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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갈해리 Jul 06. 2022

선비와 폭군 (4)

분열과 갈등

"좋네. 한 잔 하지." 


  그런데 웬일인지 순복이 태경의 청을 흔쾌히 들어준 것이었다. 그는 순복과 함께 손님방으로 들어간 뒤 최 씨의 하인에게 술상을 봐달라고 했다. 


  "자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어 술을 마시자고 했나?"

  "처남, 제가 처남과 술을 마시자 한 연유는 다름이 아니라 저와 처남의 관계 때문입니다."

  "우리 관계가 뭐가 어때서?"

  "처남은 제가 성씨 가문의 사위가 된 것이 탐탁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 내 딱히 자네가 마음에 들지 않네."

  "처남께서 마음에 차지 않으셔도 제가 순자의 남편이 된 이상 성 부자 어르신의 사위가 되는 것 또한 자명한 일입니다. 헌데 처남께서 장인어른께 저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처남과 잘 지내고 싶은데, 처남께서 그러시면 많이 섭섭합니다. 그래서 처남과 우애를 돈독히 했으면 하는 마음에 술 한 잔 하며 흉금을 터놓고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자네가 우리 집안에 재물에 관심이 없다고 믿지 않아. 견물생심이라고 재물이 눈에 보이면 탐내게 되어 있어. 자네 속이 훤히 다 보인다고."

  "저는 결코 성씨 집안의 재물에는 쌀 한 톨의 관심도 없습니다. 오로지 순자와 곧 태어날 아기만이 신경 쓰일 뿐입니다. 처남, 부디 제 진심을 믿어 주십시오."

  "아니, 나는 자네를 절대 믿을 수 없어. 자네가 이 혼사를 무른다면 믿어 보지. 그렇지 않다면 어림도 없지."


  순복은 태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신의 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태경은 순복에게 자신의 진심이 통하지 않는 것을 보자, 분이 터졌다. 그도 자신의 잔에 술을 따라 연거푸 마셨다. 그렇게 각자 술을 어느 정도 따라 마시고 두 사람이 얼큰하게 취했을 때, 순복이 태경에게 소리쳤다.


  "내 네 놈의 속셈을 다 알아. 우리 집안의 재산이란 재산은 네 놈이 다 훔쳐갈 것이야. 내 장담하지. 숙부님께서 도둑놈에게 딸을 주시려는 게야!"


  순복의 말을 듣자, 태경도 기분이 퍽 상했다. 그도 순복에게 대거리를 했다.


  "거 참, 아니래도 그러십니다. 사람 말 좀 믿어 주십시오!"

  "내가 네 놈 말을 뭐하러 믿냐?"


  순간, 자신을 계속해서 무시하는 순복에게 화가 난 태경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에이씨!"

  "아니, 이 놈이!"


  순복도 달려든 태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둘은 서로 붙어서 치고받고 때렸다. 태경의 주먹이 순복의 볼을 세게 쳤고, 순복의 손바닥이 태경의 뒤통수를 때렸다. 그렇게 한창 시끄럽게 싸우고 있을 때, 미닫이문이 열리며 성 부자와 유 씨가 들어왔다.


  "이게 무슨 짓들인가? 다 큰 어른들이 사람들 보기 민망하지도 않은가? 자네는 손윗사람이 되어서 아랫사람과 싸움이 붙어서야 되겠나?"

  "아니, 이 놈이 먼저 달려들었다는 거 아닙니까."

  "태경이, 너도 그렇다. 아랫사람이 손윗사람에게 손찌검을 해서야 되겠느냐? 사죄드리거라, 어서!"


  태경은 유 씨의 엄포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까닥하면서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처남."하고 사과했다. 그러나 순복은 계속해 씩씩거리다가 미닫이문을 세게 닫고 나가 버렸다. 성 부자와 유 씨는 태경의 머리가 헝클어진 꼴을 보고 쯧쯧 혀를 찼다.


  "자네, 이게 무슨 꼴인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장인어른."


  유 씨를 먼저 방으로 안내하고, 성 부자는 태경을 데리고 후원을 돌았다. 으슥한 밤의 후원에는 붉은 장미 덩굴이 연이어 이어져 피어 있었다. 마치 가시덩굴로 이어진 붉은 핏줄 같았다. 두 사람은 후원 한편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자네, 오늘 일로 우리 집안에 사위로 들어오게 된 걸 후회하나?"

  "아닙니다. 결코 그런 마음 품은 적 없습니다. 순자와 아이가 있는데, 제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일세. 그런데 내가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우리 집안의 비밀이니, 꼭 비밀을 지켜주기 바라네. 내 자네를 믿고 하는 말일세."

  "예, 알겠습니다."


