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태어나거나 어릴 때 장기간 해외에서 생활한 운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살면서 어떻게든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중고교 시절은 물론 대입, 취업, 심지어 승진 시험에서도 영어가 발목을 잡는 경우가 있다. '왜 우리 부모님은 이민도 안 가고 / 유학도 안 보내주고' 등의 원망이 나도 모르게 솟아오를 때도 생기기 마련이고. 그래서일까? 서구권 이민을 원하는 분들은 대부분 자녀교육 및 영어를 이유로 꼽는다.
하지만 이민을 통한 언어 습득은 생각보다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보고 듣는 케이스들은 대부분 잘 된 케이스들이기에 (...그러니까 한국까지 자랑이 들려오는 것이다) 미국만 가면 한국어와 영어 모두 능통한 이중언어 사용자 (bilingual)가 될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영어를 배우면서 한국어를 잊어버리거나 두 언어 모두 애매하게 배우는 경우가 훨씬 많다. 지금 사는 곳이 한인 인구가 많은 버지니아이다 보니 많은 한인 1.5세 및 2세를 보게 되는데,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에 미국으로 건너온 케이스가 그나마 두 언어를 모두 잘 구사할 확률이 높으며, 일찍 온 친구는 한국어가 많이 서툴고 늦게 온 경우 영어가 능통하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본다. 2000년대 초반 어린 자녀와 미국으로 건너온 회사 선배는 아래와 같은 충고를 건네기도 했다.
이중언어? 야, 한국어냐 영어냐는 네가 아니라 아이가 선택하는 거야.
자칫 잘못하면 애가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게 될 수도 있어
태민이는 자폐로 인한 언어 발달 지연으로 인해 또래보다 언어가 많이 늦다. 분명 두 언어 사용으로 인한 어려움도 한 몫을 하리라 짐작한다. 나도 한국 부모인지라 당연히 이민 초기엔 이중언어에 대한 욕심이 있었지만, 회사 선배의 충고와 언어 테라피스트들의 조언으로 인해 '어떤 언어든 의사소통만 잘하면 된다'라고 마음을 고쳐 먹게 되었다. 미국에 살려면 영어를 잘 구사해야 하니 우리 부부도 아이를 위해 집에서 영어를 많이 쓰려 노력하는데, 둘 다 영어가 완벽하지 못하니 그게 아이에게 미안할 뿐이다.
아들 태민이의 이중언어로 인한 에피소드는 이미 이전 글 ('Green Horse Car'에 관한 단상)에서 다룬 적이 있다. 며칠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저녁 준비를 하던 와이프가 아이에게 "태민아, 엄마가 저녁으로 불고기 구워줄게"라고 말을 건넸다. 그랬더니 아이는 대뜸
라고 답했다. 워낙 맥락 없이 자기만 아는 숫자나 단어를 자주 뱉는 터라 와이프는 "Fire Fish? 그게 뭐야?"라고 되물었고, 태민이는 친절하게 가르침을 주었다.
음. 그래. 역시 우리 아들이 엄마랑 아빠보다 영어를 잘하네! 라며 웃으며 넘어갔지만, 이것도 두 언어를 동시에 배우면서 겪는 어려움이라는 걸 알기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그나저나 불고기가 영어로도 Bulgogi인걸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