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고 나면 허무해진다.
나 자신이 무척 단순해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실존하는 사람과 동물이 꿈속에 나타나고, 나는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욕망과 불안을 투사한다. 꿈은 언제나 불안을 바탕으로 한다.
나는 늘 생각한다. 꿈은 초자연적인 계시가 아니라, 깨어 있는 동안의 정신 활동이 뒤틀려 드러난 형상물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신적인 것이 아니라 마성적”이라 말하며, 꿈 또한 신이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 법칙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과거의 욕망, 현재의 불안, 미래의 두려움이 모여 꿈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내가 자주 꾸는 꿈 중 하나는 회사의 꿈이다.
이직하기 전의 사무실로 돌아가 혼자 책상에 앉아 블랙커피를 마신다. 실험실로 들어가 어지럽게 널린 쇳덩이와 현미경을 정리하고, 전날 끝내지 못한 실험을 다시 이어간다. 성분을 조작하고 데이터를 모아 성취의 순간에 이르려는 찰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이직한 후의 동료들이 들어와 장비를 부수어 버린다. 나는 그 순간 깨버린다. 6년이 지났어도 그 꿈은 반복된다. 꿈에서도 내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음으로는 아내가 사라지는 꿈을 꾼다.
나는 텅 빈 공연장 객석에 홀로 앉아 있다. 공연이 끝나고, 그녀를 기다린다. 곧 올 것 같아 입구의 불빛만 바라본다. 그러나 결국 문은 닫히고, 나는 어둠 속에 남는다. 그렇게 아내는 끝내 오지 않는다.
깨어나면 휴대폰을 확인한다. 꿈속에서 사라진 그녀가 현실에서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만으로 안도한다.
또 어떤 날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꿈을 꾼다.
검은 파도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카페. 모자를 눌러쓴 직원이 다가와 커피를 내려놓는다. 가까이 다가가니 돌아가신 할아버지다. 나는 말을 건네기도 전에 그는 사라지고, 다리를 건너 빛나는 꽃밭과 회색 비석들이 나타난다. 그것이 나의 과거와 미래 같았다. 유난히 빛나는 비석 하나가 꺼지며, 할아버지가 다시 나타나 내 손을 잡아준다. 꿈에서 깬 나는, 불안 대신 이상한 든든함을 얻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깊이 남는 것은 옹이에 관한 꿈이다.
옹이는 1년 전 뇌종양으로 죽었다. 옹이가 죽기 전, 나는 거짓말로 두 달간의 병가를 얻었다. 그 시간을 온전히 간호에 쏟았다. 밥을 먹이고 약을 먹이고, 작은 몸을 품에 안아 재웠다. 사람에게조차 주지 못했던 순수한 사랑을 옹이에게 주었다.
그러나 사랑만으로는 녀석을 지킬 수 없었다. 두 달간의 투병 끝에 옹이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의사는 안락사를 권했다.
“사람의 욕심 때문에 동물을 고통 속에 오래 두지는 마세요.”
바늘이 들어가는 순간, 나는 끝내 손을 거두지 못했다. 옹이의 숨결이 내 손등에 스치다 끊어지는 순간, 온 세상이 멈췄다. 잠든 얼굴은 편안했으나, 내 가슴은 그 잔잔함을 감당할 수 없었다. 화장터로 향하던 날, 옹이의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만큼 가벼웠다. 그러나 부드러운 털의 감촉은 오래도록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옹이가 떠난 뒤, 나는 보리와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동반자는 또 다른 불안의 시작이었다. 옹이를 떠나보낸 기억이 깊을수록, 보리가 아프거나 죽을까 두려웠다. 작은 기침에도 가슴이 내려앉았고, 사료를 덜 먹는 날이면 밤새 뒤척였다.
사람이 죽으면 저승길에서 자신이 키웠던 동물들이 마중 나온다고 한다. 그 길에서 동물들은 말을 할 수 있어, 외로운 길을 함께 걸어주는 동반자가 되어 준다고 한다. 나는 그 이야기를 믿고 싶다. 언젠가 옹이를 다시 만나면, 미안했다는 말, 사랑했다는 말, 지금도 여전히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러나 꿈속의 옹이는 잔혹하다.
비포장 길을 걷다 발밑에 이상한 감촉을 느낀다. 내려다보면 죽은 옹이가 놓여 있다. 하얀 털과 푹신한 살의 감촉이 발바닥으로 스며든다. 나는 소리를 지른다. 주변에는 수많은 고양이 사체가 흩어져 있고, 그 위에 겁에 질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보리가 있다. 그렇게 꿈에서 깬다.
그런 날이면 나는 보리를 안고 병원으로 간다. 꿈속의 눈빛을 외면하지 못해서다. 알 수 없는 미래를 조금이라도 확신으로 바꾸려는 몸부림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꿈의 왜곡이라 했다. 옹이의 죽음이 보리의 죽음으로 바뀌어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 꿈은 죄책감과 불안의 그림자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아니, 믿으려 한다.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니까. 고양이별에는 고통도, 이별도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 옹이는 다시 내 품에 안겨 울지도, 아프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꿈을 기다린다.
회사에서 부서진 실험실, 텅 빈 공연장의 객석, 검은 파도의 카페… 그리고 그 너머에서 다시 옹이를 만날 수 있기를. 단 한 번이라도 다시 안을 수 있기를.
우주선을 타고 고양이별로 가고 싶다.
그곳에서 옹이와 다시 만나, 끝내 다 하지 못한 말을 전하고 싶다.
꿈속에서조차 다시 만나고 싶은 존재가 있다는 것, 그 불안과 그리움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글을 쓰는 이유라는 것을. 옹이의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비로소 내 마음을 정직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글쓰기는 나에게 하나의 무대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불안과 상실도, 문장으로 옮기면 다른 이에게 닿아 작은 위로나 공감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내 안의 고통은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는 다시 나를 지탱한다.
나는 여전히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그 불안조차도 한 편의 이야기로 바꿀 수 있다. 언젠가 고양이별에서 옹이를 만나는 것처럼.
“잘 자라, 옹이야. 사랑한다. 언제까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