  성 부자는 고민하는 듯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원래 내게 여식은 둘이 있지만, 사내놈이 없어 내 첫째 누이의 아들인 순복이를 양자로 들이려 했네만. 주변에서 극구 말리는 통에 양자로 들이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일을 시키면서 부하로 거둔 걸세."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게 비밀일 이유까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순복이의 부모인 내 첫째 누이와 첫째 매형이 살아생전에 남로당에서 활동한 적이 있더란 말이지."

  "남로당이면 남조선 노동당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네. 좌파들 말이야. 지금 정부에서 좌파들을 색출해서 도륙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지 않나. 그런데 순복이의 부모가 좌파였으니, 주변 사람들이 양자로 들이면 집안이 망할 거라며 말렸다네. 그런데 그 일을 두고 순복이는 자신을 양자로 들이지 않은 것에 원망을 품고 있었는데, 자네가 사위로 들어오니 오죽 심술이 났겠나."

  "아, 그런 것이었군요. 이제야 이해가 됐습니다, 장인어른."

  "자네가 순복이가 좀 심술을 부려도 이해를 해 주게. 아예 속까지 나쁜 놈은 아니니."

  "예, 알겠습니다. 장인어른."


  성 부자는 말을 마치자, 침소에 들겠다고 자리를 떴다. 태경은 혼자 의자에 앉아 생각에 빠졌다. 처남인 순복이 자신을 그토록 미워하던 이유가 자신의 출신 성분 때문이었다니. 조선이 망한 지 40년이 되었건만, 그놈의 출신 성분 따지는 것은 변하지 않는구나 싶었다. 태경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자신에게 배정된 손님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여정이 피곤했던지 아니면 술이 취해서 그랬는지 잠은 쉽게 찾아왔다.


  산지 사방에서 군인들이 쳐들어와 총을 쏘고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다. 그들은 인민군의 복장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정부군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국적을 알 수 없는 군인들이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동안, 태경과 순자의 가족들은 어느샌가 뿔뿔이 흩어졌다. 태경은 순자의 손을 붙잡고 있다가 난리통에 그 손을 놓치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군인들을 피해 바라보니, 멀리서 순자가 사촌인 순복의 손을 잡고서 산길로 도망치고 있었다. 태경은 순자를 쫓아가려 산길 속으로 달려갔지만, 순자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부인!" 


  외마디 소리를 외치고 일어나 보니, 태경은 손님방에 누워 있었고, 날은 어느덧 밝아 동이 트고 있었다. 

  그는 방을 나와 정원을 거닐기로 했다. 멀리서 순자가 어제 태경이 앉았던 정원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순자의 몸종 막례가 순자의 곁에 서서 그녀의 머리를 만져주고 있었다. 


  "이곳 목욕탕을 써 보니 살결이 뽀얘지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온천에 온 것처럼 깨끗하고 따뜻한 물이 쉴 새 없이 나와 몸을 담그기가 아주 그만이었습니다."

  "그래, 막례야. 목욕탕 시설이 아주 좋더구나."

  "이곳에서 푹 쉬시다가 해산도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전쟁의 여파가 이곳까지 번지지 않을까 걱정이구나."

  "전쟁은 한참 북쪽에서 벌어지지 않습니까. 이곳 남쪽 땅끝에 무슨 일이야 생기겠습니까?"

  "그건 모르는 일이야. 이곳이 과연 안전할지 모르겠구나." 


  그녀는 여자의 육감 때문인지 몰라도 상황이 좋지만은 않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부인."

  "서방님." 


  그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도 자연스럽게 스르르 그의 품에 안겼다. 


  "밤새 잘 잤소?"

  "그럼요. 잘 잤다마다요."

  "오면서 얘기하는 것을 들으니, 전쟁 걱정이 많은가 보오."

  "그렇습니다. 전쟁이 쉬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과연 이곳도 안전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배를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너무 걱정 마시오. 날이 밝았으니, 아버님과 장인어른께서 하인들을 보내 소식을 알아보실 것이오."

  "예, 서방님." 


  그는 전날 여수 학살 사건의 전말을 최 씨 영감에게서 전해 들은 뒤로 마음이 불안했지만,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아내와 아기에게까지 자신의 불안함을 보일 수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도 아내와 아기만은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 그렇게 굳게 다짐한 태경이었다. 


  한편, 유 씨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인들에게 명해 전쟁 상황과 주변 소식을 알아보도록 했다. 그러고 나서 두 일가와 최 씨 노인은 아침식사를 함께 했다. 여수에서 나는 돌게장과 갓김치, 각종 싱싱한 해산물들이 산처럼 쌓여 상 위에 올라왔다. 


  "이곳의 돌게장은 별미 중의 별미입니다. 한번 드셔 보시지요." 


  최 씨 노인은 자신과 연배가 비슷한 유 진사에게 음식을 권했다. 


