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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갈해리 Jul 26. 2022

드랙 아티스트 P 이야기  -2-

P의 사랑과 고난

  P는 M의 품에 안겨 펑펑 울음을 쏟았다. 한참을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나니, P는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치 흐렸던 날씨가 비로소 맑게 개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M은 P에게 있어 안락한 휴식처 같은 존재였다. M은 TREND 바에서, 또 이태원에서, 그리고 이 대한민국에서 아등바등거리면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P에게 괜찮다고, 힘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P의 애인 데이빗조차도 드랙 쇼를 위해 노력하라고 채찍질하는데, M만은 P를 꼭 안아주며 많이 힘들었겠다고 위로해주고 있었다.

  애초에 나타샤에게 데이빗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드랙 쇼의 정상을 지키려고 시작한 경연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목적을 달성했는데도 뭔가 공허함을 느끼고 있는 P였다. 허무했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 TREND 바를 찾아왔을 때, 그때 느꼈던 드랙퀸의 영광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시기와 질투, 협박과 음해만이 판을 치는 드랙퀸들의 어두운 뒷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TREND 바에서 드랙퀸의 정상에 올랐다 해도 P는 여전히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있는 성소수자였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P가 아무리 날고뛰고 기어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였다.
  '진리'. 그것은 누가 만들었을까.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을 통해 창조되고, 남자와 여자가 만나 종족을 번성시키는 것이 진리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트랜스젠더는, 게이는, LGBT는 도대체 진리의 어느 면에 속한 것일까. 이들은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진리'라는 동전의 어느 면에도 속하지 않았다. 이들은 동전의 가장자리에 서서 위태롭게 머물고 있을 뿐이었다. 동전은 양쪽 면 외에는 어떤 면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진리의 어떤 자리에도 환영받지 못하고, '죄'라는 이름표로 낙인찍혀 버리고 말았다.
  한편, P가 자해를 한 것도 세상이 규정한 '진리'라는 감옥에 대한 저항이었다.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P가 고통스럽게 자신의 사타구니를 칼로 그었던 것은 남자와 여자로 나뉜, 이분법적인 세계에 대한 저항이자, 새로운 제3세계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던 것이다. 1세계, 2세계가 아닌, 제3세계. 남자도, 여자도 아닌 새로운 성별의 세계. 그런 세계를 P는 바라고 있었다.

  P는 M과 헤어지고,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하면서 터덜터덜 길거리를 걸었다. 그러다 문득 한 상점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유리창 속에는 마르고 짧은 머리의 20대 남자가 있었다. 어떤 것이 진정한 내 모습일까. 드랙퀸이었을 때의 화려한 모습이 진정한 P인가, 유리창 속의 이 수수한 남자가 진짜 P인가. P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자신의 오피스텔 앞까지 걸어왔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제야 오는 거야?"

  데이빗이 자신의 독일제 B사 차량에서 내려 P에게 다가왔다.

  "데이빗?"
  "뭐하다가 이제야 와?"

  데이빗이 가까이 다가서며 추궁하듯 물었다.

  "아, 친구랑 저녁 식사 좀 하느라..."
  "친구? 내가 아는 친구인가?"
  "아니... 당신은 모르는 친구예요."

  P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것보다 뭔가 화제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P는 데이빗에게 물었다.

  "그런데 데이빗 당신이 여기에는 웬일이에요?"
  "그야 네가 보고 싶어서 왔지."
  "그래요? 들어와요."

  P는 데이빗을 집 안으로 들였다. 집 안 한쪽은 온갖 소품들과 의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저번 경연 이후, 정리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그날 이후, P는 M 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너저분하게 나뒹굴고 있는 가발과 바닥에 흩어져 있는 의상들이 그동안의 P의 행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데이빗은 그런 소품과 의상들을 하나하나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다 P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P, 너에게 유명 잡지사 인터뷰 제의가 들어왔어."

  P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데이빗의 말을 받아들였다.

  "인터뷰요? 저번에도 했었잖아요. 또 하재요? 귀찮네."
  "그래도 드랙 쇼를 대중들에게 알리는 데 이만한 게 어딨겠어. 할 거지?"
  "알겠어요... 일단은 좀 쉬고요. 좀 피곤하네요. 그만 가 줄래요?"

