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편-
책으로 숨어 본 적 있나요. 나는 스스로에게 자주 묻는다. 답은 늘 같다. 그렇다. 숨이 막히는 날이면 책을 폈다. 그 안은 부모였고 스승이었고 친구였고 때로는 배우자였다. 넓은 방도 필요 없었다. 책 한 권이 놓일 만큼의 자리와 숨을 고를 작은 틈이면 충분했다.
병원에 누워 있던 어느 계절 기억들은 연기처럼 갈라졌다. 선명해야 할 장면들이 뿌옇게 밀려나고 내 옆에 남아 있던 건 책뿐이었다. 사람과 부딪히면 상처가 났는데 문장과 부딪히면 문장이 먼저 사과했다. 조금 더 천천히 읽어 달라고. 그때부터 나는 책과 오래 살았다.
내가 오래 의지한 사람은 친구 한 명. 동갑이고 나보다 솔직한 사람. 내가 책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그는 한숨을 쉬었다.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네가 책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다고. 나는 웃었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거라고. 그는 이해하려 애썼지만 이해에는 바닥이 있었다. 카페에 함께 앉아 있어도 그는 컵을 비우고 나가고 싶어 했고 나는 페이지를 채우고 싶어 했다. 결국 남은 건 의자 하나와 책 한 권 그리고 내 숨뿐이었다.
그 무렵부터 이상한 일이 시작됐다. 책을 읽다 중간에 덮으면 안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인물들이 목소리를 내어 나를 깨웠다. 이야기를 계속하자고. 나는 잠깐만 쉬자고 말했지만 그들의 손짓은 집요했다. 새벽에 눈을 감으면 문장들이 내 이름을 부르며 흔들었다. 당시의 나는 그 부름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사실은 의존이었다.
상담실에서 나는 말했다. 선생님 저는 책으로 도망쳤어요.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망은 살아남기 위한 기술일 때가 많죠. 다만 그곳이 다시 당신을 가두지 않게 하려면 문 손잡이를 당신 쪽에 달아야 해요.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손잡이를 내 쪽에 달아두는 일. 나는 그 문장을 메모장 첫 줄에 새겼다.
친구와는 한동안 멀어졌다. 그의 세계는 여행 일정으로 돌아갔고 나의 세계는 독서 목록으로 돌아갔다. 불협화음은 작은 사건들로 커졌다. 함께 걷자던 산책을 미루고 그는 네가 너무 닫혀 있다고 말했고 나는 그저 조용히 있고 싶다고 답했다. 그가 화를 내면 나는 침묵으로 버텼다. 그 침묵은 사과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내 쪽으로 문을 당겨 잠그는 동작이었다. 그날 밤에도 나는 책을 덮었다. 또다시 안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여길 떠나지 말라고. 이야기를 계속해야 한다고. 나는 조용히 책등을 쓰다듬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그러나 새벽이 오면 나는 다시 불려갔다.
어느 밤 책은 과하게 친절했다. 영원히 쉬고 싶다면 여기 눕라고. 그 친절에는 그림자가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 발 물러섰다. 그제야 알겠다. 나는 책을 사랑했지만 책에게 너무 많은 역할을 맡겼다. 책은 세계를 설명해 주지만 세계를 대신 살아주지는 못한다. 창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길고 무거운 꿈에서 잠깐 깨어난 기분. 다음 날 아침 나는 책장을 정리했다. 좋아서 모아둔 책들을 상자에 옮겼다. 버리려는 게 아니었다. 내 쪽 문을 다시 달겠다는 몸짓이었다.
빈 책장 앞에서 한동안 멍해졌다. 공기가 휑했다. 책 없는 방은 처음이었다. 대신 작은 화분을 들였다. 햇빛이 들어오는 방향에 맞춰 자리를 바꿨다. 향기가 옅게 돌았다. 익숙했던 퀴퀴함이 사라지고 낯선 깨끗함이 생겼다. 낯섦은 불안했고 동시에 조금 후련했다. 나는 작은 규칙을 만들었다.
첫째 책은 도피가 아니라 귀환을 위해 읽는다.
