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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갈해리 Jul 13. 2022

선비와 폭군(5)

결혼과 위기

  7월 2일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동이 트자마자, 양가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최 씨 노인과 성 부자, 유 씨는 음식상과 혼례상, 손님맞이를 준비했고, 유 씨의 아내 서 씨와 성 부자의 아내 이 씨는 신부 순자의 혼례복과 화장을 담당했다. 순자의 몸종 막례는 순자에게 품이 넓고 화려한 수가 놓인 혼례복을 입히고 순자의 얼굴에 분칠을 했다.
  한편, 태경 역시 파란색의 혼례복을 입고 관모를 쓰고서 혼례식을 보기 위해 몰려든 구경꾼들 앞에 섰다. 최 씨 노인은 자신의 정원 마당에 많은 주민들이 오랜만에 모이자, 저택의 이곳저곳을 소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수 학살 사건이 있은 후로 자신의 저택이 이렇게 분주한 것은 처음이라고 최 씨 노인은 태경에게 말했다.

  "어찌 보면 내가 마을 사람들을 배신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리 와 주니 얼마나 다행인지..."

  최 씨 노인 나름대로 그날의 사건으로 꽤 오랫동안 속앓이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드디어 혼례식이 시작되었다. 태경은 마련된 초례청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인으로부터 나무로 만든 기러기를 받아 들어 전안상에 올려놓고 큰 절을 했다. 집례자가 기러기를 신부 측에 전달하자, 신부 순자가 자신이 대기하고 있던 방에서 초례청으로 나왔다. 곱게 분칠하고 혼례복을 입은 순자의 자태는 선녀가 잠시 지상에 내려온 듯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태경은 넋이 나간 얼굴로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가 하마터면 자신의 혼례복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이윽고 신랑과 신부가 서로 맞절을 하는 교배례가 행해졌다. 신랑 태경의 어머니인 서 씨가 나와 붉은색 초에 불을 켜고, 신부 순자의 어머니 이 씨가 나와 푸른색 초에 불을 켰다. 태경은 혼례 상의 동쪽에 서서 준비해놓은 대야의 물에 손을 씻고, 순자는 서쪽에 서서 마찬가지로 손을 씻었다. 그러고 나서 집례자의 구호에 맞춰 그가 길게 읍하고, 그녀가 그 답례로 길게 읍했다.
  이제 그는 혼례 상의 동쪽에, 그녀는 서쪽에 선 채로 혼례식이 행해졌다. 그녀가 몸종 막례의 부축을 받아 그에게 먼저 세 번 절하고 나서 그가 그녀에게 두 번 절하고 반 절 했다. 다시 한번 그녀가 세 번 절하고 그가 두 번 절하고 반 절 했다. 이러한 교배례 방식은 경기도 화성의 전통혼례 방식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합근 지례."

  집례자(사회자)가 외치자, 순자의 몸종 막례가 표주박에 술을 떠서 순자에게 주었다. 그녀는 표주박에 살짝 입만 대고 태경의 하인에게 잔을 넘겼고, 하인은 태경에게 표주박 잔을 주었다. 태경은 잔에 든 술을 모두 마셨다. 이번에는 태경 측 하인이 술을 떠서 태경에게 넘겼다. 태경은 입만 살짝 대고 막례에게 잔을 넘겼고, 막례는 순자에게 잔을 전달했다. 순자는 살짝 입만 대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합환주라 해서 청실과 홍실을 달아놓은 표주박 두 개를 교차해 잔을 교환하는 것이었다. 태경이 청실을 달아놓은 표주박을 순자에게 건네고, 순자가 홍실을 달아놓은 표주박을 태경에게 건네어 그 안에 든 술을 마시면 되었다.
  태경이 먼저 표주박을 순자에게 건네는데, 순자가 태경의 표주박을 받으면서 동시에 자기 표주박을 건네 주려다 보니, 그만 청실과 홍실이 엉켜 버리고 말았다. 실들은 단단히 엉켜버려 도저히 어찌 풀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래도 엉킨 대로 술은 마셔야 했다. 태경과 순자는 마주 보면서 술을 마시지 못하고 실이 묶인 한 방향을 바라보며 함께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한편에서 지켜보고 있던 순복은 실이 엉킨 것을 바라보더니, "거 보니, 혼인 생활이 순탄치는 않겠구먼." 하고 혀를 끌끌 차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혼례식이 끝나고 태경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아버지 유 씨와 함께 신부 측 어른들이 기다리고 있는 손님방으로 들어갔다. 태경은 유 진사, 유 씨, 성 부자 등의 어른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순복은 태경에게 단단히 화가 났는지 자리에 함께 하지 않았다. 태경은 거나하게 술이 취할 때까지 마시다가 해가 저물자, 신부가 기다리고 있을 신방으로 향했다. 태경은 신발을 벗고 신방으로 들어갔다. 신부 순자는 족두리를 쓰고 혼례복을 입은 채 방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방 안은 촛불 하나 켜져 있었는데, 그렇게 밝지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신부의 얼굴이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잘 보이지 않았다. 태경은 순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순자의 족두리를 풀러 주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순자의 옷고름을 천천히 풀었다. 순자의 하얀 속살이 드러났고, 태경은 자신의 옷을 벗고 순자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입으로 촛불을 불어 꺼뜨렸다. 밖에 사람들이 있었는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이제 지켜보던 사람들 다 갔소."
  "서방님, 이제 정말 저의 서방님이 되셨네요."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 모르겠소."
  "서방님."
  "부인."

