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랙 아티스트 P 이야기 -1-
P의 은밀한 상처
P는 요즘 이태원에서 가장 핫한 드랙 아티스트였다. P는 오늘도 드랙 쇼 준비를 위해 무대 뒤편 분장실 화장대에 앉아 화장을 했다. 얼굴 가득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아이쉐도우로 눈 주위에 그림 그리듯 크게 아이라인을 그렸다. 기다란 속눈썹을 붙이고, 두툼하게 립스틱을 바르고 화려하게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고 긴 웨이브 진 가발을 썼다.
"아, 오늘도 예뻐!"
P가 거울을 보면서 분장한 자신의 외모에 만족하고 있을 때, 분장실 안으로 선배 나타샤가 들어왔다.
"얘, 벌써 손님들 왔어. 빨리 준비해!"
"알았어요, 언니. 닦달하지 마요."
나타샤의 재촉에 잠깐 기분이 상했지만, 오늘은 최고의 컨디션이었다.
"자, 그럼 오늘의 쇼를 해볼까?"
분장실을 나와 무대 쪽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어 바라보니, 오늘도 객석이 가득 찼다. 오늘도 다들 나의 쇼를 보러 왔구나. 그럼 내가 또 그에 응해 줘야지. 노랫소리가 들리자, P는 무대 뒤편에서 자세를 잡고 무대로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객석 가득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의 노래는 위대한 쇼맨의 OST인 'This is me'. 이 노래는 좀 더 저항적으로, 힘 있게 팔을 뻗어 움직여 줘야 해. P는 좀 더 역동적으로 팔과 다리를 써서 성소수자들의 저항을 표현했다. This is me 노래가 나오자, 사람들은 저마다 일어나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오늘의 쇼는 성공적이었다. 잘했어, P.
12시 공연, 2시 두 번의 공연을 마치고 새벽 4시가 넘은 시간, 화장을 지우고 드랙퀸 동료들과 함께 해장국 집으로 가서 감자탕으로 이른 아침을 먹었다. 다들 공연하느라 배가 고파 정신없이 감자탕을 먹었다. 그때, 사장 데이빗이 P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오늘도 P의 쇼 덕분에 우리 가게 매상이 올랐지 뭐야."
"당연하죠. 제가 없음 어디 이 TREND 바가 살아남았겠어요?"
"그럼, 그럼. 고마워."
"오빠, 한 잔 받으세요."
P는 데이빗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데이빗은 TREND 바의 사장이었다. P가 지방에서 드랙퀸이 되겠다고 서울로 왔을 때부터 데이빗은 그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 P가 드랙퀸으로 성공한 데에는 데이빗의 역할이 가장 컸다. 그런 데이빗을 P는 좋아하고 있었다. 알랭 드롱 같은 외모에, 슬림하면서도 선명한 근육, 패션 센스도 있어 누구나 좋아할 만한 데이빗이었다. 데이빗이 이태원 거리를 지나다닐 때마다 연예기획사에서 나온 직원들에게 길거리 캐스팅되기 일쑤였지만, 모두 정중하게 거절하곤 했다. 연예인이 되면 어떻겠냐는 주변의 권유에도 자신은 가게의 드랙퀸들을 전적으로 지원하겠다고만 말했다.
"그럼 오빠는 뭐가 하고 싶은 거예요?"
"나는 한국의 드랙 쇼를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 그게 내 꿈이야."
"그럼 내가 그 소원을 들어드려야겠네."
"그래. P, 네가 내 소원을 들어줘."
"알겠어요. 오빠."
P는 데이빗의 가슴에 기대었다. 그의 넓은 가슴에 기대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져 왔다. 남자 친구가 있다면 이랬을까. 점점 더 데이빗에게 끌리는 P였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굴어볼까. P는 데이빗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데이빗도 풀지 않는 것을 보니, 싫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 해장국 집에서 소주 각 1병을 마신 P와 데이빗은 다른 동료들과 헤어져 이태원의 한 호텔로 향했다.
호텔방에 도착하자마자 데이빗과 P는 격렬한 입맞춤을 했다. 입에서 입으로 혀가 옮겨갔고, 데이빗의 손이 P의 몸을 탐했다. 그러다 데이빗이 P의 바지를 내리려 하자, P가 갑자기 불에 덴 사람처럼 데이빗을 밀쳐냈다. 영문을 모른 채 바닥으로 나뒹군 데이빗은 일어나 P에게 다가갔다.
