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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갈해리 Jul 28. 2022

선비와 폭군(6)

여수에서의 탈출

  "이것 좀 드셔 보시지요."


  대문을 지키고 서 있는 군인 2명에게 막례가 다가왔다. 막례는 밥과 반찬을 차린 밥상을 들고 있었다. 밥은 고슬고슬 윤기가 났고, 반찬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 만한 나물과 돌게장이 올라와 있었다. 군인들은 보초를 서고 있다가 마침 밥상이 오니, 허기가 진 듯 배를 쓰다듬었다.


  "시장하실까 하여 가져왔습니다."  

  "마침 배가 고픈 참인데, 잘 됐네. 그런데 여기다 약 탄 건 아니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더운 여름날 이렇게 고생들 하시니, 밥상을 차려온 것입니다요."


  군인들은 막례가 밥상을 바닥에 놓자마자, 자리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장했는지 앉은자리에서 밥과 반찬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아, 잘 먹었다. 거 참 밥이 맛나네."

  "그러게나 말이야. 특히 돌게장은 별미였어."


  그들은 배가 불렀는지 뽈록 튀어나온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막례는 그들이 먹어 치운 밥상을 정리하려 상을 들고일어나려 했다. 그때 갑자기 군인 두 명 중 한 사람이 뒤에서 막례를 잡았다.


  "거 참 예쁘게도 생겼네. 어디 한 번 좀 볼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안 될 게 뭐 있어? 우리는 정부군이야. 우리한테 누가 뭐라 할 건데?"

  "아이 참..."


  그는 막례의 어깨에 손을 얹기도 하고, 허리에 손을 두르기도 했다.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순자는 입술을 꼭 깨물고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서방님, 저 치들이 너무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약 효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소. 조금만 기다려 봅시다."

  "......"


  순자는 분통이 터졌지만, 남편 태경의 계략이 성공하도록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가슴도 봉긋하게 나왔네?"

  "아이, 이러지 마셔요."


  그들은 이제 막례의 가슴이며, 엉덩이를 만지기 시작했다. 막례가 난처해하는 표정이 멀리서도 보이는 듯했다. 태경과 순자는 막례가 희롱당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으나, 그렇게 해서라도 이곳을 탈출해야 했기에 어쩔 도리 없이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한 5분쯤 그랬을까. 그들은 갑자기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이거 왜 이렇게 졸리지?"

  "그러게 말이야. 견디기 힘들구먼."


  그들은 이내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서 쿨쿨 잠에 빠졌다. 막례는 그들 가까이 다가가 잠을 자는 것이 확실한지 확인했다. 그리고 태경과 순자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지금이다!"


  태경과 하인들은 굵은 밧줄을 가지고 나와 바닥에 쓰러져 자고 있는 군인들을 묶기 시작했다. 행여나 이들이 깰까 봐 조심조심하면서 밧줄을 둘렀다. 밧줄을 다 묶자, 자고 있는 그들을 떠 매어 창고에 가두고 문을 잠가 버렸다.


  "자, 이제 행장을 차리자! 서둘러라!"


  집안의 모든 하인들이 세간 살림을 추려서 수레에 실었다. 유 진사, 유 씨, 성 부자, 서 씨, 이 씨 등 모든 일가친척들이 모였다.


  "이제 조금 있으면 해가 집니다. 해가 지기 전에 여수를 빠져나가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타야겠습니다."

  "최 대감이 아직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이 최 대감을 곱게 둘 리가 없다."

  "그래. 내 예전에 생사의 기로에 놓였을 때, 최 대감님이 아니었다면 살아날 수 없었을 걸세. 최 대감을 이대로 놔두고 갈 수는 없네, 유 서방."

  "알겠습니다, 장인어른. 그렇다면 최 대감님을 다른 수레에 모시고 가는 게 좋겠습니다."

  "고맙네, 유 서방."


