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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 사과 김진우 Oct 22. 2023

선생은 기억한다

사이드 레터럴레이즈, 일명 사례레, 양손에 덤벨을 들고 위아래로 움직여 삼각근을 단련하는 운동이다. 1kg짜리 핑크 덤벨을 잡으려는데 트레이너가 2kg짜리 드세요, 한다. 지난번에 1kg짜리로 했다고 했더니, 처음에 2kg으로 시작했다가 중간에 1kg으로 바꿨다고 한다. 머쓱해서 그걸 다 어떻게 기억하냐고 물었다. 수강생의 몸 상태, 운동 기간에 따라 운동의 종류, 순서, 강도를 짜기 때문에 기억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듣고 보니 맞다. 나도 내가 지도하는 학생의 프로젝트는 다 기억한다. 분반된 수업 두 반을 맡으면 거의 50명에 가까운 학생을 지도하는데, 각각의 학생이 지난 시간에 어디까지 진행했는지, 어떤 부분을 보완하고 수정하기로 했는지 다 기억난다. 학생들 이름이나 고유명사는 그토록 잘 잊어버리는데 생각해 보니 신기하다.      

이유가 뭘까? 트레이너의 말처럼 내가 하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디자인 프로세스가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기억된다. 어릴 적 빠져들었던 어떤 소설,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음악은 평생 잊히지 않는다. 공간 디자인과 스토리텔링이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다면, 공간디자인이야말로 실체적 주체가 실체적 공간을 서사와 시차에 따라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공간도 ‘읽는다’, ‘읽힌다’라고 표현한다.   

   

스토리가 탄탄해야 다수가 공감한다. 학생이 스토리를 잘 구축하면 일주일 뒤에 만나도 헷갈리지 않는다. 반대로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프로젝트는 그가 기획하고 있는 스토리의 맥락이 불분명하거나 무너졌기 때문이다.      


설계를 시작할 때, 학생들은 스토리를 구상하고 그걸 공간에 접목한다. 다양한 매체로부터 영감을 얻는다. 쉽지 않다. 스토리의 맥락을 잡기 위해서는 소위 콘셉트가 중요한데 콘셉트의 정의부터 막연하다. 대체 콘셉트가 뭔지 모르겠다고 호소한다.      


내가 나름 정리한 콘셉트는 이렇다. 예를 들면 프로젝트의 목표(what)가 ‘폐공장을 활용한 식음 공간디자인’이라면, 그걸 ‘어떻게(how)’ 설계할 것인가가 콘셉트다. 프로젝트 목표와 콘셉트를 나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함께 걸어가는 두 사람에 비유한다. 정해진 시간 안에 목표지점에 도달하려면 호흡, 속도, 결이 같아야 한다. 한쪽이 지나치게 앞서가거나 혹은 늦어지거나, 도를 넘거나 반대로 위축되면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 목표에 잘 맞는 좋은 콘셉트는 프로세스에 날개를 달아 준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좋은 콘셉트를 만난 친구들은 수업 시간에 할 말이 넘친다. 반대의 경우에는 스텝이 꼬여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계속 문제가 계속되면 최악의 경우 콘셉트(파트너) 없이 혼자 간다. 스토리가 빈약해지지만, 미완성보다는 나을 때 내리는 극단적인 선택이다. 파트너가 있다면 혼자보다 든든하지만, 혼자라고 해서 삶 자체를 멈출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좋은 콘셉트는 삶의 경험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직 20대인 학생에게 콘셉트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어렵다기보다 아직은 풍성하지 않다고 할까? 그래도 방법은 있다. 간접경험을 확장해서 사고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책(독서)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데, 요즘 친구들은 책을 읽지 않는단다. 그래서 추천하는 게 영화나 드라마다. 특히 SF는 공간, 색채, 질감 등을 콘셉트에 담아야 하는 공간디자이너에게 훌륭한 참고자료다.      

결국 디자인을 잘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은 다양한 삶의 경험이다. 살아온 삶의 길이가 짧아서 빈약해질 수 있는 콘셉트의 한계는 간접경험으로 극복한다. 그렇게 도출한 콘셉트가 탄탄한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탄탄한 스토리텔링이 좋은 공간을 만든다. 탄탄한 스토리로 된 학생의 좋은 공간을 선생은 모두 기억한다. 스토리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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