"P, 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데이빗이 인상을 찌푸리자, P는 우물쭈물거리다 말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요."
"왜... 내가 마음에 안 들어?"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진도가 너무 빠른 것 같아서요."
"그렇구나. 알았어."
데이빗은 P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P는 데이빗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그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두근거리는 그의 심장소리에 P는 다시금 마음이 평온해졌다. 두 사람은 호텔방의 침대에 누워 아침부터 오후까지 하루의 반나절을 함께 보냈다.
"야, P. 너 왜 자꾸 데이빗 오빠한테 작업 거니?"
다음 날, P가 TREND 바에 출근해 분장실에서 화장을 하고 있을 때, 뒤에서 선배 나타샤가 다가와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네 쇼가 인기 많다고 오빠를 독차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니?"
옆에서 화장을 하고 있던 또 다른 선배 지니도 나타샤의 말에 거들었다. P는 선배들의 공격에 당할 만큼 멘탈이 약하지 않았다. P도 대거리를 했다.
"그럼 데이빗 오빠가 언니들 거라도 되는 것 같아요? 어제 데이빗 오빠랑 내가 뭘 했는 줄이나 알아요?"
P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더니, 왼손 검지를 원 안으로 집어넣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아니, 이 년이?"
뒤에 있던 나타샤가 P의 머리채를 잡고 달려들자, 옆에 있던 지니도 P의 팔을 붙잡았다.
"아악! 이 년들이?"
P는 둘에게서 벗어나려 용을 써봤지만, 혼자서 두 사람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머리에 쓰고 있던 가발이 벗겨지고, 나타샤와 지니의 발에 짓밟혔다.
"너 어디 혼 좀 나 봐라."
지니가 P를 붙잡고 있는 사이, 나타샤가 손으로 P의 뺨을 강하게 연속으로 세 번 쳤다. 그러자, P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타샤가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분장실을 나가자, 지니가 나타샤를 따라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자, P는 분장실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의 얼굴에 상처가 나지는 않았는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다행히 상처 없이 볼만 빨개진 것을 보자, P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바닥에 버려져 있던 가발을 주웠다.
"저것들... 두고 봐라. 용서하지 않을 거야."
P의 눈에서는 분노에 가득 찬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P는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기필코 복수해 주겠노라고.
P의 공연은 언제나 그렇듯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고, 그때마다 객석은 꽉 들어찼고, 표는 불티나게 팔렸다. 사장인 데이빗은 만석이 된 것에 크게 기뻐했고, 여전히 P를 아꼈다. 그럴수록 선배 드랙퀸들의 질투는 커져만 갔다. 날이 갈수록 그들의 횡포는 심해졌는데, 하루는 P의 의상이 찢어진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것을 P 본인이 발견한 것이다. P는 곧바로 이 사실을 데이빗에게 알렸다.
"누가 내 옷을 찢어놨어요!"
"그럴 리가..."
"이것 봐요!"
데이빗 앞에 누더기가 된 자신의 의상을 보여주었다. 순간, 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화가 난 그는 곧 모든 드랙퀸들과 종업원들을 불러 모았다.
"도대체 누가 P의 옷을 찢어 놓은 거야?"
"......"
"그럼 나올 때까지 너희들 공연은 취소한다. 그래도 되겠지?"
"아니, 그건 너무한 거 아녜요?"
나타샤가 한쪽 벽에 다리를 꼰 채로 기대고 서 있다가 데이빗의 말에 반박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럼 누가 옷을 찢었는지 말해!"
"... 제가 그랬어요......"
나타샤가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는 듯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사장님이 P만 좋아하잖아요! 우리는 언제 따로 챙겨준 적이나 있어요?"
"......."
"사장님은 쇼 건수만 들어오면 제일 먼저 P부터 찾잖아요. 그리고 P한테만 메인 시간에 편성해주고, 우리는 손님도 별로 없는 저녁 시간대에 편성하잖아요. 노래도, 의상도, 소품도 다 P를 위한 것뿐이에요. 예전에 들어온 우리는 이제 늙었다 이거예요?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 그래. 그건 내가 미안하다. 그렇지만 P가 실력이 뛰어난 건 너희도 인정하는 거 아니었어?"
"저희가 오히려 쇼 경력은 더 많아요. P가 기교가 좋다고 우리가 수년 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따라잡을 순 없다고요!"