  하인들이 기절한 최 씨 노인을 들어 담요가 깔린 수레에 눕혔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짐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이제 부산으로 떠나기만 하면 되었다.


  "배편은 어떻게 됐나?"

  "미리 집사를 여수항으로 보냈습니다. 어부들에게 부탁해 어선을 빌려 갈 것입니다."

  "이곳에서 여수항으로 가는 길이 문제겠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서둘러 간다면 문제없을 것입니다."


  태경과 식솔들은 각자 짐을 들고, 이고, 수레에 싣고 여수항으로 길을 떠났다. 유 진사, 최 씨 노인, 순자와 같은 노약자들이 있어 나아가는 속도는 더뎠지만, 그래도 여수항까지는 10리도 채 안 되는 거리였기에 충분히 갈 수 있었다.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저 멀리 해안선이 보이고, 항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항구에는 수많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었다. 이제 저 어선들 중 하나에 올라타서 부산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항구 근처에 군인들 대여섯 명이 지키고 서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항구 앞에 군인들이 지키고 있구나. 이를 어쩌면 좋겠는가?"

  "저들은 최 씨 노인 집에 왔던 군인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일단 항구까지 가서 군인들과 얘기해보고, 집사와 접촉해야겠습니다."

  "그러세."


  모든 식솔들은 태경과 성 부자의 인솔 하에 항구에 도착했다. 그때, 항구 앞에 지키서 있던 군인들 중 하나가 그들을 막아서더니, 대뜸 물었다.


  "어디로 가시는 거요?"


  성 부자가 군인에게 "아이고, 수고하십니다."하고 인사하면서 말했다.


  "전쟁이 터졌다기에 부산 친척네로 가는 길입니다."

  "그렇소? 아직 여수가 이렇게 안전한데도 말이오?"

  "전황이 언제 변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도 대통령 각하께서 계신 부산은 안전할까 해서 갑니다."

  "하긴... 대통령 각하께서 계신 곳은 안전하겠지. 잘 가시오."

  "예."


  성 부자가 식솔들에게 손짓을 하자, 다들 성 부자를 따라갔다. 그때, 성 부자의 집사가 어선 하나에서 내려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어부 한 사람이 집사를 따라왔다.


  "이 사람이 부산까지 우리를 데려다줄 것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내가 작은 어선을 가지고 있는데, 20명 정도면 충분히 탈 수 있소."

  "잘 부탁드리오."

  "돈을 넉넉히 주셨으니, 안전하게 모셔다 드리겠소."


  어부는 식솔들을 자신의 배로 안내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배에 올라탔다. 순자는 막례의 부축을 받으며 배의 갑판에 올라탔다. 최 씨 노인까지 들것에 태워 오르고 나서야 태경과 성 부자는 안심하고 배에 오르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총을 든 군인들 대여섯 명이 항구로 달려오면서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아마도 최 씨 노인의 집에서 태경 일행이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오는 모양이었다.


  "저 자들을 잡아라! 빨갱이들이다!"


  아까 태경 일행들을 순순히 보내줬던 군인들은 그 소리를 듣자, 총을 들고 태경 일행이 탄 배로 달려왔다.


  "이보시오! 잠시만!"


  "선장 양반, 어서 갑시다!"

  

  태경과 성 부자는 서둘러 배에 올랐다. 성 부자의 재촉을 들은 어부가 재빨리 배의 시동을 켜자, 배는 수면 위로 물거품을 내면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총을 쏴! 어서!"


  뒤에서 군인들이 배를 향해, 일행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모두 엎드려라!"


  성 부자가 배에 탄 식솔들에게 소리쳤다. 식솔들은 저마다 배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그때, 총이 발사되는 소리가 났다.


  "탕!"

  "윽!"


  누군가 총에 맞은 듯했다. 그러나 바로 총소리가 연달아 나면서 다들 바닥에 붙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가 총에 맞았는지 볼 수가 없었다.

