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절을 담아
봄은 그야말로 누구에게나, 어디서든 새로움을 주기에 필요한 충분조건이다. 나무에 맺힌 꽃망울이 이토록 정겹고 어여쁜 이유는 기나긴 기다림 끝에 다다른 따스함이 서려 있어서다. 간신히 품어내던 겨울을 살며시 열고 봄은 문을 두드린다.
진땀을 흘려 버텨낸 수고만큼 거룩한 생명은 아주 작디작은 모습으로 여기저기에서 소식을 전한다. 생명의 계절을 따라 생동감과 기쁨을 누구에게나 선사하고 있다. 이런 기쁜 계절을 따라 아들과의 각별한 시간은 또 다른 선물처럼 돌아온다.
지역 의료기관 간호 part 수장들에게 나이팅게일선서식 초청장이 날아들었다. 나이팅게일선서식은 대학교 간호학과 학생들에게 의미 있는 행사 중 하나이다. 나이팅게일 선서(Nightingale Pledge)는 간호사로서 지녀야 할 윤리와 간호 원칙을 되새기고 모두의 앞에서 숭고한 정신을 담아 선언하는 약속이다.
나이팅게일 선서식은 보통 기본 간호와 핵심간호술기 등을 공부하고 나서 3학년 첫 임상 실습을 나가기 전에 시행하게 된다. 윤리적 간호의 의미를 되새기고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역할을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되는 자리이다.
지역 의료기관은 대부분 임상실습을 위해 협력하고 있기에 선서식에 초청되어 후배들의 앞날을 축하하고 응원하는 시간을 갖는다. 선서식에는 간호복을 갖춰 입은 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경건한 마음으로 진행하게 된다. 촛불은 주변을 비추는 봉사와 희생정신을, 흰색 가운은 이웃을 따스하게 돌보는 간호 정신을 나타낸다.
1997년 나이팅게일선서식을 통해 간호를 되새기던,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어느덧 26년 차 간호사로 거듭나기까지 우여곡절은 많았다. 그래서 다시금 옛 추억을 소환하게 하는 나이팅게일 선서식은 감회가 새롭다. 말로 다 나열할 수 없는 일들 안에서 나는 성장하고 배우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내가 성장하고 단단해지기까지의 양분이 되었다. 앞으로도 어려운 상황은 많겠지만 여전한 마음 꼭 지니며 나는 걸어간다. 임상에 있는 한 환자를 향해 크게 자리한 뿌듯함의 가치는 힘든 순간을 넘어서게 한 버팀목이다.
어디에 가치를 두었을 때 이로운 양향을 미치는지 잘 안다. 그렇기에 나는 긍정의 간호로 향하고 있다. 매일 배우고 다시금 다져간다. 그래서 오늘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나의 시간이다.
나의 간호로 이끈 지난 시절을 곱씹으며 꿋꿋해질 테다. 묵묵히 간호를 행한 선배의 뒤를 조용히 따르리라. 지금 첫발을 내디뎌 한창 걸어갈 앞날만큼 청춘의 힘이 가장 센 후배들을 위해 뚜벅뚜벅 걸어가리다.
내 있는 곳에서 부끄럽지 않게, 스스럼없이 행하는 간호로 이끄는 자체가 그 길이 아닐까. 가장 빛날 그들의 하루를 축하해 줄 수 있어 얼마나 설레고 기쁜지 모른다.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solemnly pledge myself before God and in the presence of this assembly to pass my life in purity and to practice my profession faithfully.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습니다.
I will abstain from whatever is deleterious and mischievous and will not take or knowingly administer any harmful drug.
나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겠으며, 간호하면서 알게 된 개인이나 가족의 사정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I will do all in my power to elevate standard of my profession, and will hold in confidence all personal matters committed to my keeping, and all family affairs coming to my knowledge in the practice of my calling.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
With loyalty will I endeavor to aid the physician in his work and devote myself to the welfare of those committed to my care.
- 나이팅게일 선서 내용, 병원간호사회
본 선서문은 히포크라테스 서약문을 일부 따른 것이며 나이팅게일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으로 바쳐진 것이다. 1893년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시 Harper 병원 Farrana 간호학교 졸업식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이 사용되어 왔으나 각 간호교육기관에서 사용하고 있는 서약문이 통일되지 않아 사용 중인 서약문을 수집 분석하여 서약문을 ‘선서’로 하고 대표자회의(1988.1.22.)에서 통일번역문안을 마련, 제55회 정기 대의원총회(1988.2.12.)에서 확정했다.
