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호는 오늘 밤도 늘 그렇듯 현수의 집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선호는 그의 집 앞 골목 한편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의 방을 올려다봤다. 방에는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선호는 혹여나 현수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볼까 싶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그의 방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그의 방에 불이 꺼졌다. 이젠 자는 거겠지. 그쯤 생각하고, 선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크로스백을 멘 채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선호가 매일 밤마다 현수의 집 앞을 서성이게 된 것은 3개월 전부터였다. 지금으로부터 6개월 전, 20살의 선호는 게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24살의 현수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면서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그는 자신과 같은 성향의 게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마침 채팅이 활성화되어 있던 사이트의 한 음악 채팅방에서 또래 게이들을 만나 그들의 세계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러던 중, 현수가 채팅방에 들어왔다. 그는 간단한 자기소개(키, 체중, 나이, 사는 곳)를 말하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눈팅만 할 뿐이었다. 그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러 들어왔다기보다는 음악 감상을 하러 온 사람 같았다. 선호도 처음엔 현수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현수가 그에게 따로 개인 메시지를 보내오면서 현수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님, 우리 오프라인에서 만나볼래요?"
적극적인 현수의 제안에 그는 잠시 망설여졌다. 현수의 프로필은 (그의 자기소개에 의하면) 175cm-65kg-24살-서울이었는데, 그가 보기에 프로필이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오프라인에서 게이를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던 그는 얼굴도 모르는 상대를 갑자기 만나려니,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 이제 게이 세계에 입문했는데, '한 번 만나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현수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홍대의 한 카페에서 만난 현수는 기대 이상의 훈남이었다. 상대방의 몸매를 먼저 보는 선호로서는 까무잡잡한(태닝을 한 것처럼 적당히 그을린) 피부에, (운동을 했는지) 잘 잡혀 있는 근육질 몸매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다음으로 본 것은 쌍꺼풀이 없는 큰 눈, 높게 솟은 콧날, 적당히 두툼한 입술이었다. 현수는 요즘 게이들이 좋아할 조건(남자다운 얼굴과 몸매)을 다 갖추고 있었다. 갓 군대를 제대했다고 소개한 그는 잠시 대학을 휴학하면서 일자리를 구하는 중이라고 했다. 선호는 그가 자신을 소개하는 동안, 테이블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면서 그의 얼굴에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 한눈에 반했다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걸까. 선호는 그의 잘생긴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바라보고 싶어 그를 향해 좀 더 가까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형 되게 잘생기셨네요."
"고마워."
현수는 선호의 말에 겸연쩍은 듯 웃어 보였다. 그의 미소(하얀 가지런한 치아가 살짝 보이는 옅은 미소)를 보게 되자, 선호는 심장이 두근대고 있는 걸 느꼈다.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이러다 터져 버리면 어쩌나 싶은 정도로 그렇게 빠르게 뛰었다. 그는 선호가 이쪽 세계에 입문해 처음으로 보는 게이였다. 첫 만남에 이런 월척이 낚이다니. 선호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현수에게 관심과 호기심이 생겨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형은 이쪽(게이)인 걸 언제 알게 됐어요?"
"난 군대에서 알게 된 거 같아."
"아, 정말요?"
"날 좋아하던 후임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녀석이 나한테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더라고. 나도 그 후임이 싫지 않아서 밤마다 몰래 관계를 가졌던 것 같아."
"어떻게요? 안 들켰어요?"
"남들 몰래 창고에 들어가서 했었지."
"그렇구나. 형은 연하 좋아해요?"
"딱히 나이는 상관없어."
나이는 상관없다는 현수의 말에 선호는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솔직히 자신도 외모라면 어디 가서 꿀리지 않았다. 고등학교 축제 때도 친구들이 여장 분장을 시킬 정도로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이었고, 피부도 밀가루처럼 뽀얗고 하얬다. 그래서 또래 친구들이 여자 같다고 놀리기도 많이 했고, 걔 중에는 뽀뽀나 포옹 같은 스킨십을 하려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렇듯 자신의 외모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던 그였다.
