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나는 아프리카를 꿈꾸게 되었을까?
탄자니아 선교사님이 보내온 사진 속 풍경은 세계 유명 휴양지에서 유명한 포토그래프가 찍은 사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앞으로 내가 1년 동안 살게 될 동네,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높은 산인 킬리만자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탄자니아 므왕구 킬레오 마을이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 감히 담을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고 카메라가 외면해 버린 풍경들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기대감으로 짐을 꾸린다.
시에라리온에서 1년을 살다 돌아온 뒤 1년 만에 다시 아프리카로 향한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22년을 겪은 내전의 상처로 고통받고 있는 나라, 시에라리온에서 살았던 1년이 다시 나를 아프리카로 향하게 했다.
마냥 좋고 행복한 기억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나는 말라리아와 장티푸스를 동시에 앓으면서 코 앞에 다가온 죽음 앞에 서봤기도 했고 마음을 주었던 아이들에게 도둑질도 당하기도 했고 거짓말인 줄 알지만 속아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마음을 다치기도 했다.
끔찍하게도 싫고 무서운 새들 때문에 공포에 떨기도 했었고 태어나 생전 처음 보는 벌레들과 이름도 알 수 없는 오만가지 물것들에게 쏘여 피부가 남아나지 않았다.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선크림조차 바를 수 없는 더위에 얼굴 가득 번진 기미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던 날들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그곳에서의 1년은 내 생애 가장 가치 있는 시간들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에서 가난하지만 순수하고 해맑은 아이들과 살면서 그동안 내가 추구했던 행복, 명예, 사랑, 부요 등등의 가치들이 얼마나 빈곤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평생 구호로 외치고 다짐만 하고 책상머리에서 이론으로만 남을 수밖에 없었던 내 생의 가치들은 빈곤한 나라의 아이들과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동안 실체가 되었다.
시에라리온에서 나는 샤론 티처였다.
내가 가는 곳 어디서나 아이들은 “샤론티처”를 부르며 나에게 달려와 안겼고, 나를 환영해 주었다. 어디서도 받아보지 못한 마음이었다.
그 아이들과 함께 나는 오랫동안 꿈꾸었던 아프리카에서의 뮤지컬 공연의 꿈을 이루기도 했고, 입으로만 떠들었던 명사였던 사랑의 나의 것이 아이들의 것이 될 때 움직이는 동사가 되었다.
딸을 키우면서도 은근 바람을 갖고 있었던 나의 인색했던 사랑은 그곳에서 나는 무장해제 된 군인처럼 경계를 벗어버렸다.
아프리카에서 만난 아이들은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기게 해주었으며 인간이라는 존재는 누군가를 도와줄 때 누군가의 도움이 될 때 가장 행복해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렇기에 나는 다시 가고 싶었다. 그곳에. 아니, 가.야.했.다.
좀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나의 가치가 더 이상 빈곤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에서 삶은 녹록지 않았다.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의 일원으로 다시 돌아온 나는 한국에서의 삶을 꾸리기 위해 그리고 다시 한번 아프리카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고 사회인으로서의 역할도 감당해야 했다.
행여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다시 아프리카의 꿈을 놓쳐버릴까 봐 샤론티처라고 불러주었던 아이들을 늘 생각했다.
‘조금만 기다려. 너희들에게 가기 위해서 열심히 돈을 벌고 있는 중이야.’
그런데 일 년이 지났을 때즈음 조금씩 아이들의 목소리가 가물해져 갔고, 여러 가지 피치 못할 사정들이 생기면서 시에라리온에는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선명해져 가는 사실 ‘인생 계획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라는 인생의 진리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다시 아프리카’를 향한 소망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마치 내 남은 인생의 사명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전 인사 한번 하고 스쳐 지나간 선교사님 내외분이 탄자니아 시골마을에서 힘들게 사역하면서 발렌티오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8년 만에 페이스북을 통해 연락이 닿게 된 선교사님은 ‘작가님이 이곳에 와주셔서 아이들의 선생님이 되어주신다면 우리의 기도는 응답받는 것이겠죠?’라는 DM과 아이들의 사진을 보내왔다.
탄자니아라고? 의아했다.
나의 ‘다시 한번 아프리카’의 아프리카에 탄자니아는 없었다.
시에라리온, 나를 샤론티처라고 불러준 아이들 곁이었는데, 선교사님이 보내준 사진 속 아이들은 시에라리온의 아이들과 너무 닮아있었다.
‘우리도 여기 있어요. 이곳에 와서 우리들의 선생님이 되어주세요.’
라고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계획에 없던 나라였기에 탄자니아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비로소 탄자니아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조용필 오빠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그 킬리만자로가 다큐에서만 보던 세렝게티가 탄자니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앞으로 살게 될 '킬레오' 마을은 킬리만자로가 한눈에 보이는 시골마을이었다.
킬레오 마을은 내가 살았던 시에라리온 마을보다 더 열악한 시골마을인 듯했다.
물 사정이 좋지 않아서 빗물을 받아 식수를 사용해야 하며 전기는 들어오지만 한 달의 반은 정전이 되는 마을이었다.
도로가 하나도 깔리지 않아 자동차가 다니기에 곤란하고 가끔씩 코끼리가 출몰하기도 하며 원숭이들은 지천에 볼 수 있다는 말에 찔끔 겁이 나기도 했다.
사진 속의 아이들은 나를 부르고 있었지만 기다려~ 말할 수가 없었다.
시에라리온은 나라는 가난했지만 내가 살았던 마을은 전기와 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작은 도시였다.
구멍가게지만 생필품을 구할 수 있는 가게와 시장도 가까이 있었고 야생동물이 나타나면 어쩌지 라는 바보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찔끔의 겁은 소망에 의심을 낳았다. 굳이. 그런 시골마을에?
참 많이도 들었던 질문을 나에게 다시 한다
사람들이 '왜 굳이 많고 많은 나라들 중에 탄자니아 시골마을이냐?'라고 사람들이 물었을 때 나는 '나의 마음이 시켜서'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나에게 던진 같은 질문에는 쉽사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물 우리와 같은 마을 조산소에서 아이를 낳은 산모와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풍경 사진은 담아낼 수 없는 비극이었다.
생명이 되지 못한 아이와 생명을 탄생시키지 못한 엄마의 소식은 슬픔이 되어 나의 찔끔거리는 두려움을 덮어버렸다.
그리고 그 슬픔은 탄자니아행 편도 티켓을 끊게 했다.
그 슬픔은 어쩌면 한 아이를 지킬 수는 있지 않을까?
그 아이의 엄마가 엄마가 될 수 있도록 도움은 되지 않을까?라는 소망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탄자니아는 다시 한번 아프리카의 한 나라가 되었다.
왜 굳이?라는 질문에 대답은 살아가면서 찾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