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 가을의 일이었다. 할매를 따라 삼척시로 간 적이 있었다. 할매와 나는 태백산 산길을 내려와 태백시 시외터미널에서 삼척 종합버스터미널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갔다. 버스가 삼척 종합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정라동의 주민들은 터미널까지 나와 할매를 반갑게 맞이했다. 무당인 할매에 대한 소문이 과연 먼 삼척에까지 돌 정도인가 의문스럽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무당 일을 해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는 할매가 자랑스럽기도 했더랬다.
삼척항의 모래사장에는 큰 차일이 쳐져 있었고, 신대와 신기가 세워져 있었다. 그 앞에는 과일, 북어포, 술잔 등의 제사상이 차려져 있었고, 북과 장구를 치는 고수들은 할매 주위에 둥글게 포진해 있었다. 할매는 정라동 동장님, 인근 어부들, 그리고 주민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주민들은 할매가 무슨 고위직에 있는 사람처럼 굽신거리며 대했는데, 나는 그것이 왠지 기분이 좋아서 잔뜩 들떠 있었다. 한편, 할매는 진지하면서도 엄숙한 표정으로 제사상 앞에 섰다. 고수들이 북과 장구를 치고, 연주자들이 꽹과리와 징을 치기 시작했다. 그들이 할매 주위를 돌면서 흥을 돋우자, 할매는 빠르고 경쾌하게 창을 하기 시작했다.
"동해의 용왕님이시여, 간절히 바라오니 올 한 해 풍년을 이루게 하시고..."
굿은 2시간 넘는 시간 동안 진행됐다. 정오 무렵 시작되었던 굿은 어느덧 오후 2시가 될 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할매는 쾌자(서울굿의 신장거리나 대감거리 등에서 굿을 할 때 착용한 복식)를 입은 상태로 이쪽저쪽 부채를 흔들면서 전혀 지치는 기색 없이 무가를 부르고 또 불렀다. 다른 무당들도 간간히 다른 굿거리를 했지만, 할매가 맡은 굿거리는 동해안 별신굿에서 가장 비중이 크다고 볼 수 있는 용왕거리였다. 주민들은 용왕상을 따로 마련해 제사상에 두고, 할매가 굿을 할 때 제사상을 향해 계속해 절을 올렸다.
4살 때 처음 이 굿거리를 보았을 때, 왜 이렇게 시끌벅적하게 춤을 추고 부채를 흔들고 악기를 연주하며 굿을 하는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는데, 굿이 끝나고 할매가 이야기해 주어 비로소 그 연유를 알게 되었다.
"한 해 바다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서 이 굿을 하는 거란다. 그중에서도 바다의 용왕님께 기원을 드리는 용왕거리가 가장 중요하지."
그랬다. 할매가 용왕거리를 하는 동안 주민들은 새파란 세종대왕의 얼굴이 그려진 만 원짜리를 봉투에서 꺼내 할매에게 직접 전해주거나 할매의 발치에 던졌다. 그만큼 중요한 행사여서 돈을 바치는 것이었을까. 할매는 그 돈을 받아 들고 계속해서 무가를 불렀다. 어린 나는 할매가 무가를 부르는 것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할매가 세종대왕이 그려진 종이를 많이 받아오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굿이 끝나면 할매는 항상 그 돈으로 내게 맛있는 음식을 사주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굿거리 행사가 모두 끝나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삼척 5일장에 들러 떡볶이와 순대, 튀김을 사주었다. 나는 산골에서 먹어볼 수 없는 분식 요리를 먹게 되자, 식욕을 주체할 수 없어 허겁지겁 먹기에 바빴다. 그런 나를 할매는 항상 인자하고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할매와 떨어져 동해시의 사립중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한 지도 어느덧 3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물론 여름, 겨울방학 때마다 2시간 동안 시외버스를 타고 산길을 걸어 올라가 할매의 신당으로 찾아가곤 했다. 할매는 방학이 되어 돌아온 나를 반갑게 맞았지만, 내 눈에는 할매의 동공이 흐릿한 것이 뭔가 슬퍼 보이기만 했다. 아니면 점점 노쇠해져 가는 할매를 보는 내 마음이 슬픈 탓이었을까. 어쨌든 나는 할매의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극진한 환대를 받았는데, 그 증거가 할매가 차려주는 7첩 반상이었다. 산골에서 자라나는 온갖 산나물들로 만들어진 나물무침, 손으로 빠르게 휘적휘적 무쳐낸 배추 겉절이, 손이 큰 할매가 꾹꾹 눌러 담은 잡곡밥, 구수한 된장으로 끓여낸 짭조름한 된장찌개. 오랜만에 먹는 꿀맛 같은 한 끼 식사였다. 그렇다고 사립중학교 기숙사의 식단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서도 반찬 세, 네 가지는 꾸준히 나오고, 밥과 국도 꽤 맛있다. 그렇지만 할매가 정성 들여 만든 이 음식들보다 맛과 질이 떨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듯했다.
