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백조

by 쪼교


작품 <블랙 스완>은 할리우드의 연기파 배우 나탈리 포트먼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다. 무대 위에서 그녀는 <백조의 호수>의 주역으로 발탁된 발레리나 ‘니나’를 연기하며, 하나의 몸으로 두 개의 날개를 펴야 했다. 백조와 흑조, 정반대의 기류를 품은 1인 2역. 니나는 완벽을 향해 기계처럼 고정된 시선을 갖고 바닥을 긁는 발끝으로, 뼈가 유리처럼 갈라질 때까지 연습장을 맴돈다. 백조의 숨결은 새벽처럼 맑고, 흑조의 호흡은 자정의 숨막힘처럼 뜨겁다. 그녀가 순수와 욕망 사이를 왕복할수록, 무대 뒤 조용한 어둠에서는 거울의 틈이 벌어진다. 거울은 두 개로 쪼개진 얼굴을 반사하고, 찢어진 자아는 무대의 조명 아래서 드디어 눈을 뜬다. 나탈리 포트먼은 그 균열의 소리를, 관객의 흉곽까지 울리도록 정확하고 잔혹하게 끌어냈다. 몸의 각도는 점점 예리해지고, 시선은 활줄처럼 당겨지며, 진동하는 광대뼈 아래로 숨이 곤두선다. 완벽에 닿으려는 욕망이 어떻게 하나의 인간을 휘몰아쳐 가루로 만드는지, 그 소용돌이의 속도와 방향을 거의 촉각적으로 체감하게 만든 연기였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배우가 1인 2역을 맡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것도 백조와 흑조처럼 서로 밀어내는 성향을 한 몸에 담아야 한다면. 니나에게서 두 역할은 대칭의 저울이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순결하고 유약해 보이는 니나는 태생적으로 백조에 가깝다. 흑조는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진 언어, 불친절하고 위험한 음절. 그러므로 흑조를 요구받는 일은 모험이며 동시에 도박이었다. 발레단의 단장은 용의주도한 의심으로 그녀를 지켜본다. 과연 니나의 피부 아래에서 야생의 밤이 깨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결말은 다른 축에 놓인다. 니나는 백조에서 흑조로 옮겨가며 자신의 심장을 도려내듯 변신한다. 그 안에는 그녀 자신도 알지 못한 검은 깃의 새가 이미 잠복해 있었고, 무대의 마지막 회전에서 그것이 날개를 펼친다. 흑조는 추락이 아니라, 내면의 밤이 마침내 이름을 찾는 장면이었다.


나는 거기서 융의 ‘그림자’를 떠올렸다. 그림자는 사회적 페르소나가 화장을 덧바르고 환한 조명 아래 서 있을 때, 뒤편에서 묵묵히 조도를 낮추는 또 하나의 나다. 우리가 거절했던 욕망과 두려움, 용납하지 않기로 결심한 결핍과 분노, 오래된 수치와 말라붙은 눈물의 잔여. 그림자는 속임수에 능하다. 없는 척, 잊은 척, 이미 지나간 척. 그러다 어느 날 문틈에서, 혹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서, 흉부의 빈 공간에서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다. 한 번 나와 눈을 마주치면 도로 봉인하기는 어렵다. 억누를수록 살결 가까이에서 숨을 쉬고, 그 호흡은 우울이나 불안, 강박, 공황의 형태로 몸을 떠민다. 융은 그 그림자를 ‘인정’하고 ‘품을 것’을 권했다. 나도 안다. 내 안의 흑조를 부정하면, 등 뒤에서 그 깃털이 매번 더 큰 소리로 바스락거린다는 사실을. 함께 앉아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는 사실을.


어린 시절의 어느 여름, 정확히 몇 학년인지는 희미하지만 장면만은 선명하다. 아버지가 큰맘 먹고 내게 새 자전거를 사주셨던 날. 페달은 버터처럼 부드럽게 돌아갔고, 크롬 핸들은 오후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나는 종암동 골목을 헤집고 다녔다. 안암동과 맞닿은 동네, 고대 담장 너머로 들려오던 함성의 잔향. 그 시절, 학생들의 목소리와 구호는 하루 몇 번씩 바람을 타고 우리 집 지붕 위를 건너갔다. 멀리서 ‘웅—’ 하고 웅성임이 일어나면, 골목의 개들도 한두 번 짖음을 멈췄다가 다시 짖었고, 작은 가게의 셔터엔 먼지가 조금 더 내려앉았다. 나는 그 소리의 근원을 늘 궁금해했다. ‘그곳’은 늘 내게 먼 지명처럼 빛났다.


그날도 나는 소리의 방향으로 페달을 밟았다. 고대 근처에 다다랐을 때, 허공에서 하얀 솜뭉치 같은 것이 툭 떨어졌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차릴 틈도 없이, 공기 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목구멍이 유리 가루를 삼킨 듯 칼칼해지고, 코와 눈이 동시에 뜨거워지며 액체가 제멋대로 흘러내렸다. 세상이 초록빛으로 번져 보이더니, 금방 회색으로 질렸다. 나는 자전거를 돌려 정신없이 페달을 미친 듯이 밟았다. 바람은 매캐했고, 눈물은 속수무책이었다.


