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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Kim Feb 12. 2021

나는야 민감의 왕자

자폐인의 민감함에 대하여

동네를 걷다가 갑자기 아이가 자기 눈 앞을 가리거나, 경주마처럼 손바닥을 눈 옆에 붙이고 멈춰 서는 경우가 있다. 이전에 이런 일이 없었다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겠지만 필자는 이럴 때 약 10~20초 정도 기다려 준다. 저 앞에 잘 보이지도 않는 신호등의 불빛이 붉은색에서 초록색으로 바뀌면 아이가 다시 명랑해져서 걸어갈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많은 자폐인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이슈 중 하나는 그들의 감각이 일반인 대비 너무 민감하다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느끼지도 못하는 일상의 수많은 자극들이 그들에게는 버티기 어려운 공격이나 마찬가지다. 심지어 자극이 언제, 어디서, 어느 정도의 강도로 올지 알 수 없기에 많은 자폐 아동들에게 세상은 두려운 곳이 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마음의 안정을 위해 자신 만의 루틴을 수행하든가 (i.e. 바퀴를 빙빙 돌리기, 펄쩍펄쩍 뛰기, 손가락을 눈앞에서 움직이기) 반사적으로 자극에 대응하는 것이다 (i.e. 종소리를 피해 교실을 뛰쳐나가기, 귀를 막고 소리 지르기). 



이 글에서는 필자의 아들 태민이가 가지고 있는 감각 (sensory) 문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촉각


태민이는 촉각에 굉장히 민감하다. 민감해서 좋았던 일을 굳이 꼽으라면 어릴 때 배변 훈련을 엄청나게 빨리 마스터했다는 것 정도? (자기 옷과 몸에 묻은 그것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귀 청소(한 명은 사지 결박 + 한 명은 작업), 치과 (무조건 수면 마취), 이발 (바리깡 공포증) 이외에도 아래와 같은 사례에서 아이의 유별난 민감함을 확인하실 수 있다. 


옷 레이블: 대부분의 옷 안에는 섬유의 종류, 세탁법, 사이즈 등을 설명하는 레이블이 있기 마련인데, 태민이는 이것이 피부에 닿는 것을 어렸을 적부터 극도로 싫어했다. 지금까지도 잠옷, 속옷, 스웨터 등 피부에 직접적으로 닿는 옷의 레이블을 다 잘라내야 한다. 가끔씩 새 옷을 샀을 때 이 작업을 빼먹었다면? 걱정할 필요 없다. 태민이가 직접 얘기해 주니까. "가위, 잘라"


벨크로 (속칭 찍찍이): 발을 신발에 꿰어 넣고 나서 벨크로의 거친 면에 손이 닿지 않도록 언제나 조심조심 마무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발 이외에는 벨크로가 있는 경우가 별로 없으니 다행이다. 


정전기: 겨울철에는 일상 속에서 쉽게 정전기로 인한 따끔함을 경험하게 되는데, 태민이는 이때마다  "Static! (정전기!)"이라고 외치며 손을 옷소매로 감싸고 조심조심 그 물건을 다시 건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자폐가 아니라도 어릴 때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아빠 볼에 뽀뽀하라고 할 때 1. 옷소매로 한번 건드리고 2. 혀로 살짝 건드려보고 3. 마침내 안심하고 입술을 가져다 대는 모습을 보면 우스우면서 안타까운 복잡한 마음이 든다.


이 외에도 가끔씩 별다른 이유 없이 미친 듯이 낄낄댈 때가 있는데, 아마 피부가 건조하다든가 입고 있는 옷이 보풀이 많다던가 해서 더 많은 촉각 자극을 받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다. 



2. 청각


이유 없이 귀를 막고 주저앉는 버릇이 있는 자폐인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귀가 너무 민감해서 남들이 못 듣는 작은 소리를 듣고 무서워했었던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읽자마자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는 필자도 태민이의 청각이 민감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탁기: 세척 단계에 따른 미묘한 소리 차이를 감지해내는데, 그래서 필자의 집에서는 한 번도 빨래의 탈수를 끝까지 돌려 본 적이 없다. 탈수가 시작되자마자 "세탁기 불 꺼!"를 외치는 태민이 덕분이다


전기밥솥: 밥이 다 되었을 때 나는 밥솥의 전자음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이에 밥이 다 되겠다 싶은 타이밍에는 언제나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뛰어들어가 귀를 막고 앉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자레인지: 요리 종료 신호인 높은 주파수의 삑삑거림을 무서워하여 레인지를 돌릴 때마다 귀를 막은 채로 "5 남기고 꺼줄게"를 반복한다 (숫자가 0:00이 되어서 종료 신호가 울리기 전에 0:05 쯤에서 레인지를 꺼 달라는 요청이다)


화장실 손 건조기이 기계를 화장실에서 발견하는 순간 태민이는 양쪽 귀를 막은 손을 절대로 떼지 않는다. 오줌이 아무리 마려워도 손을 내리지 않기에 결국 아이를 소변기 앞에 세우고 필자가 아이의 바지를 내리고 올리는 식으로 일을 마무리짓는 경우가 많다. 필자에게도 이 기계의 소음은 꽤나 시끄럽기에 아이의 반응이 이해가 가다가도, 어쩔 땐 이 모든 것이 한심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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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각


신호등: 글 서두에 말한 것처럼 빨간등을 마주 보는 것을 무서워한다. 그래서인지 신호등의 불빛이 초록색에서 노란색으로 바뀌는 순간 안 보이는 곳으로 뛰어가거나 눈을 가려서 빨간등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붉은 색 수박과 파프리카는 아주 잘 먹는거 봐서는 색 자체를 무서워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검은색: 어두운 색, 그중에서도 검은색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젤리, 아이스크림 등 단것을 좋아하는 태민이가 절대로 초콜릿을 먹지 않는 이유다. 옷이나 신발도 흰색 계열은 좋아하는 반면 검은색은 착용하려 하지 않는다. 그나마 김을 요새 조금 먹기 시작한 걸 봐서 조만간 초콜릿 아이스크림 정도는 시도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긴 하다.


자극 추구: 깜빡이는 불빛을 눈에 가져다 댄다던가 (i.e. 무선 마우스), 어두운 방이나 이불 안에서 폰이나 아이패드를 보거나, 의자에 앉아 몸을 뒤로 젖히는 등의 시각 자극 추구 행동을 보인다. 촉각과 청각은 민감해서 자극을 피하려 하는데 왜 시각은 특정 자극을 찾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하기 어렵다.






물 없이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속이 갑갑하신 분들도 있으실 것이고,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자극들이 있었나 새삼 놀라는 분들도 있으신 것이다. 슬프게도 이 것이 태민이의 현실이며, 많은 자폐 아동들의 현실이기도 하다. 공부나 운동처럼 가르치고 훈련해서 변하는 것이면 얼마나 좋겠냐만, 아쉽게도 이건 타고난 천성이니 극적으로 변하기를 기대하기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자폐인의 민감함이 부모가 아닌 사람에게 이상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이에 대해 가볍게 웃어주거나 못 본 척할 수도 있고,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거나 아이나 부모 뒤에서 못할 말을 할 수도 있다. 민감함은 선택이 아닌 반면 이에 대한 반응은 주변 사람들이 선택 가능하다.



자극에 둔감한 사람을 둔하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없듯, 자극에 민감한 사람에게도 조금만 너그러운 사회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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