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나라에 가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동화 속 세상에 들어선 것처럼 모든 것이 신기할까, 아니면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변해버린 세상에서 공포만 느끼게 될까.
나는 그날 저녁, 그 엉뚱한 상상을 했다.
왜냐하면 그날, 아주 갑작스럽게 한 통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규호야, K형 돌아가셨단다.”
퇴근하려던 순간이었다.
핸드폰 너머로 들려온 정훈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큼 평온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단단한 파열음이 섞여 있었다.
“왜?”
내 입에서 튀어나온 첫 단어였다.
짧고 단호한 한 글자. 그러나 그 안엔 수많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믿을 수 없음, 분노, 슬픔, 그리고... 죄책감.
“자살하셨대.”
그 짧은 대답이 내 귀 속을 천천히 돌고 돌아 머릿속에 번졌다.
그리고 마침내, ‘왜’라는 물음표만이 남았다.
왜, K형은?
K형은 나보다 두 살 많은 대학 동아리 선배였다.
늘 무표정한 얼굴, 다부진 어깨, 단정한 머리.
그는 학교에서 나눠준 다이어리를 들고 다녔고, 언제나 거기에 무언가를 기록했다.
누가 봐도 성실한 사람이었고, 책임감 있는 선배였다.
그는 감정의 폭이 좁았다. 아니, 감정을 억눌렀던 사람 같았다.
웃는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는 그가 웃던 순간들을 자주 떠올린다.
그가 웃을 때면, 그 웃음은 너무도 어색하고 조심스러워서 금방 사라질 것 같았다.
그 웃음 속엔 늘 슬픔이 숨어 있었다.
아마 나는 그 슬픔의 결을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늦은 밤의 술자리에서 그가 노래를 불렀다.
양희은의 아침이슬.
“나 이제 가노라…”
그 노래를 부르던 그의 눈빛은 멀리, 아주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알았다.
그는 언제나 이 세상 어딘가에 발을 딛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는 걸.
졸업 후 몇 해 뒤, 그가 내 회사 로비에 나타났다.
회색 양복 차림이었다.
그의 손에는 황금빛 명함이 들려 있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규호야, 나 19기 K형이야. 지금 로비인데 잠깐 내려올 수 있냐?”
그날 로비 카페에서 마주한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눈빛은 자주 깜빡였고, 말끝은 공손했다.
손에는 보험사 다이어리와 상품 설명서가 들려 있었다.
그가 나에게 건넨 명함에는 ‘재무 설계사’라는 단어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가 내게 내민 상품은 적립식 펀드였다.
나는 이미 그런 상품이 어떤 건지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입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열심히, 너무나 성실하게 설명했다.
피곤해 보였고, 다크서클이 짙었으며, 숨을 고르듯 말을 이어갔다.
‘형, 그냥 솔직히 말하지 그랬어요.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하나만 들어달라고.’
그 말을 나는 끝내 하지 못했다.
나는 50만 원짜리 상품에 서명했다.
그는 내 서명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중히 허리를 굽혀 “잘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장면은 내게 잊히지 않는다.
그의 인사는 절망에 가까웠다.
무언가에 지고도 지지 않은 사람의 몸짓이었다.
나는 그 순간, 묘한 모멸감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그날 이후 K형은 곳곳에 나타났다.
동창회에서도, 동아리 모임에서도,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는 늘 회색 양복에 다이어리를 들고 있었다.
언제나 명함을 내밀며 인사했다.
웃음이 익숙해진 그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점점 더 공허해졌다.
그는 곧 ‘보험왕’이 되었다.
영업 실적 전국 1위, 비행기로 전국을 돌며 강의까지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는 성공한 게 아니라, 이상한 나라에서 길을 잃은 것이었다.
한 번의 납입 후 나는 보험을 해약했다.
그에게 알리지 않은 채였다.
그날 밤,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 때문에 손해 봤어, X발!”
그가 내뱉은 욕설은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는 더 이상 내가 알던 K형이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아니라, 공허한 울림이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는 이상한 나라에 갇혀버린 것이라고.
며칠 후, 우리는 그의 장례식이 열린 창원으로 향했다.
정훈과 상태, 그리고 나.
차 안은 조용했고, 라디오에서는 오래된 가요가 흘러나왔다.
상태의 아내 선경은 우리에게 소금이 들어 있는 작은 부적을 나눠주었다.
“이상한 기운은 떨쳐내야 해요.”
그녀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그가 있었다.
사진 속에서 여전히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오래된 증명사진처럼,
마치 살아있던 마지막 순간보다 훨씬 더 오래전의 그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발견된 곳은 외딴 시골의 폐가였다.
목을 맨 채, 짧은 유서를 남긴 채.
아내와 어린 두 아이를 남겨두고.
나는 그가 떠올랐다.
로비 카페에서 내게 고개 숙이던 모습,
억지로 웃으며 “그거면 돼”라던 목소리.
문득 생각했다.
내가 그때 보험을 해약하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도 살아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의 죽음엔 나도, 우리 모두도 책임이 있는 걸까?
아니, 어쩌면 그는 그저 탈출을 시도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이상한 나라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시도.
죽음은 탈출구이자 위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영정 앞에서 아무도 울지 않았다.
대신 다들 침묵했다.
그 침묵이 너무 커서, 나는 오히려 울 수가 없었다.
세상은 너무 쉽게 사람을 이상한 나라로 내몬다.
그리고 누군가 그곳에서 빠져나오면,
우리는 그를 비겁하다고 부른다.
회사로 나를 찾아왔던 그날,
그가 말했다.
“규호야, 지금 다니는 회사 마음에 들면 그거면 돼.”
그 말을 나는 잊고, 그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지금, 나도 이상한 나라에서 길을 잃고 있다.
웃는 법을 잊은 채, 마음 한켠을 버텨내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그리고 이상한 나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K형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늘나라 위에는 또 다른 하늘나라가 있다고 했다.
부디 그곳에서는 조금 더 따뜻하길.
K형이 이제는 이상한 나라가 아닌,
조금은 덜 슬픈 세상에서 웃고 있길 바란다.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그의 노래가 귓가에서 천천히 멀어져 간다.
그리고 나는, 이 이상한 나라의 어느 모퉁이에서
그의 마지막 웃음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