"그래, 좋아. 나타샤, 네가 그렇게 얘기한다면 드랙퀸 경연대회를 여는 게 어때? 둘이서 음악에 맞춰 드랙 쇼를 하고 관객들에게 평가를 받는 거야. 누가 더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어때? 그러면 승복하겠어?"
"좋아요! 제가 반드시 이길 거예요!"
"너희들도 나타샤와 P의 드랙퀸 경연을 잘 봐 둬. 누가 더 잘하는지 너희도 투표하는 거야. 알았어?"
"네."
데이빗이 사무실로 가 버리고 나자, 나타샤가 P에게 다가와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네 년이 하면 얼마나 하겠어? 내 관록을 따라올 수나 있을까 모르겠다?"
"언니야말로 저한테 발릴 준비나 하시죠? 쇼하다 허리 나가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이 년이 끝까지 말대답이지. 두고 봐, 어디. 누가 이기나."
"그래요. 흥."
"흥."
나타샤와 지니, 다른 드랙퀸들은 무대 뒤편 분장실로 들어가 버리고, P만 혼자 남았다. P는 비록 혼자였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P에게는 든든한 백이자, 연인인 데이빗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P는 데이빗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데이빗은 팔짱을 끼고 블라인드 사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P가 들어오자 인상을 찡그렸다. P는 그것이 비치는 햇살에 눈살을 찌푸린 것이라 생각했다.
"데이빗..."
"도대체 무슨 분란을 만들고 다니는 거야?"
"데이빗?"
데이빗이 자신에게 갑자기 화를 내자, P는 순간 당황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순 없는 거야? 왜 드랙퀸들은 서로를 질투하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들이지?"
"그거야 언니들이 지나치게 질투하니까 그렇죠... 데이빗, 당신을 못 차지하니까."
데이빗은 그제야 인상 찌푸리던 얼굴을 피면서 허허 하고 웃었다.
"나를?"
"네. 당신을요."
"참... 이 놈의 인기는 어쩔 수 없군."
손바닥으로 이마를 어루만지는 데이빗. 그 모습을 보면서 정말 알랭 드롱을 닮았다고 생각하고 P였다. P는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남자를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실력으로 선배들에게 제대로 복수해주겠다고도 다짐했다.
P는 따로 춤 연습실을 빌려 춤 연습을 시작했다. 벽면 전체가 거울인 연습실에서 비욘세의 'Crazy in Love'에 맞춰 춤 연습을 했다. 비록 비욘세의 노래와 춤이었지만, P는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좀 더 담아내려고 애썼다. 그렇게 3시간을 내리 립싱크를 하면서 춤을 춘 P는 녹초가 되어 자신이 사는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구두를 벗고 들어온 P는 제일 먼저 자신의 방에 있는 화장대로 달려갔다. P는 가발을 벗어 머리만 있는 마네킹 위에 얹어 놓고, 긴 속눈썹을 떼어내 작은 플라스틱 상자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나서 인조 손톱을 떼어내고, 눈에 넣은 서클렌즈를 뺐다. 이제 화장을 지울 일만 남았다. 화장솜에 리무버를 적셔 얼굴 전체를 훑었다. 리무버를 적신 화장솜이 얼굴에 닿을 때마다 짙한 갈색이 화장솜에 묻어 나왔다. 그렇게 얼굴 전체에 묻은 화장을 다 지운 P는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에는 마른 남성의 얼굴을 한 P가 있었다. 화장을 지운 P의 얼굴은 그다지 특징이 없는 밋밋한 모습이었다. 코도 높지도 낮지도 않고, 쌍꺼풀도 없었으며, 광대뼈는 앙상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하..."
거울을 바라본 P는 한숨을 내쉬었다. P가 제일 싫어하는 자신의 맨얼굴. P는 자신이 이런 모습으로 태어난 것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여자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어렸을 때 돈을 모아서 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가 되려고 했었다. 그러나 모은 돈을 사기 맞아 다 잃어버리고, 단돈 30만 원을 들고 서울로 상경해 고시원, 모텔 등을 전전하다가 이태원의 TREND 바에 찾아갔을 때, 선배 드랙퀸들이 공연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드랙퀸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관객들 앞에서 자신의 혼을 담아 표현하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다. 공연을 한참 관람하고 있을 때, 키가 크고 비율 좋은 남자가 자신의 테이블에 앉았다.
"우리 아가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공연을 하고 싶어서요..."