문득 그는 현수의 의중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선뜻 현수에게 물었다.
"저는 어때요, 형?"
"나도 너 맘에 들어."
"그래요? 다행이다."
그는 현수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은 대화를 하다가 서로에게 끌렸는지 각자의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현수와 헤어지고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그는 기분이 좋아서 계속 히죽히죽 웃었다. 현수 형이랑 사귀게 되면 더 이상의 소원이 없겠다. 다음에 만날 때 꼭 내 애인으로 만들겠어. 그는 그렇게 다짐을 했다.
두 사람은 메시지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점점 더 가까워졌고, 그들의 두 번째 만남은 현수가 사는 동네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만남 약속 장소인, 현수의 동네 근처 지하철역에 도착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현수를 만나는 것이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는지 표정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오늘은 현수 형을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할까. 오늘 헤어 스타일은, 옷차림은, 피부결은 괜찮나. 현수 형에게 잘 보여야 할 텐데. 그렇게 여러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지하철역 출입구 앞으로 현수가 다가왔다.
"오래 기다렸어? 볼 일이 좀 있었어서..."
"괜찮아요. 별로 안 기다렸어요. 저도 좀 전에 왔는 걸요."
실제로는, 30분이나 현수를 오매불망 기다렸던 그였다. 그는 오랫동안 기다린 수고로움보다 드디어 현수를 만났다는 반가움에 기분이 하늘을 날아갈 듯 좋았다.
"우리 어디 가요?"
"어... 우리 집에 갈래? 가서 영화 보자."
"좋아요."
현수 형의 집에 가게 되다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그는 현수의 집에 가서 함께 영화 볼 생각에, 그리고 현수와의 관계에 진전이 생길 것만 같아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는 현수를 따라 한 아파트에 도착해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현수가 3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한 층, 한 층 올라가는 동안,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엘리베이터의 거울을 통해 슬몃 현수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와, 턱선이 정말 예술이다. 어쩌면 저렇게 완벽하게 잘생겼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사이,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해 문이 열렸다. 아파트의 긴 복도가 나왔고, 현수는 303호 앞에 멈춰 서서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현수는 현관문을 열었다.
현수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온 그는 신기한 눈으로 현수의 집을 구경했다. 그런데 집 안, 특히 거실은 뭐랄까, 휑하다고 해야 할까.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필수 가전제품(TV, 에어컨, 소파)을 제외하고는 사람 살고 있는 집 같지가 않아 보였다. 보통 사람 살고 있는 집은, 집주인의 특징이 담긴 인테리어나 장식품들이 거실에 놓여 있기 마련인데, 현수의 집은 그런 것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부속품들이 빠져 있는, 멈춰 버린 벽시계 같다고 해야 할까. 그만큼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현수는 자신의 방에 그를 들였다.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바닥에 잔뜩 어질러진 옷가지(팬티와 트레이닝 바지, 민소매 티 등)와 시큼한 냄새가 풍기는 휴지 뭉치들이었다.
"방 안이 좀 더럽지?"
"아니에요. 남자 방이 다 그렇죠."
현수가 무안할까 봐 그는 어색함을 날려 버리려 애써 웃어 보이며 말했다. 현수는 그에게 방 한편에 놓인 침대에 앉게 하고는 주섬주섬 옷가지와 휴지 뭉치들을 치웠다. 그는 침대에 앉아 현수의 방을 마저 둘러보았다. 방의 또 다른 편에는 컴퓨터 책상이 놓여 있었고, 책상 옆에 기다란 책꽂이가 있었다. 각종 전공 서적들과 만화책들이 꽂혀 있었는데, 기계 관련 서적들인 걸로 봐서 현수는 공대생인 것 같았다. 그리고 만화를 즐겨 읽는 것 같았다.
"음료수 마실래?"
"뭐 있어요?"
"콜라, 오렌지 주스."
"오렌지 주스 마실게요."