둘째 하루의 절반은 종이 밖에서 보낸다. 걷고 누군가와 밥을 먹고 하늘을 본다.
셋째 힘든 말은 메모에만 쓰지 말고 사람에게도 말한다.
넷째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된다. 덮을 권리를 안다. 덮는 데에도 예의가 있다.
다섯째 내가 사라지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시간이 흐르자 기다리던 일이 벌어졌다. 책을 덮었는데도 부르지 않는 밤이 온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 적막이 두려웠다. 그동안 나를 불러주던 존재가 사라졌다는 상실감. 잠시 후 그 적막 속에서 아주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안에서가 아니라 내 쪽에서. 내 생활이 나를 불렀다. 물을 끓이고 창을 열고 친구에게 문자 한 줄을 보냈다. 오랜만이야 잘 지내지. 답장은 짧았다. 천천히 보자.
한 달 뒤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같은 언어로 말했지만 서로의 표정에는 다른 나라의 문법이 남아 있었다. 그는 말했다. 너 그동안 너무 단절돼 있었어. 나는 대답했다. 응 그런데 잘라내고 나니 돌아오는 길이 보이더라. 우리는 오래 앉아 있었다. 예전과 달랐던 것은 책을 바로 펼치지 않았다는 점. 잔을 비우고 창밖을 보고 서로의 숨을 들었다 놓았다. 그때 나는 약속했다. 네가 듣고 싶을 때만 내 책 이야기를 할게. 네가 멈춰 달라면 거기서 멈출게. 그는 웃었다. 나도 네 이야기를 배워 볼게.
나는 페이지의 세계에서 골목의 세계로 조금씩 걸어 나왔다. 완전히 나왔다고는 말할 수 없다. 가끔은 여전히 책이 나를 부른다. 다만 그 부름의 결을 알게 되었다. 중간에 덮으면 인물들이 달려와 속삭인다. 여기서 멈추면 내가 죽는다고. 그럴 때 나는 조용히 답한다. 넌 내 이야기의 인물이지만 내 삶의 주연은 내가 해. 내일 다시 만나자. 문을 닫되 잠그지 않는다. 손잡이가 내 쪽에 달려 있는지 확인한다. 열고 닫는 주체가 나인지 확인한다.
상담실을 나오는 길에 선생님이 물었다. 요즘은 어디서 숨을 고르세요. 나는 말했다. 책에서 반 사람들 사이에서 반 남은 반은 그냥 빈 자리에서요. 선생님이 웃었다. 세 반이네요. 나도 웃었다. 그렇죠 남는 반은 내일 빼기로요.
밤이 오면 책장 앞에 선다. 손끝이 떨리면 한 권을 꺼내 의자에 올려둔다. 바로 읽지 않는다. 스탠드를 켜고 물을 한 잔 마신다. 그다음에야 첫 장을 펼친다. 소리를 내어 한 문장을 읽고 눈을 감는다. 방 안 공기가 그 문장을 품는다. 때때로 다시 덮고 침대에 눕는다. 그러면 멀리서 또 부르는 소리가 온다. 나는 대답한다. 알아 내일 아침에 계속하자.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잠든다. 더 이상 책 속에 숨지 않는다. 책을 내 삶 속으로 데려온다. 문과 창문이 닫히지 않게 조심하면서.
혹시 당신도 책으로 도망친 적이 있나요. 그때의 당신에게 전하고 싶다. 도망이 필요한 날이 분명 있다. 그 도망이 우리를 살린다. 다만 돌아오는 길도 함께 만들자. 손잡이는 우리 쪽에 달아 두고 덮는 연습을 하고 덮은 뒤 잠시 가만히 앉아 숨을 세자. 그 사이에 새 문장이 스스로 걸어 들어온다. 책은 여전히 우리의 편이고 우리는 더 이상 책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는다. 서로의 몫을 나누어 들고 같은 자리에서 같은 빛을 나눠 가진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책을 덮을 때 인물들이 우리를 부를지라도 우리는 말하자. 내일 이어서 하자고. 오늘의 삶이 먼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