"그래? 그럼 도와줄게. 배워나갈 수 있지?"
"네!"
사장 데이빗은 아티스트가 되겠다는 소망을 품고 있던 P의 마음을 가장 먼저 알아준 사람이었다. P에게 있어 데이빗은 은인이자, 첫사랑이었다. 데이빗의 기대에 목말랐던 P는 더 열심히 드랙 쇼를 배웠다. 최고참인 나타샤와 지니에게서 온갖 욕을 들어가면서도 자신의 꿈과 데이빗만 바라보며 여기까지 달려왔다. 이제야 자신의 꿈이 이뤄져 나가고 있는데, 그 고약한 나타샤에게 질 수는 없었다. 이제 20대 중반이 된 파릇파릇한 P가 30대 초반이 된 노련한 나타샤에게 이길 수 있는 것은 체력과 감수성이었다. P는 자신의 장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곡한 것이 바로 비욘세의 'Crazy in Love'였던 것이다. 쉴 새 없이 허리와 골반을 이용해서 춤을 춰야 하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굉장히 힘들지만, 그것은 나타샤가 따라올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반드시 미친 사랑의 힘으로 이겨 주겠어.
드디어 경연 날의 밤이 다가왔다. 오피스텔에서 TREND 바로 향한 P는 곧바로 분장실로 들어왔다. 분장실에는 이미 나타샤와 지니, 그리고 티파니가 있었다. 세 사람이 단체로 몸에 딱 붙는 레깅스 같은 의상을 입고 있었다.
"어머, 셋이서 싱글 레이디라도 하시려나 보죠?"
그러자, 뜨끔했다는 듯이 나타샤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러는 너는 루즈한 티셔츠에, 청바지 의상인 걸 보니, 힙합이라도 준비했니?"
"아뇨. 그럴 리가요. 저도 비욘세예요!"
"그래? 비욘세끼리 대결이네? 어디 한 번 해 보렴. 어차피 나한테 발릴 테지만. 호호."
"그럴까요? 언니가 발릴 준비나 하시죠. 호호."
P와 나타샤는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그것은 한 마리의 표범과 하이에나가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그때, 분장실의 문을 열고 사장 데이빗이 들어와 경연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오늘의 경연자인 P와 나타샤. 관객들에게는 이미 투표한다고 얘기해 뒀어. 다들 경연을 한다고 하니까 환호성을 지르던데. 다들 최선을 다해 보라고."
"네. 오빠."
"그럼요. 오빠."
사장 데이빗이 나가고 나서도 분장실의 분위기는 냉랭하기만 했다. 나타샤는 스치듯 한마디를 남기고서 지니, 티파니와 함께 자리를 떴다.
"이번 경연에서 이긴 사람이 데이빗 오빠를 차지하는 거야. 알겠니?"
"......"
그렇다면 더욱 질 수 없었다. 반드시 이겨주마, 나타샤.
경연의 종이 울리고, TREND 바에는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쇼를 보기 위해 밖에도 줄이 길게 서 있는 듯 보였다.
첫 번째 순서는 나타샤 팀이었다. 나타샤의 노래 비욘세의 'Sigle Lady'가 바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나타샤, 지니, 티파니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지니가 왼쪽, 티파니가 오른쪽에 서 있었고, 나타샤가 중앙에 자리했다. 셋 다 몸의 라인이 훤히 다 보이는 타이트한 레깅스와 높은 킬힐, 그리고 찰랑찰랑하게 어깨 밑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음악이 진행되면서 비욘세의 음악에 맞춰 좌우로 엉덩이를 흔들며, 오른쪽 손을 허리에 올린 채 왼쪽 손으로는 뭔가를 잡아채는 듯 움직였다. 그리고는 'Put your hands up'에서는 가사에 맞게 위로 손을 올리면서 살짝 점프를 했다. 이 노래는 엉덩이를 좌우로 심하게 움직이는 게 관건이었는데, 나타샤와 지니, 티파니는 이런 어려운 안무들을 무리 없이 소화하고, 립싱크까지 완벽하게 해내고 있었다. 'if you liked it then you should have put a ring on it'이 나올 때마다 손에 낀 반지를 가리키는 안무를 했는데, 이 안무가 나올 때마다 관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안무를 따라 하고 있었다. 반면, P는 분장실 안에서 그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긴장되어 두근거리고 있던 자신의 심장소리를 간신히 외면하고 심호흡을 하고 있는 P였다.