현수는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 유리잔에 따르고는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긴장이 되어서 그랬는지 목이 타서 주스를 벌컥벌컥 마셨다.
"영화 뭐 볼래?"
"형은 어떤 장르 좋아해요?"
"나는 장르 상관없어. 다 좋아해."
"그러면... 멜로 영화 볼까요?"
"그래."
현수는 컴퓨터로 영화를 검색하더니, 곧 영화 한 편을 찾아 재생시켰다. 화면이 커다란(30인치는 될 법한) 모니터에서 전체 화면으로 동영상이 재생되었다. 두 사람은 맞은편 침대에 앉아서 영화를 보았다. 영화의 내용은 병을 앓던 재벌의 후계자인 남자 주인공이 간병인인 여주인공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 병을 이겨내고 여주인공을 사랑하게 되는 내용이었다. 그는 눈으로 영화를 보기는 했지만, 현수가 옆에 딱 붙어 있어 온 신경이 그에게 쏠려 있었다. 그는 영화를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반면, 현수는 영화에 심취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현수를 계속 바라보다가 더 이상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기습적으로 그에게 뽀뽀를 했다. 순간, 서로의 입술과 입술이 닿으며 기분 좋은 촉감이 느껴졌다. 계속해서 이 감각을 느끼고 싶었지만, 왠지 현수에게 실례가 될 것 같았다. 그가 현수의 입술에서 입을 떼려고 하는데, 현수가 그의 머리를 한 손으로 붙잡고 다시 입을 맞췄다. 현수는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온 사람 같았다. 마치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포획하듯이. 현수는 자연스럽게 그를 리드하며, 혀를 그의 입 안에 넣었다. 순간, 그의 입에서 "아..." 하고 탄식이 터져 나왔다.
현수는 그의 입 안 깊숙이 혀를 넣고 섞었다. 그는 현수와 혀를 섞으면서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쾌감은 강력했다. 마치 온몸의 털들이 곤두서는 것 같았고, 곳곳의 촉각점들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성기도 감각에 반응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현수는 그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을 떼고는 이제 그의 목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는 목에 닿는 미끌거리는 감촉에 놀라 순간적으로 "앗!"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어떤 것으로도 이 느낌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현수는 목에서, 가슴으로, 치골로 점점 내려가면서 그의 몸 이곳저곳을 핥았다. 그때마다 그는 얼굴을 잔뜩 붉히며 깊은 신음소리를 냈다. 현수는 그의 검은색 드로즈를 벗기고, 단단하게 서 있는 그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순간, 그는 기절할 듯 자지러지는 신음소리를 냈다. 성기에 현수의 혀가 닿을 때마다 몸이 마치 녹을 것만 같았다. 실제로 그의 몸은 잔뜩 달아올라서 뜨거워지고 있었다.
성기를 애무하던 현수는 이제는 침대에 누운 그의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려 자신의 어깨 위로 올렸다.
"형, 거긴..."
현수는 그의 항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여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묘하고 이상한 쾌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한층 더 깊고도 야릇한 신음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현수가 애무를 끝내고 자신의 드로즈를 내려 잔뜩 커진 성기를 그의 항문에 천천히 삽입하기 시작했다. 항문 안으로 현수의 성기가 들어오자, 그는 항문이 찢어질 것처럼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읏... 형, 너무 아파요."
"알았어. 천천히 할게. 조금만 참으면 기분 좋아질 거야."
그는 현수의 말대로 조금 참아 보기로 했다. 현수가 성기를 완전히 안에 집어넣자, 뭔가 속이 꽉 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그 느낌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이윽고 현수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성기가 안에서 앞뒤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뭔가 묵직하면서도 강력한 쾌감이 파도치듯 밀려왔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그러면서 고통이 점차 사그라들었고, 그 자리를 쾌감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현수가 점점 빠르게 허리를 움직이자, 그는 쾌감이 점차 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뭔가, 몸의 어딘가에 위치한 버튼이 눌려져서 온몸이 쾌감으로 가득 차 버린 것만 같았다. 몸이 저절로 부르르 떨렸다. 주체할 수 없는 느낌이 그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신음소리를 내며 강한 쾌감을 느끼던 선호와 스퍼트를 한층 더 올려 허리를 빠르게 움직이던 현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사정을 했다. 쾌락의 최고조에 이르렀던 사정을 하고 나서 아직 그 감각이 미열처럼 남아 있던 선호는, 현수를 끌어 안아 관계를 나눈 애정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팔을 뻗어 자신의 몸 위로 엎드려 있는 그를 껴안았다.