  "고맙소만, 나는 이가 좋지 않아서 게장은 못 먹소."

  "아이고, 그렇습니까. 하인이 게장을 발라 드릴 겁니다. 얘, 대감의 게장 살을 발라 드리거라." 


  유 진사는 하인이 발라주는 게 살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러다 아들 유 씨를 바라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범아, 아무리 내가 노쇠했기로서니 이제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어야겠느냐. 어제 무슨 말들이 오갔는지 나도 알아야겠구나."

  "예, 아버님. 식사가 끝나면 말씀 올리겠습니다."

  "지금 말하거라. 내 듣고 있을 테니." 


  아버지 유 진사의 성화에 아들 유 씨는 하는 수 없이 전날 사랑채에서 오갔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이곳 여수와 순천 등지에서 정부군이 주민을 학살하는 사건이 있었답니다. 수백 명이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여기 최 대감님도 겨우 목숨만 건져 살아났고 말입니다." 


  이야기를 듣더니, 유 진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뭐라고? 왜 그 얘기를 이제 하는 것이냐? 이곳에 있다가 내 명줄만 끊기게 생겼구나. 내 이래서 부산으로 가자고 말하지 않았느냐.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성씨들의 말만 듣더니, 결국 내 이리될 줄 알았다. 아범아, 이제라도 부산으로 가야 한다."

  "아직 상황이 어찌 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 사건은 이미 2년 전에 종결됐고, 며늘아기의 배 속에 아기가 있으니 쉬이 움직이기가 그렇습니다."

  "답답하구나. 이렇게 지체했다가 화가 박두하면 그때 가서야 뉘우칠 것이냐."

  "하인들을 시내로 보내 상황을 알아보고 있으니, 상황을 파악한 뒤에 움직여도 늦지 않을 겁니다."

  "내 너에게 집안의 전권을 일임한 것은 내가 이제 나이도 들었고 네가 그동안 집안 대소사를 잘 맡아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집안사람들의 명운을 너에게 걸기에는 네가 많이 부족한 것 같구나. 전에는 네가 분가한다 하여 네 뜻에 반대하지 않았으나,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이번엔 내 뜻대로 해야겠다. 내 부산으로 피난 가길 원하는 집안사람들만이라도 데리고 갈 것이다."

  "아버님 뜻이 정히 그러시다면 그리 하십시오. 저희 내외와 아들 내외는 이곳에 남겠습니다."

  "아범아, 우리 집안은 3대 독자, 손이 귀한 집안이 아니더냐. 너와 태경이가 부산으로 가지 않는다면 어찌 가문의 대를 잇는다 할 수 있단 말이냐. 그러지 말고 나와 함께 부산으로 가자꾸나."

  "아버님, 저희는 예서 상황을 잘 살펴보았다가 여의치 않으면 부산으로 떠날 것이니 아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유 진사는 유 씨에게 무슨 말을 더하려 했으나, 유 씨가 한 번 내린 결정은 결코 번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내 포기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힘없이 겨우 낸다는 소리가 "그렇다면... 나도 남겠다. 너희들만 이곳에 두고 갈 순 없다."라는 말이었다. 그리고는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터덜터덜 걸어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시간이 흘러 유 진사를 제외한 사람들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한창 하던 중, 시내로 가서 전쟁 소식을 알아보러 갔던 하인 두 사람이 들어와 유 씨와 성 부자에게 보고했다. 


  "여수 시내는 지금 매우 평온합니다. 다들 평소처럼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났다고는 좀처럼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거 보시오. 이곳 여수는 더없이 안전하단 말이오." 


  하인들이 보고하는 말을 듣고서 최 씨 노인이 거들고 나섰다. 


  "자네들, 자세히 알아봤는가?" 


  그러나 유 씨가 두 번 세 번 하인들의 보고를 확인했다. 


  "그럼요. 자세히 알아봤습죠."

  "알겠네. 수고했네. 어서 식사부터 들게." 


  유 씨는 일단 안심하는 듯했다. 수고한 하인들에게 식사를 들도록 하고, 성 부자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제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한동안 예서 짐을 풀고 최 대감께 신세 좀 지겠습니다. 아침의 일은 송구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라도 진사 어르신이었다면 그리 했을 겝니다. 허면 이제 예서 아이들의 혼례를 올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리 하시지요." 


  유 씨와 성 부자는 7월 2일 일요일 정오에 태경과 순자의 혼례를 올리기로 결정했다. 두 집안은 최 씨의 도움을 받아 혼례 준비에 서둘렀다. 태경과 순자도 혼례를 올리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자, 뛸 듯이 기뻐했다. 


  "드디어 우리가 부부가 되는구려."

  "서방님, 혼례를 올릴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곧 부부가 될 두 사람, 태경과 순자는 자신들의 눈앞에 닥칠 미래가 어떤 것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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