력은 여전히 더디기만 하다.

혈압 측정하는 사이 체온계를 환자의 겨드랑이에 꽂아두는데 이 체온계란 녀석은 더 가관이다. 수은 체온계는 유리관 안에 수은이 들어 있는 것이다. 측정 전 수은이 35℃ 이하가 되게 힘껏 털어내어야 한다. 이후 7분 정도 겨드랑이에 끼워 제거하기 전까지 절대 움직이지 않도록 신신당부한다.


과거 수은체온계 /이미지 출처 네이버

다른 환자 활력징후(혈압, 맥박, 호흡, 체온)를 측정하고 다시 체온계를 제거하러 오면 아뿔싸! 체온계는 온데간데없고 두 팔은 세상 신나도록 휘젓고 난리 부르스다. 추임새까지 넣으며 이리저리 흔들어 젖힌다. 체온계는 이미 등짝에 가 있고, 환자복 소매에 매달려 있으며, 심하면 바지 아래까지 들어가 숨바꼭질 중이다.

바닥에 떨어진 채 깨져 있기도 하니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수은은 조금이라도 유출되면 바로 치워야 한다. 곧바로 환기를 시키고 책받침이나 딱딱한 종이로 쓸어 모아야 한다. 작은 방울까지 모아 비닐봉지에 넣어 밀봉한 후 폐기한다.


수은은 유독성 물질이다. 액체에서 기화될 경우, 쉽게 체내로 흡수된다. 특히 장기간 노출이 되면 신경계, 면역계, 간, 신장 등 여러 장기에 심각한 손상을 주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환경과 건강에 있어 '득'보다 '실'이 많았던 수은은 미나마타협약으로 인해 사용이 금지된다. 우리나라도 2020년 이후 수은이 들어있는 혈압계며 체온계는 전면 사용이 중지됐다.


등줄기에 땀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다. 융통성이라고는 찾기 힘든 신규 간호사는 발바닥까지 땀나도록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가까스로 모자란 시간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시간은 “나 잡아봐라.”라며 달려 나간다. 자동이 아닌 수동 혈압계와 체온계로 환자 상태를 측정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한 환자 당 검사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음 일은 밀리게 되고 그만큼 업무는 가중되어 겹겹이 쌓인다. 발바닥에 불이 난다.

정확한 측정을 요구하는 만큼 오류도 많았겠지만 그만큼 정성으로 인내한 말들이 있었다. 그 말들이 환자와 나 사이에 끈끈한 유대감을 준다. 지금처럼 자동화 시스템이 아니라 일일이 손으로 만지고 오감으로 느끼며 행하여간 사이사이마다 나누던 고마운 말들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만큼 오가는 말들이 그리운 까닭은 손으로 느끼고 몸으로 알아챈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어루만진 시간이 길어서이다. 지금의 자동 시스템은 측정 시간을 줄이고 간편하여 그만큼 업무 효율성이 높아졌다.

다른 간호에 집중할 시간을 벌어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차이만큼 행하는 간호의 크기와 질은 과연 달라졌을까? 더딘 시간만큼 눈으로 보고 듣고 행하며 나누던 이야기들은 그때가 더 풍성했고 전해진 손길은 그때가 더 진했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손길과 함께 나누던 말들은 더딘 시간 안에 고여 뿌듯함으로 자리 잡는다.

하나하나 마주했던 소중한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간호로 이어지며 그만큼의 성장을 이룬다.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느덧 수동과 자동 사이를 모두 섭렵한 사람이 되었다.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경험할 간호 역사가 내 안에 숨 쉬고 있다. 끝까지 지켜내며 이어간 지금의 나이를 만나게 되어 기쁘다.

나는 임상에 있고 환자를 위해 손길을 더하고 있으며 여전히 발로 뛴다. AI 인공지능 시대에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굉장한 의료의 발전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여전히 남아있을 한 가지는 환자 간호를 위해 정성을 다하는 우리가 있다는 것.


그 마음이 어떤 방식으로 그 시간을 달리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환자와의 소중한 인연이 말과 말로 닿아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며 서로에게 전해진다. 과거의 내가 오늘로 이어져 후세에까지 길이 빛나도록 간절히 바라는 마음, 간호로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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