집 앞 골목 모서리를 돌았을 때에야 깨달았다. 내 곁에 있어야 할 번쩍이던 자전거가 없었다. 새 자전거와 함께 보낸 첫날, 정확히 두 시간도 되지 않아, 나는 자전거를 잃어버렸다. 고막 속에서 피가 솟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현관문을 열고 엄마를 불렀다. 엄마의 손이 내 멱살을 잡아끌고 골목으로 데려갔다.


엄마는 나를 때렸다. 그날의 소리는 아직도 구체적이다. 손등과 볼이 부딪칠 때 나는 둔탁한 소리, 무릎이 바닥과 만나는 순간의 뜨거운 마찰, 허공의 공포가 폐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 나는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는 인간의 언어라기보다 동물의 비명에 가까웠다. 이를테면 쓰레기통에서 음식 찌꺼기를 뒤지던 개가 사람들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질 때 내는, 짧고 끊기고 겁에 질린 신음 같은 울음. 그 순간 나는 둘로 분열했다. 매질을 맞으며 바닥을 구르는 아이로서의 나, 그리고 그 장면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또 하나의 나. 거리는 갑자기 칼날처럼 선명해졌고, 동시에 외부의 감각은 희미해졌다. 이웃 할머니가 말리는 목소리는 먼 곳의 웅얼거림으로 변했고, 햇살은 종잇장처럼 얇아져 골목 위를 미끄러졌다. 나를 파고들던 것은 타격의 통증이 아니라, 둘로 나뉘는 그 단절의 감각, 몸과 마음의 줄이 ‘툭’ 끊어지는 소리였다. 그때 처음, 내 그림자의 그림자를 보았다.


어린 날의 나쁜 일은 그 하나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말과 손이 칼이 되는 순간은 삶의 여러 모퉁이에 흩어져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너를 그림자 속에 가두게 된 사건을 하나만 말하라”는 질문을 내게 던진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날을 꺼낸다. 이유의 이름을 정확히 대지 못하더라도, 내 몸은 그 장면을 잊지 않았다. 나는 그 강렬한 기억의 이름을 ‘블랙스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블랙 스완’은 문자 그대로 흑조를 뜻하지만, 우리 시대에 더 자주 호출되는 건 시사용어로서의 의미다. 탈레브의 책이 그것을 널리 퍼뜨렸다. 1987년의 블랙먼데이, 2001년의 9·11, 2008년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발생 확률은 낮지만 한 번 일어나면 세계의 표면을 갈라놓는 사건들. 그러나 나는 안다. 블랙스완은 뉴욕 월가의 전광판에서만 날아드는 새가 아니다. 각자의 가슴뼈 사이에도 둥지가 있으며, 각자의 과거에도 어둠의 알이 있다. 예측 불가하고 통제 불능이며, 한 번 부화하면 삶의 지도를 새로 그리게 만드는 개인적 사건들. 내게는 그 골목, 그 여름, 그 매캐한 공기와 엄마의 손등이 그 알을 깼다.


그래서 나는 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그 블랙스완 때문이다. 오랫동안 외면하며도 끈질기게 나를 찾아와 무너뜨리던 고통의 형태를, 끝내 그리기 위해서. 고통은 몸을 빌려 제 모습을 분명히 한다. 흉곽의 단단함, 목의 조임, 손끝의 냉기, 바깥소리의 둔해짐. 나는 실제로 아프다. 그러니 내 속의 밤새를 찾아 빛 한가운데로 날려 보내야 한다. 그래야 내 폐에도 새벽 공기가 들어올 것이다.


어떤 계기는 늘 있다. 내게 그것은 이직이었다. 낯선 책상과 새로 배분된 역할, 이름표의 위치가 달라졌을 뿐인데, 어느 날부터 직장 내 괴롭힘이 내 자리로 정기적으로 배달되기 시작했다. 야유의 어조, 회의실의 침묵, 책임의 화살이 누군가의 무심함 속에서 자꾸 내 쪽으로만 비껴 들어왔다. 가장 낯선 건, 오래전 최루탄의 쓰라림과 매질의 무력감이 현재형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운전대 위의 손이 땀으로 젖고, 어느 순간 호흡이 공중에서 끊겼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신발과 양말을 벗어 아스팔트의 거친 촉감을 발바닥으로 확인해야만 살아났다. 발작은 수년 동안 진정되지 않았고, 오히려 출근길의 규칙처럼 늘었다. 퇴근 후에야 밀려오는 안도의 파도와, 그 바로 뒤의 기절 같은 잠. 하지만 파도는 금세 빠져나가고, 모래 위에는 불안의 젖은 흔적만 남았다.