  태경은 순자를 품에 안고 이부자리에 누웠다. 그들은 처음 물레방앗간에서 만났을 때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을 맹세한 것처럼 그렇게 꼭 껴안고 행복한 신혼 첫날밤을 보냈다.

  그날 이후, 태경과 순자는 최 씨 노인의 집에서 달콤한 신혼 생활을 보냈다. 유 씨와 성 부자도 전쟁이라는 위험을 이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곳은 전쟁이 벌어지기에는 너무나 남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순복은 혼례식에 잠시 참석한 뒤로, 집안 어른들이나 태경의 눈에 비치지 않았다. 마치 피해 다니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로부터 3주가 지난 7월 23일, 자리에서 일어난 태경은 기지개를 켜고 여느 때처럼 제일 먼저 순자를 찾았다. 그러나 순자는 방에 없었다. 아마도 양가 어머니들을 도우러 아침 일찍 주방으로 간 모양이었다. 태경은 옷을 차려입고 정원으로 나왔다. 아버지 유 씨와 장인 성 부자가 정원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버님, 장인어른,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오냐. 너는 잘 잤느냐?"
  "그래, 자네는 잘 잤나?"
  "예, 잘 잤습니다."

  세 사람은 아침 인사를 하고,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양가 어머니와 순자, 하인들이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부인, 너무 무리하지 마시오."
  "얘, 벌써부터 아내 편을 드는 거니?"
  "아닙니다, 어머님. 순자는 임신한 몸이지 않습니까?"
  "얘, 나도 하지 말라 했다. 그런데도 며늘아기가 이리 돕고 싶다지 않니. 네가 좀 말려 보거라."
  "예. 부인, 이리 와 내 옆에 앉으시오. 아직 무리하면 안 되오."
  "알겠습니다, 서방님."

  순자는 막례의 부축을 받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탕탕탕.

  그때, 누군가 밖에서 쇠붙이로 대문을 탕탕탕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탕탕탕.

  최 씨 노인의 집사가 대문으로 나가 살짝 열고 보니, 총칼을 든 무장군인들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군인들의 대열 맨 앞에 선 장교가 집사의 어깨를 밀치고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나머지 군인들도 그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왔다. 정원을 지나 -무도한 발길에 장미 덩굴들이 밟히고 있었다- 식당 앞으로 들어온 장교가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수 정부군이오. 수색에 협조해 주기 바라겠소."

  그러더니, 무장군인들이 최 씨 노인의 집에 들어가 이쪽저쪽 물건을 찾는 건지, 사람을 찾는 건지 무엇을 찾기 시작했다. 최 씨 노인 이하 하인들은 집안 물건들이 내팽개쳐지는 광경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안타까워했다.

  "이게 무슨..."
  "여기 이 집에 빨갱이 활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해서 왔는데..."
  "아니, 그럴 리가 없소. 빨갱이는 한 사람도 못 봤단 말이요..."
  "그거야 뒤져 보면 알지."

  그때, 손님방 한쪽을 뒤지고 있던 군인이 장교에게 다가와서 손에 든 무언가를 건넸다.

  "이것 보십시오."

  장교는 붓으로 글씨를 적은 천을 군인으로부터 건네받았다. 글씨를 흘려 써서 뭐라고 적었는지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는데, 사방으로 동그랗게 돌려 적어 마치 사발통문처럼 보였다. 장교는 전에도 이것을 본 적이 있었는지 보면서 대뜸 하는 말이, "이거 사발통문이구먼."이었다.

  "이 방이 누구 방이요?"
  "성순복이란 사람의 방입니다."
  "성순복? 그 사람 어딨소?"
  "여기 없습니다. 며칠째 보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찾아야 되겠구먼. 그 사람 찾기 전까지 다들 예서 꼼짝도 못 할 줄 알라고!"

  말을 마치자, 장교는 군인들을 최 씨 노인의 집 안에 2명을 배치시키고, 대문을 통해 집을 빠져나갔다. 군인 2명은 각각 대문 양쪽에 자리를 잡고 섰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그래?"

  최 씨 노인은 놀라서 성 부자에게 물었다. 성 부자도 얼굴이 노래져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자네 조카,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니는 겐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어르신."
  "아이고..."

  최 씨는 무슨 말을 하려다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그는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성 부자는 유 씨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것 저희 조카 때문에 실례가 많습니다, 사돈."
  "무슨 일인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 그저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때, 태경이 성 부자에게 다가와 조용히 얘기했다.

