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지마세요 앉으세요>는 내 첫 책 제목이다. 처음 가정의학과 의사를 만났을 때 의사는 나에게 가능한 “앉지 마세요.” 했다. 의자는 높은 테이블에 서서 진료하는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앉지 말라는 의사의 말은 가능하면 많이 움직이라는 뜻이었지만 나는 책 제목이 생각 나 혼자 웃었다. 나는 앉아 있는 사람, 사람이 앉는 곳을 관찰하고 책을 쓰는 사람인데, 이제 가능하면 앉지 말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내 연구실에는 상판의 높이가 조절되는 모션 데스크가 있다. 730mm에서 좀처럼 올라갈 줄 모르던 데스크를 오랜만에 1,050mm로 올렸다. 이 테이블은 작년 여름 집에서 필라테스 개인지도를 받다가 하루 만에 허리를 다쳐 구매한 것이다. 그때는 의자에 앉거나 허리를 앞으로 구부리는 자세가 가장 힘들었다. 양치질, 세수, 손 씻기 등이 모두 허리를 앞으로 구부리는 행위임을 깨달았다. 신경외과 의사는 지금보다 나빠지면 수술해야 한다고 겁을 줬다. 엑스레이 사진을 보니 4번 척추뼈가 배 앞 방향으로 미끄러져 있었다. 통증 때문인가? 잘못 움직이면 저 뼈가 그대로 뱃가죽에 가서 붙어버릴 것 같았다. 일단은 물리치료와 약물치료를 처방받고 경과를 보기로 했다.
양말이나 신발을 신다가 눈물이 찔끔 나왔고, 의자에 앉는 자세는 아예 불가능했다. 앉지 못하니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스탠딩 테이블이 있는 카페를 찾아 급한 일을 했다. 내게 적합한 높이는 1,050mm 정도인데, 다들 조금씩 낮아서 어깨와 목이 아팠다. 이러다간 목디스크까지 생길 판이었다. 허리 문제가 아니라면 단번에 쳐낼 일들이 엿가락처럼 죽죽 늘어졌다. 넘어진 김에 쉬어가자며 미뤄 둔 영화나 책을 봤지만, 그것도 금세 싫증 났다.
모션 테이블을 구매하려고 노트북을 펼쳤는데 허리 통증에 검색도 쉽지 않았다. 원래 있던 테이블을 움직이고 치우는 과정도 엄두가 안 났다. 그러던 어느 날, 편성준 작가의 <살짝 웃기는 글이 잘 쓴 글입니다>를 읽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허리가 안 좋았던 그(헤밍웨이)는 높은 책상을 놓고 서서 글을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143쪽)"라는 문장 때문이다. 서서 글을 쓰면 나도 헤밍웨이처럼 좋은 글을 쓸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허리 통증을 참으며 드디어 모션 데스크를 주문했다.
서 있는 자세로 하는 작업에는 장점이 꽤 있다. 30대 초반, 나의 첫 사무실에도 스탠딩 테이블이 있었다. 허리 문제는 없었는데, 치열하게 일하면서 아이 키우던 시절이라 그랬을 것이다. 스탠딩 테이블은 조속히 결정해야 하거나 해치워야 할 일에 적격이었다. 주로 오전에 사용했다. 그때의 기억마저 소환되자, 이제 모션 데스크만 도착하면 내 삶이 크게 바뀔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다.
추석 연휴가 끼어있고, 충주 배송 가능 요일이 제한되어 있어 모션 데스크는 주문한 지 3주 만에 연구실에 도착했다. 그사이 죽을 것 같던 허리 통증이 잠잠해졌다. 앉을 수 없을 때는 스탠딩 테이블의 존재만으로도 감지덕지했는데, 다리가 아프면 앉을 수 있는 선택지가 생기자 모션 데스크는 더 이상 ‘모션’ 일 필요가 없었다. 데스크는 종일 730mm 높이에 고정됐다.
앉지 말라는 의자의 처방을 받고 오랜만에 모션 데스크의 높이를 1,050mm로 조정했다. 빨리 결정해야 할 일들, 걸어야 할 전화, 답변해야 할 이메일 등에 속도가 붙었다. 연구실에서 15m 정도 떨어져 있는 정수기까지 왕복하는 것도 덜 귀찮았다. 목과 어깨가 아프면 연구실 문을 열고 나가 40m 정도 되는 복도를 왕복하는 것도 쉬워졌다. 한번 앉으면 2~3시간은 꼼작도 안 하던 때와 비교된다.
헤밍웨이는 허리 통증 때문에 서서 소설을 썼다지만, 나의 경우 디자인의 초안을 잡을 때, 즉 정교함보다는 유연함이 필요한 시기에는 서 있는 자세가 좋다. 이 단계에서는 스케치할 때도 두꺼운 필기구를 사용하고, CAD보다는 손으로 도면을 그린다.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의견이 뒤늦게 떠올랐을 때 언제든지 쉽고 유연하게 바꾸기 위함이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어떤 것이든 확정 짓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때는 서 있는 게 좋다.
모션 데스크를 사용하다 보니 확실히 알겠다. 어떤 일의 기획 단계나 써 놓은 글을 윤문 할 때 서서 하는 것이 좋고, 긴 호흡으로 집중해야 할 때는 앉아서 하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서 있을 때는 한발 물러서기 쉽고, 앉아 있을 때는 밀착하기가 쉽다. 서 있을 때는 이성이, 앉아 있을 때는 감성이 상대적으로 활발해지는 느낌이다. 의사는 다이어트 때문에 내린 처방이지만 서 있는 자세는 나의 업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능률을 높이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사이의 변환이 모션 데스크로 인해 조금 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