나타샤 팀이 관객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퇴장하고 나서 이제 P의 순서가 되었다. P는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비욘세의 'Crazy in Love'의 전주가 나오고, 랩을 맡은 M이 무대 위로 등장했다. M은 게이클럽 DJ를 하는 P의 동갑친구로, P가 드랙 쇼를 할 때 몇 번 함께 무대에 서서 친해졌다. P가 경연으로 비욘세의 노래를 한다고 하자, 흔쾌하게 무대 위로 올라오겠다고 약속했었더랬다.
"Yes, so crazy right now!"
M이 신랄하게 영어로 된 랩을 립싱크로 뱉어내었다. 누가 보면 M을 드랙킹이라고 할 정도였다. Jay Z의 파트를 수월하게, 아니 그보다 더 능숙하게 해내었다. P는 랩이 끝나자마자 무대 앞으로 나서며 'You are ready?'로 립싱크를 시작했다. 처음에 등장할 때는 마치 모델이 워킹하듯이 골반을 최대한 이용했고, 구두를 신은 다리 라인을 강조했다. 표정은 도도하면서도 자신감 넘치게, 손은 허리에 딱 올려놓았다. 그러면서 좌우로 머리를 움직여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게 했다. 머리카락이 찰랑거릴 때마다, 그리고 강렬한 눈빛으로 관객들을 쳐다볼 때마다 관객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P는 자신의 장점인 체력을 이용해서 허리를 쉴 새 없이 털었다. 표정에 비욘세다운, 매력적이면서 섹시한 모습이 살아나도록 연기했다. M과 서로 노래 파트를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커플처럼 보이도록 연기했다. M의 얼굴과 내 얼굴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졌고,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M은 보기보다 잘 생긴 얼굴이었다. 아니,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P는 관객들을 유혹하고 세뇌시키는 데 여념이 없었다.
경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자신의 앞에 놓인 종이에 더 마음에 들었던 팀을 적어 안이 보이지 않는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한 100명 정도 되는 관객들이 모두 투표를 하고 나서 사장 데이빗이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개표했다. 하나씩 하나씩 개표가 되는 상황에서 나타샤 팀과 P 팀은 긴장감을 감출 수 없어했다. 나타샤와 지니, 티파니는 잔뜩 긴장한 듯 셋이서 손을 꼭 잡고 있었고, M은 P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M의 손에는 땀이 가득 차 있었다.
"경연의 우승자는..."
경연자들과 관객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데이빗이 승자를 발표했다.
"P!"
모두가 P를 향해 박수갈채를 보냈다. M은 P를 껴안았고, P에게 키스를 했다. P는 얼떨결에 M의 키스를 받아버렸다. 원래는 키스를 거절했어야 했지만, 우승한 기분에 묻혀 M과 진하게 키스를 해버리고 말았다. 그 자리에 있던 관객들을 더욱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불렀다. 나타샤와 지니, 티파니는 무너지듯 주저앉았고, 데이빗은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버렸다.
"너 그게 뭐하는 짓이야?"
"뭐가요?"
P를 자신의 사무실로 부른 데이빗은 P가 문을 닫자마자, 소리를 질러댔다. P는 데이빗이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지만, 최대한 모른 척하기로 했다.
"모른 척하지 마. M과 키스했잖아!"
"그게 뭐가 어때서요? M은 나와 경연을 함께 한 사이예요. 기분이 좋으면 그럴 수도 있죠."
"그래서 키스를 받아줬다고? 내가 보고 있는 걸 알면서?"
"......"
"다시 한번 M과 그런 짓을 했다가는 가만 안 있겠어. 알겠어?"
"알겠어요..."
데이빗의 사무실을 나오면서 P는 문득 M과의 키스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아니 오히려 좋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솔직히 데이빗이 해가 저가는 초저녁 무렵이라면 M은 정열적으로 해가 내리쬐는 정오 같은 남자가 아닐까. M도 내가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M을 몰래 오피스텔로 불러볼까.
다음 날, 마침 TREND 바 공연이 쉬는 날이었기도 해서 P는 M에게 연락했다. 경연을 함께 해줘서 고맙다고.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고. M은 흔쾌히 P의 초대에 응했다. 저녁 6시가 되자,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M이 도착한 것이었다. M은 들어오자마자, "일 잘 풀리라고 사 왔어." 하면서 뽑아 쓰는 휴지를 나에게 전했다.