한편, 할매는 내가 방학이 되어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키가 한 뼘씩 커 가고, 여자 아이에서 숙녀로 점점 성장해가는 것이 내심 기쁘고 기특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할매 자신이 내 몸의 변화를 챙겨주지 못한 것에 대해 많이 미안해했다.
"신지야, 월경은 했니?"
나는 남들보다 조금 늦게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생리를 시작했는데, 할매와 떨어져 살게 된 중학교 기숙사에서 처음 월경을 경험했다. 처음에는 밤에 잠을 자다가 침대 시트에 오줌을 싼 줄 알고 일어나서 보니, 피가 묻어 나와 기겁을 했더랬다. 나는 제일 먼저 할매부터 찾으려 했지만, 할매는 곁에 없었다. 결국 기숙사 사감 선생님께 도움을 청해 생리에 대해 설명을 듣고, 생리대를 구입해 착용하면서 첫 월경 문제는 그렇게 해결되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중학교 3학년이 된 지금, 나는 생리가 한 달에 한 번 내게 일어나는 몸의 변화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네. 할매, 괜찮아요. 이제 알아서 잘하고 있어요."
내 말에 할매는 무슨 말을 막 꺼낼까 입을 열었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나에게 생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고, 생리를 하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려주려고 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알아서 잘해요.'라고 말함으로써 할매의 입을 막아버렸고, 그 결과 우리는 어색한 상태로 10분 동안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그러다 할매가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기숙사 생활은 할 만하니?"
"그럼요. 잘 지내고 있어요. 학교 선생님들도 잘 챙겨 주시고, 친구들도 꽤 생겼어요."
"그것 참 잘 됐구나."
할매는 '그것 참 잘 됐구나'하는 말을 끝으로 입을 다시 다물었다. 나는 할매가 나를 오랜만에 만나서 많이 어색해하는 것 같다고 여겼다. 물론 나도 할매가 많이 어색해져서 부러 말을 하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어쩌다 할매와 내가 이렇게 어색한 사이가 되어 버렸을까. 한동안의 정적을 뚫고 이번에는 내가 할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황당 팽나무는... 잘 있어요?"
순간, 나도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팽나무의 상태가 몹시 궁금했던 것 같았다. 8살이었던 그때, 홧김에 팽나무 제단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 못내 죄스러웠고 그 기억이 내 머릿속에 대못처럼 꽉 박혀 있었다.
"그럼. 여전히 잘 있단다. 예전보다 더 자랐지. 너처럼."
할매는 주름살이 잔뜩 접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런 질문을 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고 죄책감이 들었지만, 할매는 그 일은 이미 다 용서한 것처럼 나를 대하고 있었다. 또 할매의 모든 관심의 중심에는 내가 있는 것만 같았다. 무당 일을 하는 할매에게 중요한 것은 환웅, 신단수, 성황당 팽나무였지만,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것은 손녀인 나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것이 못내 뭉클해져서 고개를 떨구면서 알았다는 듯 끄덕이는 척했다.
그렇게 나는 방학 때마다 할매의 집에서 지내다 학기가 시작되면 다시 기숙사로 돌아갔다. 마치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가 자신의 딸 페르세포네를 하데스에게 시집보내고 난 뒤, 지상에 페르세포네가 없는 겨울에 곡식이 메마르고 나무들이 앙상해지는 것처럼 할매는 내가 학교로 돌아가서 곁에 부재할 때마다 점점 더 메마르고 수척해져 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몹시 안타깝고 속상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내가 같은 동해시의 사립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유년시절 살았던 태백 마을에 큰일이 터졌다. 정부와 태백시에서 우리 마을의 중심지인 성황당 팽나무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내겠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한 것이었다. 정부와 태백시에 나온 공무원 관계자들은 이곳에 도로가 나게 되면 앞으로 태백시가 개발되어 살기 좋아질 것이라고, 주민 설명회에서 듣기 좋은 말로 주민들을 설득했다. 그들의 말에 넘어간 주민들은 한 사람, 한 사람씩 개발 계획에 찬성하고 나섰고, 오로지 할매만이 마지막까지 반대를 하며 버티고 있었다. 할매는 성황당 팽나무 제단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하면서 팽나무를 지키려고 애를 썼다.
