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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스한 골방 Jan 23. 2024

마음은 마음처럼 안되는 것이 당연해요

프로이트의 구조적 모델

  우리는 '마음처럼 잘 안된다'라는 표현을 흔히 쓰곤 합니다. 반대로 '마음처럼 잘 된다'라는 표현은 쓰이지 않거나 거의 쓰이지 않죠. 마음이 마음처럼 안 움직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저번 장에서 설명드렸던 의식, 전의식, 무의식의 개념으로는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지형학적 모델이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입니다.


  프로이트 이전에는, 마음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주관적인 마음을 객관적인 과학으로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차라리 사람의 뇌는 해부학을 통해서 구조를 눈을 확인할 수 있지만, 마음의 구조는 눈으로 확인하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그래서인지 프로이트가 첫 번째로 제시했던 지형학적 모델은 마음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정신의학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지만, 마음의 역할을 설명할 때 부족한 점을 보였습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마음의 방어기제 중에서는 억압이 있습니다. 방어기제란 마음을 지키는 방법이고, 억압은 무의식적으로 생각이나 감정을 무의식 속으로 억눌러 두는 것을 의미해요. 예를 들어 나의 감정을 방어하기 위해서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분노를 참고 있는 것은 억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 조금 이상합니다. 무의식적인 분노를 무의식이 정말 막을 수 있을까요? 이 상황을 표현하면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무의식적인 분노를 무의식의 층 안에서 억압하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요? (출처 : Pixabay)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작용하는 힘이 있어야만 무의식에 존재하는 것들이 수면 위로 튀어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억압은 무의식보다 위층에서 시작해서 아래층으로 누르는 힘이여야만 해요. 위의 그림에서 화살표가 어디서 시작해야만 하는지를 보시면 이해가 나으실 거에요. 따라서 억압의 힘이 시작되는 곳은 무의식보다 위층에 존재한, 전의식 혹은 의식이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억압은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감정을 억누르는 작용이기 때문에, 억압은 무의식 안에서만 활동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억압은 무의식보다 위층에서 시작하지만, 실제로는 무의식 안에서만 움직이는 힘인가요? 당장 위의 그림에서도 억압에 해당하는 화살표는 전의식에서 출발하는데 말이에요. 상당히 모순되는 이야기죠. 그래서 억압과 같은 방어기제들은 지형학적 모델로는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지형학적 모델이 방어기제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프로이트에게 정말 큰 문제였습니다. 애초에 정신분석은 불행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방어하기 위해서 시작했기 때문에, 억압과 같은 방어기제는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핵심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방어기제를 설명하지 못하는 마음 구조는 좀 심하게 말하자면 가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상당히 좌절스러울 수 있는 상황이지만 프로이트는 포기하지 않고 마음의 지도를 계속 그려나가면서 본인의 이론을 수정합니다. 결국 그는 마음의 역할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 즉 구조적 모델을 제시합니다.




  구조적 모델(structural model)에서는 마음을 이드(id), 초자아(superego), 자아(ego)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구조적 모델에서는 방어기제와 같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활동들이 보다 역동적으로 잘 설명될 수 있어요. 여기에서는 이드, 초자아, 자아의 순으로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이드는 인간의 태생적인 본능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프로이트는 이드를 성적 충동과 공격적 충동이 쉬지 않고 들끓고 있는 뜨거운 가마솥에 비유했습니다. 들끓는 가마솥 안에는 많은 에너지들이 있듯이, 이드 안에도 본능적인 충동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에너지가 있겠죠. 이드 안의 에너지가 인간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 즉 동기(motivation)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좀 난감한 설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프로이트가 사람이 성욕과 공격성의 노예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거든요. 하지만 현실의 우리들은 짐승처럼 본능적인 충동들을 무분별하게 해소하지 않습니다. 이 점을 프로이트도 마음의 나머지 구조들을 통해서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바로 초자아와 자아의 존재를 통해서요.


  초자아인간의 양심과 이상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양심은 인간에게 도덕적으로 행동하도록 명령하고, 이상은 인간에게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명령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본능적인 충동과, 양심과 이상은 서로 반대되는 부분이 많죠. 그래서 초자아와 이드는 태생부터가 앙숙이고, 이 둘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종일 투닥거리고 있습니다.