"뭘 이런 걸 다..."
"한국에선 첫 방문 할 때는 이렇게 한다기에. 내 마음이야."
M은 귀엽게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M은 유년시절을 미국에서 살다 왔다더니, 정말 개방적이구나 싶었다. M은 데이빗처럼 서구적인 외모는 아니었지만, 큰 눈에, 쌍꺼풀이 없었고, 계란형 얼굴에, 앵두빛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동양적인 외모였지만, 성격은 누구보다도 대범하고 적극적이었다. 서구적인 외모였지만, 자신에게 꼰대같이 대하는 데이빗과는 완전히 달랐다.
식탁은 이미 저녁 식사를 차려둔 지 오래였다. 오랜만에 마트에서 장을 봐서 사온 소고기, 야채, 파스타 면 등으로 등심 스테이크, 과일 샐러드, 오일 파스타를 만들어 두었다.
"이게 웬 진수성찬이야?"
"네가 미국에서 왔다기에 미국식으로 좀 차려 봤어. 어때?"
"너무 맘에 든다."
귀엽게 웃고 있는 M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최대한 참았다.
이제 P와 M 두 사람은 서로 마주 앉아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M은 어떤 스타일의 사람을 좋아해?"
"나? 너."
저돌적인 그의 발언에 P는 순간 당황했다.
"나? 왜?"
"멋있잖아. 너처럼 뛰어난 아티스트는 처음이야. 미국에서도 드랙 쇼를 많이 봤었지만, 크게 감흥이 없었는데, 너는 정말 예술가 같아."
"그래, 고마워. 근데 나 사실 안 멋있어. 화장 벗겨놓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리는 걸."
"아니야. 난 네 존재 자체가 멋있다고 생각해. 걱정 마, My Lady."
자신을 My Lady라고 부르는 M의 말에 더 이상 인내심을 잃은 P는 M에게 말했다.
"내가 만약 너를 좋아한다면... 너, 너는... 날 받아줄 수... 있어?"
"물론이지. 나는 널 정말로 사랑해."
식사를 마치기도 전에 M은 자리에서 일어나 P에게 다가와 키스를 했다. 그의 앵두빛 입술에서 P의 입술로. 혀가 섞였다. 이내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바닥을 뒹굴었다. M이 P의 위에 올라와 P의 상의를 벗기고 자신도 상의를 훌렁 벗어던졌다. 그러자, M의 헐렁한 맨투맨에 감춰져 있던 근육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요즘 소위 젊은이들이 패션 근육이라고 부르는 그런 세밀하고 조각 같은 근육이었다. 가슴, 복근, 옆구리, 치골까지 완벽하게 근육이 자리잡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아..."
M의 혀가 P의 목덜미를 핥았다. 그리고 유두를 거쳐 배꼽 아래로 내려갔다. 조금 더 내려가면... 안 돼!
"안 돼!"
P가 M을 밀쳐내려 했지만, 탄탄한 몸의 M은 밀쳐지지 않았다.
"왜 그래? My Lady."
"그곳은 안 돼."
"괜찮아, 날 믿어."
"아니, 그게 아니라..."
"워, 워. Don't worry."
P는 입고 있던 운동복 바지를 놓지 않았다. 그러나 M은 그 바지를 훌러덩 벗기고 팬티까지 벗겨 버렸다. 팬티를 벗기자, 무수히 많은 칼자국들이 사타구니 주변에 나 있었다. 칼자국은 마치 난도질을 한 것처럼 여러 겹 겹쳐 있었고, 걔 중에는 깊게 파인 자국도 있었다.
"What is this?"
"그게 사실..."
P는 떨리는 손으로 옷을 주섬주섬 다시 입고, 충격을 받아 얼이 빠진 M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실은... 어렸을 때 성전환 수술을 받으려고 했었어. 그런데 그게 맘처럼 쉽지 않더라고. 그런데 내 성기를 볼 때마다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더라... 성기에 칼을 대려고 했는데, 도저히 용기가 안 나더라고. 그래서 대신 허벅지 안쪽에 칼을 여러 번 그었어. 한두 번도 아니면 수십 번... 결국 이렇게 흉한 상처로 남은 거야..."
"Oh, My Poor Lady..."
M은 P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P의 등을 쓰다듬었다.
"Don't worry, My Lady. 이 비밀은 평생 간직할게. 나는 너를 사랑해."
"고마워, M. 날 이해해주는 건 너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