  P는 보자마자 일 얘기만 하는 데이빗의 말에 싫증을 느꼈다. 그를 어서 집에서 내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만의 시간을, 아니 M과의 일을 떠올리며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 알았어. 근데 요즘 많이 까칠해졌네. 아직도 나타샤나 지니가 괴롭혀? 그럼 내가 혼내주고..."
  "아녜요. 그런 건 아녜요. 그저 피곤해서 그래요..."
  "그래, 푹 쉬고 모레 인터뷰 자리에서 보자고..."
  "네."

  데이빗은 P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집 밖으로 나갔다. P는 데이빗이 가자마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한 인간으로서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그에게 사랑을 주는 행위를 하고 싶다고. 가슴 절절하게 이 한 몸 바쳐서 열정적인 사랑을 하고 싶다고. 그런데 데이빗과 M 중 누가 P에게 진정한 사랑을 주고 있을까. 아무리 봐도 드랙퀸이었을 때보다 화장을 지우고 평범한 자신으로 돌아갔을 때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P는 자꾸만 마음이 데이빗에서 M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이틀이 지난 오후, 이태원의 한 카페에서 P는 한 잡지사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그 자리에는 물론 데이빗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P 씨. 이렇게 유명한 드랙 아티스트 분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네. 반가워요."

  P는 오늘도 드랙퀸 분장을 한 채 기자를 만나고 있었다. 짧은 단발머리 전체에 파란색 리본을 동여매고, 어깨라인이 드러나는 검은색 시스루 드레스를 입은 채로. 기자는 P의 화려한 분장을 칭찬했다.

  "오늘 분장이 되게 멋지네요."
  "네. 감사해요."

  P는 무표정한 얼굴에 고개를 까딱하며 꽤 건방져 보일 만큼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P는 기자들이 의례 하는 입에 발린 칭찬을 듣는 것도 이제 지겨웠다.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 주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아... 하하. P 씨는 세계적으로 한국의 드랙 쇼를 알리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지금 현재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드랙 아티스트신데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잘하니까 유명해지지 않았겠어요?"
  "그, 그렇군요... TREND 바 사장이신 데이빗이 여기 나와 계신데요. 두 분은 무슨 사이신가요? 사장과 직원 사이일 뿐인가요?"

  데이빗은 기자의 질문을 듣자, P의 대답을 은근히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공공연하게 데이빗과 P가 연인이라는 것을 알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장과 직원 사이죠. 무슨 사이겠어요?"

  P는 데이빗과의 사이에 대해 선을 그었다. 순간, 데이빗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기자도 당황한 듯 데이빗과 P의 얼굴 양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그러면 P 씨에게 지금 사귀는 분이 있나요?"
  "그게 뭐가 그렇게 궁금하죠? 인터뷰와 관련 없는 내용은 그만해 주세요!"

  P는 기자에게 날카롭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카페에서 이태원 거리로 나왔다. 뒤에서 데이빗이 쫓아왔다.

  "오늘따라 도대체 왜 그래?"
  "뭐가요? 난 잘못한 거 없어요."
  "기자한테 그런 식으로 나오면 어떡해?"
  "사생활에 대해서 묻잖아요."
  "네가 유명하니까 물어볼 수도 있지."
  "난 싫거든요?"

  P의 말에 데이빗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질문했다.

  "싫어서 나와의 관계도 그렇게 얘기한 거야?"
  "......"
  "도대체 요즘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

  P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데이빗은 목소리를 내리깔면서 말했다.

  "M, 그 녀석이랑 무슨 관계야?"
  "갑자기 M 얘기가 왜 나와요?"
  "M이랑 잤지?"
  "......"

  데이빗은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가 드랙 아티스트가 될 때까지 물심양면 널 도와준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니? 내가 널 얼마나 아꼈는데..."
  "그건 날 아낀 게 아니라, 돈이 되는 드랙퀸을 아낀 거겠죠. 화장을 지운 내 모습을 좋아해 준 적 있어요?"
  "너도 드랙퀸이 된 모습을 더 사랑했던 거 아니었어? 애초에 여자가 되고 싶어 했던 건 너잖아!"