  "혹시 순복 매형이 빨치산 활동을 한 것은 아닐까요?"

  성 부자는 그 말을 듣자, 깜짝 놀라며 손을 저으면서 얘기했다.

  "그럴 리가... 순복이가 뭐가 아쉬워서 빨치산 활동을 한단 말인가?"
  "그거야 모르지요. 부모의 행적을 알고 싶어 남로당에 지원한 게 아닐까요? 사발통문도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큰일일세. 우리 집안은 순복이 하나 때문에 망하게 생겼네그려."
  "일단 순복 매형이 오면 사실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을 확인하고,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순복 매형의 결백을 증명하면 될 것이고, 사실이라면 장교와 나머지 군인들이 오기 전에 이 집을 당장 떠나야 합니다."
  "아닐세. 저들이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를 믿어주겠는가? 사발통문을 증거 삼아 순복이와 우리들을 모두 죽이려 할 걸세."

  그때, 아버지 유 씨가 태경과 성 부자가 하는 말을 듣고 놀라서 얘기했다.

  "내 언젠가 그 순복 사돈 조카가 큰 일을 낼 줄 알았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내가 그리 이르지 않았느냐?"
  "아버님, 일단 일이 급하니, 이 집에 배치된 군인 두 명을 자는 틈에 묶어두고 어서 도망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산까지 가는 배만 타면 저들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허나 새 아가가 임신 4개월째 접어들지 않았느냐. 무거운 몸으로 어떻게 피신한단 말이냐?"
  "제가 잘 데려가 보겠습니다. 아버님, 어서 할아버님과 집안사람들에게 전달해 주십시오."
  "그래, 알았다. 내 너만 믿겠다."
  "예, 아버님."

  아버지 유 씨는 유 진사 이하 일가친척들을 만나러 가고, 남은 태경과 성 부자는 순복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방은 군인들이 뒤져서 이것저것 물건들이 빠져나와 있었다.
  그때, 순복이 밖에서 무슨 볼일을 보고 돌아왔는지, 옷에 잔뜩 흙과 잎사귀가 묻은 채로 담을 넘어 자신의 방으로 몰래 들어왔다. 태경과 성 부자는 순복의 물건을 정리하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가 순복이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자, 대문에 서 있는 군인들이 보지 못하게끔 그를 옷장 안으로 숨겼다. 그리고 태경은 미닫이문에 구멍을 뚫고 대문 쪽의 군인들을 살펴보았다.

  "순복아,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니기에 무장한 군인들이 집으로 찾아오는 것이냐?"
  "그것이..."

  순복은 옷장 안에 쭈그리고 앉은 채로 말을 더듬거리며 이어나갔다.

  "그것이... 이곳 여수에서부터 지리산 근처까지 빨치산 활동이 일어났다기에 이번 차에 저희 부모님 살아계실 적 행적을 조사해 보려고 돌아다녔습니다. 빨치산을 만나려면 산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들과 접선하려고 산으로 들어갔지요. 그걸 누가 보고 신고를 한 모양입니다."
  "왜 죽을 자리에 들어가지 그러느냐? 왜 오해받기 쉬운 짓을 하느냔 말이야!"
  "그것이... 부모님이 어찌 돌아가셨는지 알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왜?"
  "억울하게 돌아가신 거라면..."
  "왜? 만약 네 부모님이 남로당에서 활동을 했다가 정부군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면, 너까지 빨치산이 되려고? 사발통문은 어찌 된 것이냐? 정말 그들과 함께 하기로 한 것이야?"

  순복은 아무 말이 없었다. 태경은 성 부자와 순복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대문 쪽을 살펴보고 있었는데, 다행히 군인 두 명은 대문에 계속 서 있었고, 이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성 부자는 가만히 순복을 바라보고 있다가 조금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순복아, 내가 너를 양자로 삼지 않은 것에 아직도 화가 난 것이냐?"

  순복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순복은 잠깐 성 부자를 쳐다보기는 했다. 아무래도 그 일로 앙심을 품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순복아, 왜 그러는 게야? 이 숙부가 너를 얼마나 중하게 생각하는지 모르는 것이냐?"

  잠깐 동안, 아주 잠시였지만, 순복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동공이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됐습니다! 이제 그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순복은 눈물을 훔치고 옷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성 부자를 밀치고 미닫이 문으로 달려 나갔다. 태경이 순복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순복 매형, 이러시면 안 됩니다!"
  "넌 저리 꺼져!"

  순복은 끝내 태경의 손을 뿌리치고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는 담장을 넘어 홀연히 사라졌다.

  "이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저 군인들에게 약을 먹여 재우고, 그 사이에 꽁꽁 묶어둬야겠네. 그리고 남은 식솔들을 모두 데리고 부산으로 가야지."
  "순자의 몸종 막례에게 밥에 약을 타도록 시키겠습니다."
  "그래."

  성 부자는 성 부자대로, 태경은 태경대로 각자 집안 식솔들을 챙기느라고 분주했다. 그들은 과연 여수에서 탈출해 부산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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