- 대한간호협회
앞쪽에 자리한 내빈석에 앉아 고요한 무대 위 광경을 음미한다. 학생 시절 나도 간호인으로 다짐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곧 있으면 저마다 촛불을 들고 자신의 간호를 행할 미래의 간호사들이 이 자리를 빛낼 것이다. 공부와 교내 실습, 과제를 병행하며 사투를 벌이던 20대 청춘이 새로운 도약을 맞는다.
마냥 웃고만 있어도 가장 예쁠 나이.
그 속에 가장 사랑하는 나의 아이가 함께 있다. 군대를 다녀온 후 올해 3학년으로 복학한 아들은 엄마의 뒤를 이어 간호사로 거듭나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 잘 차려입은 간호복이 아이의 얼굴을 화사하게 비춘다. 나의 자리와 아이가 있는 자리는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오로라 빛처럼 진하게 이어져 있다.
같은 간호로 이룰 일들은 머지않아 각자의 자리에서 또 다른 가치를 만들어낼 것이다. 엄마가 이룬 간호가 아들로 이어져 연결되는 순간 나이팅게일 선서는 더 큰 뭉클함과 감동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순서대로 호명되는 학생들이 양손에 촛불을 받치고 천천히 걸어간다.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어둠을 밝힐 이들의 발걸음이 나지막하게 들려온다.
앞으로의 일들에 무한한 영광이 지금처럼 함께 하길 바란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왜 행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허덕이더라도 언젠가 알아채는 간호의 의미가 가슴으로 묻어질 때까지 지금을 기억하면 참 좋겠다.
다음 주면 아들은 첫 임상 실습을 나가게 된다. 처음이라는 긴장과 설렘 안에 또 다른 환경을 마주하겠지만 잘 적응하리라 여겨진다. 욕심을 내자면 아들이 날마다 조금씩 행하는 것들로 채워가고, 스스로 터득하며 간호를 알아가길 바란다. 자유로운 의식 안에 존중과 사랑으로 넘쳐나 자신이 행하는 손길이 누군가에게 가장 큰 행복을 주는 것임을 알아가길 바란다. 누군가에게 주는 사랑이 곧 나에게 돌아오는 일임을 알아가면 좋겠다.
4월의 봄처럼 아이가 환하게 웃는다.
엄마인 나는 간호사!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아이의 미소에 필시 존경의 마음도 있으리라.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답하는 일들은 내가 주는 좋은 간호로 이어지는 것임을 안다.
아들에게 주려고 챙겨간 한 아름 꽃다발이 나풀거린다. 축하의 자리가 이토록 싱싱하다니 더 이상 쥐어 줄 말이 없다. 그저 말없이 안아준 엄마의 품이 그것을 대신한 답이길 바랄 뿐이다. 너의 세상이 환하게 훨훨 날아지기를.
버터플라이 라넌 큘러스
꽃말은 매력적인 사람,
설레는 마음
노랑 비단처럼 고운 꽃이 윤기를 더하며 활짝 잎을 벌린다. 꽃잎은 마치 나비의 춤사위처럼 나풀대며 향기를 심는다. 보이지 않아도 그윽한 향기는 계절을 따라 나온 모양새로 매력적인 빛깔을 품는다. 시선을 잡는 선명한 기억을 따라가니 촛불을 든 간호사의 숭고한 설렘이 비친다.
너는 매력적인 사람이야.
너는 세상에 주어진 일을 처음의 설렌 마음으로 기쁘게 맞이해갈 사람이야(긍정이든, 부정이든 안아가는 방법을 알아갈 것이야).
앞으로 어떤 일들을 마주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나의 최선을 따라 용기 있게 훨훨 날아가기를 소망한다. 용기는 두려워도 일단 해보는 한 걸음이 마주하는 일이다. 두려운 마음을 거머쥐고 함께 가는 자체가 용기다. 설령 멈추더라도 괜찮다. 그것이 맞다면 언젠가 과거의 나보다 나은 나를 향해 기어코 나아가는 한걸음, 아니 반걸음. 그 걸음을 위해 여전히 지금에 집중하며 봄이 봄처럼 차곡차곡 이어지기를 간호로 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