  배는 다행히 여수 해안을 벗어나고 있었다. 배가 점점 해안에서 멀어지자, 일행들은 일어나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누가 총에 맞았는지 알아보려 한 것이다.


  "아버지!"

  "영감!"


  순자와 부인 이 씨가 다리에 총을 맞은 성 부자를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태경도 왼쪽 다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장인 성 부자에게 다가왔다.


  "장인어른!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네. 다른 사람들은 다친 곳이 없는가?"

  "예, 장인어른 외에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집사, 이리 와서 장인어른 치료 좀 해 주게."

  "예."


  집사가 다가와 성 부자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집사는 천으로 성 부자의 다리를 단단히 감싸서 피를 멈추게 했다.


  "일단 지혈하기만 했습니다. 지금 급히 여수를 빠져나오느라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약재가 없습니다. 부산에 가야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산까지 버텨 봐야지."

  "장인어른, 괜찮으시겠습니까? 상처가 심한데..."

  "내 장돌뱅이 시절에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일세. 이만한 상처는 아무것도 아닐세. 괜찮아."


  태경은 머슴들에게 부상을 입은 성 부자를 선실로 옮겨서 눕도록 시켰다. 순자와 이 씨는 선실로 따라 들어가 성 부자를 돌보았다.


 태경은 갑판에 올라 여수의 바다를 바라봤다. 해안선 너머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붉은 해가 타들어가면서 바다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낙조.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언제까지 이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볼 수 있을까. 전쟁이 참으로 야속했다. 그런데 순복은 어떻게 된 것일까. 빨치산 활동을 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안전하기는 한 것일까. 그의 신변이 걱정되는 태경이었다. 처남 매부 지간에 몸싸움까지 할 정도로 척을 지긴 했어도 원래 태경은 그에게 원한이 없었다. 물론 그가 그의 가족들에게 끼친 악영향을 생각하면 괘씸하기도 했으나, 어쩌겠는가. 자식으로서 돌아가신 부모의 행적을 알고 싶었다고 하는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신의 뿌리를 찾는 것은 서사의 단골 소재였다. 그런 서사들은 인간의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삶 속에서 자신의 뿌리를 그리워하고, 뿌리를 찾아 나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한편으로, 또 하나 걱정되는 것은 그의 행적이 우리들에게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이승만 정권은 아마도 빨갱이들에 대해서 신경을 곤두세울 것만 같았다. 반공 정책을 더 펴면서 남한에 남아 있는 빨갱이들을 전부 도륙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순복의 행동이 부디 우리 가족, 특히 순자와 아이에게 악영향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태경과 식솔들이 탄 배는 물살을 가르며, 망망대해로 접어들었다. 해가 지고 날은 어두워져 배의 불빛 외에는 주위가 모두 칠흑 같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그들이 타고 있는 배를 사로잡을 듯이 수면 위로 안개가 자욱했다. 그때, 아버지 유 씨가 태경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오늘 날씨가 그다지 좋지는 않은 것 같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안개가 자욱해서 암초라도 부딪치게 되면 큰일이겠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선장이 해안가를 따라서 운항하고 있으니, 큰 탈은 없을 것입니다."

  "사돈이 총상을 입었으니, 큰일이 아니냐. 부산에 도착해 바로 병원부터 가서 치료를 받아야겠구나."

  "그래야 할 듯합니다."

  "그런데 여수에서도 빨갱이를 색출한다 했는데, 부산에서도 그러지 않을까 걱정이구나."

  "일단 가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전쟁통이라 안전한 곳은 부산밖에 없습니다."

  "부산에 가도 걱정, 가지 않아도 걱정이구나."

  "......"


  태경은 아버지 유 씨의 걱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현재 남과 북으로 나뉘어서 전쟁을 하고 있지만, 남쪽 내에서도 빨갱이들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빨갱이들과 전쟁을 한답시고 선량한 민간인까지 무고하게 잡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여수에서 빨갱이로 몰린 태경 일행은 부산에서는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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