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산에 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산에 들어서면 종종 여자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입구에서부터, 주변엔 아무도 없는데 낯선 웃음소리와 얇은 대화가 안개처럼 흘러다닌다. 그 소리는 가볍게 웃으며 수군대는 듯하다가, 때로는 나를 비웃는 것처럼 변하기도 했다. 뒤돌아보아도 숲은 텅 비어 있고, 그저 바람과 빗방울만 가지를 흔들 뿐이다. 산은 나를 불러들이면서도 동시에 밀어내는 것 같았다.
철학관의 노인은 내 사주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구렁텅이에 빠져 있군. 이제 다 왔어. 앞으로 2년, 생일이 지나면 벗어날 수 있을 게다. 그동안 산에 다녀. 마음이 위로를 받을 게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등산 장비를 사들였고, 감악산을 검색했다.
새벽 여섯 시, 산 입구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빗줄기가 거세게 쏟아졌고 흙길은 금세 질척거렸다. 신발이 발을 잡아끌 듯 무거워졌고, 오르막마다 허벅지가 타는 듯했다. 목구멍을 긁고 올라오는 쇳맛이 입안을 채웠다. 숨이 차오를 때마다 귓가에서는 희미하게, 낯익은 듯 낯선 여자들의 웃음이 흘렀다.
출렁다리 앞에 섰을 때, 계곡 아래 검푸른 물이 아득히 출렁거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다리는 살아 있는 것처럼 요동쳤다. 손잡이를 붙잡은 손바닥은 이미 젖어 미끄러웠다.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다리는 의도적으로 나를 떨구려는 듯 흔들렸다. 나는 이를 악물고 눈을 다리 끝에 고정했다.
‘이 다리만 건너면 된다. 이 다리만…’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미 반대편에 서 있었다. 그런데도 뒤에서는 누군가 따라오는 듯한 발소리가 들렸다가 곧 사라졌다.
범륜사에 오르기 전, 진흙물에 무릎을 묻고 기어오를 때, 다시 그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속삭임. 나는 고개를 홱 돌렸지만 숲은 빗방울에 젖어 무심했다.
범륜사 매점에 도착했을 때, 뜨끈한 어묵 국물 냄새가 빗속에 피어올랐다. 나는 커피를 들고 한쪽에 서서 숨을 고르며 빗방울을 털어냈다. 그때 곰 같은 체구의 사내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검은 우비 차림의, 평범한 등산객이었다.
“비 오는 날 산에 오는 매력이 이거죠.”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빗속에서 들려서인지 묘하게 울림이 겹쳐졌다. 나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내는 금세 매점 안쪽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비에 젖은 바닥에는 그가 남긴 발자국이 금방 빗물에 씻겨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장면이었는데, 어쩐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다시 길을 오르자, 사람들은 하나둘 사라졌고, 어느새 나 혼자가 되었다. 숲은 깊어졌고, 빗방울은 가지 사이로 떨어져 탁탁 울렸다. 그리고 또다시,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더 선명했다. 분명히 내 뒤에서 누군가가 따라오며 대화를 나누는 듯했으나, 돌아보면 빗속의 안개뿐이었다. 나는 땀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정상에 도착했을 때, 감악산비가 초라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풍경은 장엄했다. 구름이 흩어지며 회색빛 도시와 멀리 구불거리는 강줄기가 발아래 드러났다.
나는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남지 않았다. 바위 위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차갑게 젖은 옷 위로 빗방울이 연속적으로 쏟아졌다. 이마를, 볼을, 입술을 두드리는 빗물은 작은 북소리 같기도, 먼 곳에서 들려오는 신호 같기도 했다. 눈을 감으니 비는 온몸을 덮는 장막이 되었고, 나는 그 장막 속에 파묻힌 채 흔들렸다.
처음에는 숨이 가빠와 가슴이 터질 듯했지만, 이내 호흡이 천천히 고르게 바뀌었다. 빗방울은 나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씻어내는 것 같았다. 허벅지의 통증, 어깨의 짐, 마음속 무겁던 것들까지 모두 조금씩 흘려보내는 듯했다.
‘여기서 그대로 잠들어도 괜찮겠다. 죽든 살든 상관없다. 어쩌면 이게 가장 자유로운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동시에 묘한 희망도 일어났다. 빗물 속에서, 여전히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나를 조롱하는 소리 같으면서도, 끝내 이곳까지 오게 한 길잡이의 속삭임 같았다. 나는 젖은 얼굴 위로 흘러내린 눈물과 빗물을 구별하지 못한 채, 미소를 흘렸다. 고통과 두려움이 뒤섞인 그 미소는, 그러나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진짜 나의 표정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주머니 속 삼각김밥을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때, 아까 매점에서 보았던 그 사내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손에 커피를 들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내게 커피 한 잔을 내밀며 활짝 웃었다. 커피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며 쓴맛을 희석시켰다. 나도 웃으며 받았다. 순간 그의 웃음은 평범했지만, 빗속에서 어딘가 낯설게 흔들리는 듯 보였다.
나는 결심했다. 앞으로 2년 동안 산을 오르리라.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끝을 기다리는 준비’가 아니었다. 새로운 길을 오르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 자체가 내 삶이 될 것이다.
산에서 들려오던 여자들의 소리는 정상에 다다른 순간에도 여전히 희미하게 울렸다. 그리고 그 사내의 웃음과 겹쳐져, 한동안 내 귓가에서 메아리처럼 번졌다. 나는 알았다. 인생의 구렁텅이도 결국 산과 같아서, 두려움과 기묘한 속삭임을 뚫고 나아가면 언젠가는 다시 빛나는 풍경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