그때, 현수가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선호의 손을 탁 쳐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 씻고 나가야겠다."
그는 다소 무뚝뚝하고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는 혼자서 욕실로 들어갔다. 곧이어 욕실에서 샤워기 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선호는 그가 방금 전까지 자신과 격렬한 섹스를 했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졌다. 관계가 끝나고 나니, 그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마치 뜨겁게 달궈져 있다가 이내 차갑게 식어버린 주전자처럼.
선호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전부 현수에게 바쳤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그를 열렬히 좋아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소중한 첫 경험을, 첫 관계를 순순히 현수에게 내준 것이었다. 그러나 현수는 선호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던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니, 선호의 가슴 한편이 냉기가 가득 찬 것처럼 시렸다. 그렇지만 그를 좋아하는 선호의 마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날 이후로도 현수는 자주 선호에게 연락해 자신의 집으로 불렀다. 두 사람은 현수의 방에서 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뜨겁고 격렬한 관계 뒤에는 언제나 차갑게 식어버린 현수의 표정과 말투, 행동들이 반복됐다. 선호는 좀처럼 자신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현수의 태도에 속이 상하기는 했지만,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여겼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그날은 마침 현수의 생일이었다. 선호는 전날부터 현수에게 줄 좋은 향수를 사기 위해 이곳저곳 화장품 가게를 돌아다니며 테스트를 해보다가 마침내 그에게 어울릴 것 같은 향수를 사는 데 성공했다. 현수의 생일날, 선호는 들뜬 기분으로 그의 집으로 향했다.
현수의 아파트 앞에 도착한 선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현수가 어떤 여자와 팔짱을 낀 채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긴 머리에,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꽤나 미인형의 얼굴이었다. 현수와 그녀가 서로 웃으면서 대화하는 걸로 봐서 여자 친구처럼 보였다. 그런데 현수 형은 자기가 게이라고 했는데. 혹시 여동생인 건가. 선호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기 위해 현수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와 얘기를 나누던 그의 눈이 잠시 선호에게로 향했다. 그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렇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여자와 다시 얘기를 나누며 선호를 스쳐 지나갔다.
선호는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자신을 보고도 못 본 체 지나친 그에게 화가 나기도 했지만, 차마 그를 다시 붙잡고 따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선호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와 그날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서러운 울음을 쏟아냈다.
다음 날, 선호는 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현수는 끝내 선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선호는 현수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형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형 바이(양성애자)였나요? 옆에 있던 여자는 누구예요? 여자 친구예요?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 줘요. 형도 제가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요. 저는 형에게 제 몸과 마음 다 바쳤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형, 제발 답장 좀 줘요. 부탁이에요.]
선호는 그 문자를 보내고 나서 하루 종일 식사도 하지 않고 현수에게서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다. 밤 11시가 되어 드디어 현수에게서 짧은 답장이 왔다.
[응, 나 여자 친구 있어. 우리 이러면 안 될 것 같다. 그만 만나자.]
선호는 현수의 답장을 읽고, 마음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너무나 성의 없고 무례한 답장이었다. 그동안 내가 그에게 쏟은 마음은 도대체 무엇인가. 여자 친구가 있는데 왜 나를 만났던 것일까. 그는 나를 그저 노리개로만 생각한 것일까. 그럴 리 없다. 3개월 동안 그를 만나면서 선호는 참 행복했었다. 관계를 가지고 나서는 비록 차갑게 굴었지만, 그래도 관계를 가지기 전에는 선호에게 친절하게 굴었던 현수였다. 선호는 그에게 몸정, 마음 정이 다 들었는데, 이렇게 한 순간에 모든 관계가 끝나 버리니,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선호는 현수에게 다시 만나자는 답장을 보냈지만, 끝끝내 그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다. 현수를 직접 만나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선호는 현수의 집 앞에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누구세요?" 하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현수의 어머니인 것 같았다.