  그렇게 말하는 데이빗의 말에 더 큰 상처를 받는 P였다. 물론 드랙퀸으로 분장하면 화려하고 섹시한 여자가 된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히기는 했다. 그러나 여자가 되고 싶어 했다고, 드랙퀸으로 분장했다고 완전히 새로운 나로 바뀌는 건 아니었다. 수십 번 칼로 사타구니를 그었던 당시의 심정을 데이빗은 절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P는 데이빗에게 그 사실을 결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됐어요... 이제 나는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아요."

  P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데이빗의 손을 뿌리치고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정처 없이 계속 걸었다. 때마침 한 차례의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잔뜩 분장한 것들이 비에 젖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눈가의 화장들이 번져갔고, 머리의 리본은 축 늘어졌고, 검은색 시스루 드레스는 상복처럼 볼품없어져 버렸다. 길가의 사람들이 비를 피해 빠르게 달려갔지만, 주변의 속도와는 다르게 P는 한참 동안 느리게 걸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멈춰 설 것처럼. 느리게 걸으면 걸을수록 화장은 빠른 속도로 지워져 갔고, 원래 P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P는 누군가 본래의 자신을 위로해주고 사랑해줄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M이라고 생각했다. M에게로 가자. M만이 모든 것에 지쳐버린 나의 유일한 피난처일 테니. M의 집에 다다른 P는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나 아무도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M은 집에 없는 것 같았다. P는 온몸이 젖은 채로 M의 집 현관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M이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초저녁이 되어 해가 져 갈 즈음, M가 밖에서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M의 옆에는 어리고 잘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연인처럼 서로 딱 붙어서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M의 어리고 잘생긴 남자는 M에게 팔짱을 끼고 있었고, M은 그 남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P는 머리며 의상이 비에 젖어 이미 무너져 내렸지만, 또 한 차례 마음마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어? P! 무슨 일이야?"
  "너... 야말로 어떻게 된 거야? 그 남자는..."
  "아... 얘기 안 했나? 내 새 파트너야."
  "무슨 소리야? 그럼 나는..."
  "I'm sorry, My friend. Bye."

  M은 화장이 번진 P의 얼굴을 뜨악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는, 남자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P는 M의 행동에 허탈함을 느꼈다. 저절로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My lady라고 하면서 자신의 원래 모습도 사랑해준다 속삭였던 M이 아니었던가.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사람의 마음이 바뀔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랑한다는 말이 어떻게 이리도 가벼울 수 있단 말인가.
  P는 다시 거리로 나와 목적 없이 걷고 또 걸었다. 이번에야말로 어디론가 가야 할지 정말 몰랐다. P를 받아줄 사람이 과연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을까. 단지 P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세상은 P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랑을 주지 않고, 어쩌면 이렇게 가혹할 수가 있을까. 드랙퀸이 아닌, 단지 P로서 사랑받는 것이 그토록 어렵고 불가능한 일인 걸까. 언제까지 P는 이 지긋지긋한 '진리'의 감옥에 갇혀 살아야만 하는 걸까. 이 감옥을 벗어날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P는 새로운 세계로의 갈망을 이뤄낼 수 있을까.

  P는 비가 와서 어느새 강물이 잔뜩 불어나 있는 한강을, 다리 위에서 처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P는 다리 난간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그리고 몸을 난간 위로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이제 P는 다리 난간 앞 좁은 틈새 위에, 한강이 바로 보이는 그 자리에 검은색 시스루 드레스를 입고 서 있었다. 인터뷰할 때만 해도 마치 상복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죽음을 앞두고 입기에는 딱 좋은 드레스가 아닌가 싶었다. 그래, 이렇게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거야... P는 한 발을 허공에 올렸다. 그리고 난간에서 손을 떼어냈다. 앞으로, 앞으로 물결이 요동치는 한강 아래로... 그 아래는 고통도, 감옥도 없는 곳이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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