무당인 할매에게 있어 성황당 팽나무는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것이었다. 대대로 세습 무당이었던 할매에게 그 나무는 가족이나 반려자와 매한가지였고, 팽나무는 그 존재만으로도 신성하고 가치 있는 것이었다. 할매로서는 마땅히 지키고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할매는 팽나무가 뿌리 뽑히는 꼴을 지켜보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건설 관계자들을 막아섰다. 불도저와 포클레인이 마을 초입을 지나 성황당 앞까지 다가왔을 때에도 할매는 자신의 몸을 방패 삼은 채로 팽나무 앞을 결코 떠나지 않았다.
"이놈들, 절대로 안 된다. 절대로 안 돼!"
할매는 천막에서 농성하면서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할매에게는 오로지 팽나무밖에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한편, 담임 선생님이 전하는 할매의 소식을 듣고, 나는 위기를 느끼고 한달음에 태백 마을로 달려왔다. 할매가 점거하고 있는 팽나무 앞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머리에 띠를 두르고 무복을 입은 채 제단 앞에 앉아 있는 할매를 발견했다. 물 한 모금도, 밥 한 숟갈도 뜨지 못해 앙상하게 움푹 들어가 있는 할매의 두 뺨을 어루만졌다.
"할매..."
할매는 위태롭게 앉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가 내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신지야... 왔구나."
마치 죽어가는 듯한 할매의 목소리에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눈을 감을 것처럼 잔뜩 흐릿해진 동공과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땅처럼 메마른 입술, 수분과 영양을 섭취하지 못해서 덜덜 떨리는 손목이 할매가 당장 위급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할매, 이러다 죽어요..."
"아니다. 나는 괜찮다, 신지야..."
"할매, 이 팽나무가 도대체 뭐라고요."
"그런 말 하면 못 쓴다. 이 팽나무는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신령님이시다..."
나를 나무라는 듯 할매의 목소리가 살짝 커졌지만, 그조차도 내게는 힘없이 들렸다. 할매를 빨리 병원에 데려가야 했다. 이미 밖에는 할매를 모시고 가기 위해 119 구급대원이 와 있었다. 구십에 가까운 고령의 할매가 홀로 식음을 전폐한 채 시위를 한다고 하니, 마을 사람들이 119에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나는 할매를 일으키려고 할매의 양쪽 겨드랑이 아래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할매는 그런 나의 손을 살짝 쳐내고는 결연한 표정으로 제단을 향해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샘솟았는지 모를 만큼 할매는 절제된 동작으로 팽나무를 향해 절을 드리고 치성을 드렸다.
"하늘 아래 환웅님이 내려오시어 신단수에 환국을 세우셨으니, 그 아드님이 단군왕검이라. 그 이후 대대로 단군의 후예들이 태백에 터전을 잡아 살아오며 신목을 모시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냐. 신목은 인간을 보살피고, 인간은 신목을 돌보았구나. 허나 이제 신목을 뽑아가려는 간사한 무리들이 있사오니, 환웅님이시여, 저들을 벌하소서!"
할매는 마치 적군에게 일갈하는 삼국지의 영웅 관우처럼 위엄 있고 힘 있는 목소리로 천막 밖에 있는 건설 관계자들이 들릴 만큼 크게 소리쳤다. 한 30분가량 그렇게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며 절을 올렸을까. 어느 순간, 할매는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가로 쓰러졌다.
"할매!"
할매는 온 몸을 떨면서도 마지막 힘을 짜내어 말했다.
"신지야, 네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니?"
"......"
"신 신에, 뜻 지. 신의 뜻이라는 의미란다."
"그렇군요..."
"네가 태어난 건 신의 뜻이었어... 고맙구나, 신지야... 네가 있어 행복했다..."
할매는 그 말을 마치자마자, 눈을 감고 정신을 가누지 못하고 그만 기절해 버렸다. 다급하게 천막 밖에 있는 119 구급대원들을 불러 안으로 데려왔다. 할매는 엠뷸런스에 태워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들것에 누워 있는 할매 곁에서 나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해 의사에게 심폐소생술을 받았지만, 할매는 결국 눈을 뜨지 못했다.
"2022년 8월 10일 17시 41분, 김명자 님께서 운명하셨습니다."
의사는 다소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할매의 사망 선고를 내렸다. 선고가 내려지는 순간, 나는 바닥에 쓰러지듯이 주저앉았다. 정신을 차릴 수도 없이 눈물이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교통사고로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4살 때부터 13년 동안 물심양면으로 나를 키워 주었던 할매. 어릴 때부터 자신은 아프고 다쳐도 손녀인 나만은 작은 상처라도 날까 봐 조심하고 또 조심했던 할매. 성황당 제단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을 때도 나를 용서하고 품에 안아주었던 할매. 누구보다도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던 할매는 이제 이 세상에 없었다. 이제 오로지 나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