"저는 현수 형 후배인데요. 현수 형 좀 만날 수 있을까요?"
잠시 정적이 흐르고 나서 현관문이 열리고, 현수가 집 밖으로 나왔다. 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이리 와." 하고 선호를 조용한 골목으로 이끌었다. 골목에 다다르자, 현수는 선호를 건물 벽 쪽으로 밀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저는 그저... 얘기를 하고 싶어서..."
"난 너랑 할 얘기 없어. 그러니까 다신 연락하지도, 찾아오지도 마."
"형, 어떻게 그래요? 형도 저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요? 다 거짓말이었어요?"
선호는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쏟아냈다. 현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현수의 손이 잠깐 선호의 얼굴로 향하는 듯했지만, 이내 현수는 그 손을 거두었다. 현수는 선호로부터 뒤돌아 서서 "우리는 더 이상 만나면 안 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 버렸다. 선호는 현수가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울다 지쳐 온몸에 경련이 올 정도로 그는 그렇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날 이후로 선호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했다. 그래도 선호는 현수에 대한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선호는 현수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단지, 여자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을 피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선호의 그런 믿음은, 그리고 현수를 향한 마음은 점점 병적인 집착이 되어갔다. 그때부터 선호는 매일 밤마다 현수의 집 앞으로 향했다. 혹여나 집 밖으로 나온 현수를 만날 수 있을까 싶어 골목 어귀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곤 했다. 한 두어 시간을 그렇게 창을 바라보던 선호는 현수의 방에 불이 꺼지면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선호가 여느 때처럼 현수의 집 앞 골목에 앉아서 그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창문이 열리면서 어떤 남자가 고개를 내밀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었다. 선호는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의 남자였는데, 3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현수 형의 가족인가. 그렇게 보기엔 현수와 전혀 닮지 않았다. 그때, 어떤 여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 옆에 서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 또 담배 피우는 거야? 담배 좀 피우지 말랬잖아!"
"알았어, 알았다고."
그 남자는 담배꽁초를 창밖에 내던지고, 창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곧이어 방의 불이 꺼졌다. 분명히 저기는 현수 형 집일 텐데. 선호는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303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스피커 너머로 "누구세요?" 하는 젊은 여성의 소리가 들렸다. 선호는 그 목소리를 듣고 더욱 불안해졌다.
"저, 저는 현수 형 후배인데요. 현수 형 집에 있나요?"
"현수라는 사람 여기 안 살아요."
"네?"
"우리 여기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전에 살던 사람인가 보네."
"아, 그렇군요..."
역시... 불안한 생각은 언제나 맞아떨어졌다. 현수 형이 이사를 간 모양이었다. 선호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 주변 사람들이 젊은 남자가 울고 있으니 이상하게 보았지만, 선호는 누가 이상하게 보든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불 꺼진 방에 불을 켜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오랜만에 깊게 잠에 빠져서 오랫동안 잠을 잤다.
그 후로 선호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잠도 잘 잤고, 밥도 잘 챙겨 먹었고, 학교도 잘 나갔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고, 아르바이트도 했다. 그렇지만 선호는 쉽게 연인을 만들지 않았다. 아니, 연인을 만들 수가 없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현수에게 받은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선호에게 고백하는 게이들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선호는 그들의 고백을 거절했다. 이제 20대 후반이 된 선호는 자신이 현수를 사랑하는 걸 넘어서서 집착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선호는 그 집착의 기원이 현수로 인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문제였다고 이제는 인정할 수 있었다. 앞으로 선호의 상처를 치유해 주고 사랑을 나눌 사람이 나타날지는 의문이었지만,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집착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