그 무렵 나는 조용히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가면을 씌워 인물을 만들고, 그 인물의 입에 내 심장을 조금씩 나눠 주었다. 그러면 밤이 조금 견딜 만해졌다. 이후 심리학 대학원에 진학했다. 나는 내 혼란을 숨기기 위해 혼자를 택했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사람을 갈망했다. 상반된 방향으로 몸을 찢어 당기는 느낌. 마음은 굳어가는 듯했고, 굳어갈수록 더 세게 뛰었다.


상담자가 되어 타인의 이야기를 직접 들은 시간이 있다. 이상하게도 그 시간이 내 안의 어떤 문을 열어젖혔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실제로 내 안에서 체감할 수 있다면?” 그 질문은 내게 경외에 가까웠다. 인간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고도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책으로만, 시로만, 다른 이의 고통을 관망하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오히려 내가 내 이야기를 적을 때, 내 앞의 바람이 달라졌다. 글을 쓰고 나면, 무겁던 마음이 아주 조금 가벼워졌다. 빈 그릇이 되어야만 새 물을 받을 수 있는 법. 그 가벼움은 타인에게 닿기 위한 준비운동 같았다. 가슴에 여백이 생기니, 타인의 울음이 내 귀에 다다를 공간도 생겼다.

가장 최근에는 시를 썼다. 그 시에서 나는 나를 그리워했다. 과거의 나가 현재를 어루만지고, 미래의 내가 뒤돌아 현재를 걱정했다. 어느 날 밤, 창틀에 팔을 걸치고 별을 오래 바라보았다. 내 안의 목소리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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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거긴 지낼 만한가요
난 잘 지내고 있어요
파릇파릇 나뭇잎이 짙어지고 있고, 아스팔트 열기도 제법 올라오고 있어요

이제 곧 여름인데
나도 적은 나이가 아닌데
걱정스럽다고 당신이 물었지요

아직은 별을 보고 일어나고
별을 보고 잠들어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별 세어보는 재미도 있어요

당신도 그렇게 잘 지내고 있나요
푸르러지는 나무를 볼 때마다
이글거리는 아스팔트를 볼 때마다
당신을 생각하며
별 세어 보는 버릇이 생겼어요

나뭇잎이 모두 떨어지고
아스팔트가 차갑게 식어갈 때쯤
같이 별을 세어볼 수 있겠지요?

단단한 나무처럼
끈기 있는 아스팔트처럼
당신과 같은 별을 보며 그리워하겠습니다.


이 시를 쓴 뒤로 나는 조금 달라졌다. 나는 한때 믿었다. 나의 고통을 더 선명히 알수록 타인의 고통을 더 잘 알게 될 거라고. 하지만 요즘은 순서가 바뀌었다. 타인의 고통을 내 것으로 삼으려 하지 않고, 그들의 고통을 그들의 것으로 인정하며 함께 머무를 때, 오히려 나를 더 분명히 이해하게 된다. 얼마 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에서 주인공들이 눈물을 터뜨리는 장면을 보며, 나는 그들의 사연을 거울 삼아 내 상처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울음에 맞춰 울었다. 그 울음은 내 심장을 겨냥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내 심장도 가벼워졌다. 공감이란 그렇게, 서로의 중심을 훼손하지 않은 채 옆에 앉아 숨을 맞추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블랙스완을 품은 채 하루를 버틴다는 것을. 어떤이는 새벽에, 어떤이는 늦은 밤에, 각자의 새가 잠시 둥지 밖으로 날아나와 머리 위를 한 바퀴 돌고 돌아간다는 것을. 우리가 매번 아침을 맞는다는 사실은, 그 밤을 살아낸 자라는 증거다. 살아남은 자는 그만큼의 승리를 손에 쥔다. 작은 승리들이 쌓여 우리를 지탱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쓴다. 흑조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이름을 얻고, 자리를 얻고, 함께 앉을 의자를 하나 더 놓아줄 뿐이다. 때로는 내 손목이 떨리고, 가슴이 얼어붙을 때도 있겠지만, 나는 안다. 글이란 결국 빛을 향해 날아가는 검은 새의 궤적을 종이 위에 옮기는 일. 내 안의 그림자가 내 곁에 앉아 조용히 깃을 다듬을 때, 나는 그 깃털의 결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한 줄을 쓴다. 그리고 다시, 한 줄.


언젠가 내 흑조가 환한 한낮의 하늘을 가뿐히 가르며, 빛의 중심을 한 번 돌아 나오기를, 그 뒤로 내 폐가 더 깊이 열리기를, 나의 시간들이 조금 더 환해지기를 바란다. 그때까지 나는 매일 새벽, 책상 위의 종이 한 장을 펼친다. 어젯밤의 어둠이 아직 잉크처럼 남아 있을 때, 검은 새의 그림자를 첫 문장으로 옮긴다. 그렇게 나는 내 블랙스완과 함께, 또 한 번의 아침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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