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이었다. 늘 지나치던 길목에 작은 카페가 있었다. 그 자리는 수없이 오가며 스쳐 지났던 곳인데, 그날은 이상하게 눈에 확 들어왔다. 피로와 무력감이 뒤섞인 저녁, 갑자기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끌림이 차를 세우게 했다. 차에서 내리자 차가운 공기 사이로 커피 향이 코끝에 닿았다. 향은 따뜻했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마음을 순간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향을 따라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를 가르며 기계음이 요란하게 공간을 채웠다. 카페 주인으로 보이는 키 작은 남자가 커피머신을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다. 뜨거운 물줄기가 분사되는 소리, 콧김처럼 피어나는 증기, 빠르게 돌아가는 기계음이 한데 어우러져 작은 공간을 압도하고 있었다. 나는 문턱에서 멈춘 채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남자는 소음에 묻혀 내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한쪽 벽면이 눈에 들어왔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나무 조각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는데, 그 위에는 동물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소, 말, 강아지, 고양이, 여우, 호랑이, 토끼까지… 익숙한 동물들이 하나같이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얼굴은 이상하게도 어색하지 않았다. 마치 본래부터 웃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나는 그 그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동물 그림이 모두 웃고 있네요?”
나는 커피머신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기계와 씨름하느라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기계와 손발을 맞추듯 능숙하게 움직였다. 커피 가루를 고르게 다지고, 레버를 내리고, 스팀 피처를 흔드는 모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도 저렇게 무언가에 몰두하고 싶었다. 머릿속은 늘 무겁고, 가슴은 늘 쓸쓸했다. 번아웃처럼 아무것에도 집중하지 못한 채 그저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의사는 말했다.
“다들 그렇게 살아요.”
하지만 나는 의심했다. 정말 다들 이렇게 무너져 있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에 기대며 하루를 버텼다. 다들 그렇다는데, 나는 왜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없었다.
커피머신의 요란한 소리가 잦아들고, 드디어 남자가 내 쪽을 돌아봤다. 놀란 듯 눈이 동그래지더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나는 다시 동물 그림에 대해 물었다.
“동물이 늘 저렇게 웃나요? 제가 몰랐던 건가요? 참 신기하네요.”
남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동물은 원래 항상 웃고 있잖아요.”
순간 낯선 감각이 스쳤다. 동물이 웃는다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물의 얼굴은 대부분 무표정했다. 때론 화가 나 있거나, 지쳐 있는 얼굴이었다. 웃는 얼굴은 본 기억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동물이 늘 그렇게 웃고 있었다면… 왜 저는 몰랐을까요?”
남자는 말했다.
“혹시 동물을 키우세요? 집에 있는 아이의 얼굴을 떠올려 보세요. 그럼 금세 생각나실 거예요.”
나는 집에서 함께 사는 고양이, 보리를 떠올렸다. 보리가 나를 바라보던 순간들. 나는 보리를 볼 때마다 웃는다. 아마 내가 유일하게 웃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보리의 얼굴은? 나는 보리가 웃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림 속 동물들의 얼굴을 바라보자, 문득 깨달음이 밀려왔다. 보리의 표정도 저렇게 나를 향해 웃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웃을 때, 보리도 웃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평소 같으면 커피를 들고 곧장 카페를 나왔을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 자리를 잡고 앉고 싶었다. 그림이 걸린 벽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정면에서 마주하니 동물들의 웃음은 더 또렷했다. 그들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따뜻했고, 내가 한 모금 커피를 들이킬 때마다 마음속 어두운 무언가가 조금씩 녹아내렸다.
나는 다시 남자에게 물었다.
“왜 웃는 동물을 그리신 거예요?”
남자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결심한 듯 이야기를 꺼냈다.
“동물의 얼굴은 제 감정을 비추는 표상 같은 겁니다. 가장 사랑하면서도 귀찮고, 끝까지 책임져야 하지만 무책임하게 버려질 수도 있는 존재. 믿을 수 있는 친구이자 언제든 떠나버릴 수도 있는 존재. 제 감정은 이렇게 복잡한데, 동물의 얼굴은 언제나 똑같더라고요. 늘 웃고 있더군요.”
그는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은 대부분 무표정한 얼굴로 카페에 들어옵니다. 피곤하거나 짜증이 묻어 있죠. 저는 그들에게만큼은 웃고 싶었습니다. 누군가 당신을 보고 웃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웃는 동물들을 그리게 된 겁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내 얼굴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가끔 내게 왜 웃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말이 들리면 오히려 화가 났다. 억지로 웃는 건 바닥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카페 벽에 걸린 동물들은 달랐다. 상대가 어떤 표정을 짓든 상관없이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오히려 나를 무너뜨렸다. 나는 깨달았다. 웃음은 상대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먼저 웃어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상대도 나를 보고 웃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내가 먼저 웃으면, 그들도 웃겠지.”
커피 잔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커피는 보이지 않았다. 향만이 남아 은은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주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향은 곧장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커피 향이 아니라,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뜻한 감각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향은 무뎌지고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사라지기까지 얼마나 오래 남을지는 알 수 없다. 기억 속에 영원히 머무를 수도 있고, 문득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 아마 삶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잔을 비우고 카페를 나섰다. 차를 몰고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아내와 보리가 서 있었다. 둘 다 웃고 있었다.
순간, 진한 커피 향이 다시 내 안에서 출렁였다. 나는 알았다. 그 향은 단순한 냄새가 아니라, 웃음을 깨우는 기억이자 약속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