  이드는 사람이 태어났을 때부터 시작되는 본능이지만, 초자아는 부모의 이상, 요구, 위협으로부터 학습한 결과물입니다. 여러분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떼쓰는 것을 본 적이 있으실 거에요.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예로부터 존재하듯이, 아이가 가게에서 장난감을 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본능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지는 않죠. 부모는 본인의 이상(가치관)에 따라서 상황을 판단하고, 아이에게 장난감을 제자리에 두고올 것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다음에는 장난감 가게에 안 올 거야'라며 위협을 가하기도 하죠. 이처럼 부모는 양육 과정에서 자신의 이상들을 아이에게 전달하고, 아이도 이번에 있었던 부모와의 일을 마음속에 담아 학습해둡니다. 그렇게 부모의 가치관은 아이의 마음 한켠에 자리잡아 초자아가 되고, 아이는 이드에 오는 충동에 이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초자아가 건강하게 발달하지 못하면 본능적인 충동들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병적인 초자아는 크게 두 가지의 경우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경우는 취약한 초자아입니다. 이 경우에는 초자아가 제 기능을 못해서 이드가 초자아를 늘상 압도해요. 이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본능적인 충동들을 거의 억제하지 않고 이드에만 충실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범죄와 같은 반사회적인 행동들을 서슴지 않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아요. 두 번째 경우는 지나치게 엄격한 초자아입니다. 강력한 초자아가 이드를 압도해서, 양심과 이상의 기준이 매우 높습니다. 이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가혹하고, 자존감이 낮고, 행복도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울하고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에요.


  자아는 보편적일수록, 온화할수록, 현실적일수록 건강합니다. 이를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도덕과 이상에 대한 기준이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것들이고, 본인의 기준에 못 미치는 자신의 모습을 너무 미워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하고, 지나치게 이상적이지 않고 현실적인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 되겠죠. 이런 특징을 가진 건강한 초자아는 이드와 공생해 나가며 성숙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드릴 자아는 우리가 현실의 삶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의 집행자 역할을 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초자아의 모습들을 보면서 이드와 초자아가 공생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셨을거에요. 하지만 태생부터 앙숙인 이드와 초자아는 더불어 사이좋게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갈등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자아가 있기에 우리는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정리할 수 있어요.


  자아는 어떻게 갈등을 처리할까요? 나머지 마음 구조와는 달리, 자아에게는 현실을 인식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중요한 시험을 하루 앞두고 있을 때를 상상해볼게요. 이드는 휴식하면서 쾌락을 즐기자고 말하고, 초자아는 이상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자고 말합니다. 이때 건강한 자아는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요? 시험이 하루 남은 현실을 고려해서 초자아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겠죠. 이처럼 자아는 이드와 초자아의 주장을 하나씩 들어보고 현실원칙에 따라서 더 합리적인 주장을 채택합니다. 그래서 자아는 마음의 집행자라고 불리고, 프로이트도 자아가 하는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챕터에서 설명 중인 정신분석이론을 두고 자아 심리학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드가 쾌락을 말하고 초자아가 이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날이면 모르겠지만, 이 날은 시험 하루 전이였기에 자아는 초자아의 편을 들어줍니다. (출처 : Pixabay)




  이전에 방어기제가 마음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설명드렸죠. 사실 이 문장에서는 누구로부터 마음을 지키고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방어기제는 이드와 초자아의 갈등으로부터 마음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마음 속에서 갈등이 심해지면 전쟁이 시작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질 수 밖에 없겠죠. 그래서 방어기제가 늘 작동하며 우리의 마음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이전에 자아가 이드와 초자아의 갈등을 정리한다고도 말씀드렸죠.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자아가 하는 일은 이드와 초자아의 갈등을 정리하는 것이고, 방어기제는 자아가 일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같은 일을 반복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습관이 생깁니다. 좋은 습관이 형성되어 있는 사람은 일을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죠. 하지만 나쁜 습관이 형성되어 있는 사람은 습관으로 인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이제까지 해온 습관을 바꾸기가 어려워서 문제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허구한 날에 이드와 초자아가 싸우고 있으니 자아도 나름대로 일을 효율적으로 해보겠다고 만들어온 습관이 있겠죠. 그래서 각각의 자아는 습관처럼 사용하는 방어기제들이 있고, 자주 사용했던 방어기제를 계속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 방어기제가 설령 나쁜 방어기제라고 하더라도 말이에요.


  이제는 마음이 왜 마음처럼 안 움직여지는지 설명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드와 초자아는 세상물정을 모르고 본인들이 맞다고 주장하는 친구들입니다. 고집스러운 이들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내리는 명령들을 잘 듣지 않아요. 그나마 현실을 고려할 줄 아는 자아가 우리의 의식과 소통할 수 있지만, 사실 자아도 머리가 굵어져서 해오던 습관대로만 일하려고 합니다. 결국 다음의 말로 마무리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드와 초자아의 갈등으로
우리 마음은 조용할 날이 없어요.
그나마 우리와 가까운 자아조차도,
마음대로만 움직여주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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