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그 일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정신없이 화장실에 들어가 서둘러 볼일을 보고 나오던 순간, 문득 깨달았다. 그곳이 여자 화장실이었다는 사실을. 그때의 부끄러움은, 마치 사람들이 다 보고 있다는 착각 때문에 심장이 뚝 떨어지는 듯한 기분과 같았다. 잘못 들어간 발걸음을 숨기고 싶어, 오히려 더 요란하게 굴러가는 심장소리를 감추지 못했던 순간이었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그런 해괴한 경험을 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꿈이었는지 실제였는지조차 희미해지는, 그러나 속 깊은 곳에 곰팡이처럼 눌러붙어 잊히지 않는 경험. 사람들은 그 기억의 파편을 조금씩 각색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마치 허풍처럼 흥미롭게 풀어낸다. 그러나 나는 그 얘기를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다. 기억의 덮개를 열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열어젖히는 순간 안에서 시커먼 곰팡이가 피어오를 것만 같았으니까. 그러니 내가 침묵한 건 부끄러움 때문일까? 아니다.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불신의 그림자가 내 입을 굳게 닫아버렸다.
그 시절, 나는 제대 후 복학을 앞두고 있었다. 아직 세상의 일들에 호기심을 느끼던 때였고, 우연히 눈길이 닿은 직업이 있었다. ‘성우.’ 외화 더빙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멋져 보였고, 광고 속 매력적인 음성이 귀를 잡아끌었다. 그래서 방송국 근처를 맴돌다가 결국 지역 방송국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하게 되었다. 일은 단순했다. 화면 속 리포터의 움직임을 보며 대본을 읽는 것. 여자가 웃으면 “리포터가 웃는다”라고 말해야 했고, 그녀가 다가오면 “카메라 쪽으로 다가온다”라고 읽어야 했다. 정해진 문장을 읊조릴 뿐인데, 이상하게도 묘한 감각이 스며들었다. 마치 내가 말하는 대로 그녀가 움직이는 듯한, 착각에 가까운 권능감이 스쳐갔다.
그러다 운명이 장난을 치듯, 모니터 속에서만 보던 그녀를 실제로 마주쳤다. 키는 보통이었지만, 동그란 얼굴에 뽀얀 피부가 도드라졌고, 늘 갑갑한 듯 손가락으로 길고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툭툭 넘기는 버릇이 있었다. 목소리는 밝았지만 입술의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훈련된 듯, 마치 소리를 아껴 쓰는 사람처럼. 그러나 나는 대화 속에서 금세 알아차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방송 중일 땐 탄산수 같은 발랄함이었고, 동료와 대화할 땐 또렷하고 단정했다. 그런데 내 앞에선 한층 낮고 차분했다. 그 음성의 저변에는 어둠 같은 기운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 자신의 행동을 소리로 읽어내는 남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운명 같다”고 말할 때, 그녀의 웃음은 찬란히 빛났고, 그 빛 앞에서 나는 무력해졌다.
“책 읽는 모임이 있는데 나올래요?”
그녀가 불쑥 물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자 그녀는 내 머뭇거림을 짓눌러버리듯 말끝을 이어갔다.
“이번 주 일요일, 오후 두 시. 대학로 4번 출구 코끼리분식. 2층으로 올라오세요. 꼭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녀와 함께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 방통대 앞까지 걸어 올라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연극을 보는 꿈. 막이 오르자 배우들이 입을 열려는 순간, 기묘하게도 모두 동시에 대사를 잊었다. 무대 위가 얼어붙었고, 배우 중 한 명이 객석을 향해, 아니 내게 사과했다. 막은 순식간에 내려앉았고 나는 깨어났다.
몽유병처럼 몸을 일으켜 노트북을 켰다. 화면 속 검색창에 ‘대학로 책 읽기 모임’을 쳤다. 수많은 모임 사이에 눈에 띄는 한 줄이 있었다. “인증받은 분만 들어올 수 있습니다.” 모임 이름은 load to book. 초기 화면엔 달 속에서 토끼가 책을 읽는 그림이 있었고, 그 아래 문구는 짧았다. “읽는 자에게만 길이 열린다.”
일요일, 혜화역 4번 출구.
YMCA 건물 붉은 벽돌이 정면에 서 있었고, 그 건너편에 ‘코끼리분식’ 간판이 보였다. 입구 옆으로 올라가는 좁은 나무계단은 삐걱이며 울렸다. 계단을 오르자 반쯤 열린 공간이 나타났다. 낮은 천장, 꺼질 듯한 백열등 하나, 구석엔 구색만 맞춘 서랍장과 접힌 이불. 그곳에 일곱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창고 같은 공간이었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상하게 반짝였다.
그녀가 환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셨어요. 소개할게요. 성우 아르바이트 하시는 조 규호 씨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였다. 푸른빛이 스미는 듯한 리더의 눈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는 미소인지 조롱인지 모를 입술을 굳히며 제안했다.
“환영식 겸, 신입 회원분이 낭독을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책이 내 손에 쥐어졌다. 표지엔 달 속 토끼가 그려져 있었고, 제목은 load to book. 첫 장에는 알 수 없는 글귀가 빼곡했다. 나는 더듬거리며 읽었다.
하늘의 기운이 내려온다.
너와 나의 연결.
너는 나고, 나는 너다.
팔에 닭살이 돋았다. 리더는 실망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형제님, 천천히.”
나는 결국 책을 덮고 고개를 저었다.
“못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리더는 뜻 모를 미소를 띠고 다시 연설을 이어갔다. 바다, 폭풍, 괴수, 나침반 없는 항해. 그의 말은 주문 같았다. 사람들은 동시에 대답했다.
“신령님.”
그 단어가 귓가에서 오래 맴돌았다. 무엇을 믿는 집단일까. 종교도, 상담 모임도 아니라면서.
모임이 끝날 무렵, 그녀와 나는 한 조가 되었다. 거리의 인파 속, 그녀는 내 귀에 속삭였다.
“저도 대답했어요. 신령님이 제 귀에만 속삭여주셨어요. 규호 씨와 같이 할 수 있어서 오늘 너무 행복해요.”
그리고는 갑자기 군중을 향해, 환하게 외쳤다.
“눈이 참 맑으세요!”
나는 어젯밤 꿈처럼 말문이 막혔다. 무대 위 배우들이 대사를 잃어버린 것처럼.
여기까지가 내가 차마 꺼내지 못한 이야기다. 누군가에게 전한다면, 아마 믿지 못하리라. 그러나 내 얼굴이 지금도 달아오르는 것을 보면, 그것이 꿈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