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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갈해리 Sep 27. 2022

연애 못 하는 남자 -2-

그 남자의 사연

  희준은 언제나처럼 오전 5시에 일찌감치 일어나 가벼운 소재의 운동복을 입고서 아침 조깅을 하기 위해 아파트 단지 앞 한강변으로 나갔다. 한강변에 도착한 그는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매일 아침 일찍 조깅을 하면 컨디션이 좋아지고, 그날 일이 더 잘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1시간 정도 숨 가쁘게 달리고 나니, 그의 온몸은 땀 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운동복을 벗고, 갈아입을 속옷을 가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땀으로 가득한 몸을 따뜻한 물로 씻어냈다. 샤워를 끝낸 그는 욕실 서랍장에서 흰색 수건을 꺼내 물기를 닦아냈다. 그리고는 욕실 앞 화장대에서 스킨과 로션을 조금씩 덜어 얼굴과 목에 골고루 발라주고, 몸 전체에 라벤더향이 나는 바디로션을 아낌없이 발랐다.

  그는 이제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아침 식사는 비교적 단출한 편이었다. 토스트 기계로 갓 구운 식빵과 무화과잼, 계란 프라이 반숙, 흰 우유가 전부였다. 그는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싱크대 밑 식기 세척기에 먹은 그릇을 넣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식기 세척기가 작동하며 그릇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안방으로 와서 붙박이장에서 주름 없이 잘 다려진 하얀색 와이셔츠와 검은색 정장 바지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 전신 거울을 들여다보며 파란색 넥타이를 매고, 검은색 정장 양말을 신었다. 그는 검은색 서류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는 집을 나서기 전에 거실 탁자에 놓인 액자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다녀올게, 여보."


  액자 속의 여자는 말이 없었다. 액자의 사진에는 그와 한 여자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와 그녀는 넓은 바다를 배경으로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서로 연인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깨끗하게 광을 낸 검은색 구두를 신고 집을 나섰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에서 자신의 승용차에 올랐다. 그는 시동 버튼을 누르고, 핸들에 손을 얹었다. 그는 차를 운전해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자신의 회사로 향했다.

  15분 정도가 지나(일찍 출발해서 그런지 차가 별로 막히지 않았다) 높이가 족히 30층은 될 것 같은 큰 빌딩의 주차장에 주차한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1층 로비에 도착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희준 씨, 좋은 아침!"

  "네, 좋은 아침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인사하는 동료에게 무뚝뚝하게 맞인사를 했다. 이윽고 12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를 포함해 몇몇 사람들이 내려 각자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와 '한 변'이라고 불린 동료는 '법무법인 한산'이라고 적힌 간판의 회사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로 들어가자, 많은 사람들이 업무용 칸막이로 나뉜 자신의 자리에서 PC로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가 지나가자, 몇몇 여자 직원들이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했다.


  "이 변호사님, 좋은 아침이에요."

  "네, 좋은 아침이에요."


  그렇지만 그가 무뚝뚝하고 사무적으로 쳐다보지도 않고 인사하자, 여자가 다소 무안해하면서 얼굴을 붉히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개인 사무실로 들어가 옷걸이에 자신의 수트 재킷을 걸고, 책상 의자에 앉아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액자에게 아까 전과는 다르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여보, 오늘도 일 시작해볼게."


  사무실 액자 속 여자는 집의 액자 속 여자와 동일인물이었다. 아무래도 그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인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는 이제 PC를 켜서 제일 먼저 메일을 확인했다.

  

  그는 요즘 가장 잘 나가는 대형 로펌 '법무법인 한산'의 변호사였다. 서울대 법대와 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변호사 시험에서도 당당하게 수석을 차지했다. 그러자, 내로라하는 대형 로펌들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그는 그중 가장 페이가 많기로 유명한 '한산'을 선택했다. 그때는 돈을 많이 주는 곳이면 장땡이라는 생각에 무작정 '한산'에 입사했다. 실제로, '한산'은 돈도 많이 줄 뿐더러 직원 복지도 좋아 그는 5년째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한산'에서 일하길 잘했다고 생각한 것은 이곳에서 회계팀의 지영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연말정산 원천징수와 관련해서 회계팀에 방문했을 때, 그에게 상담을 해 준 사람이 바로 지영이었다. 지영은 친절하게 그에게 설명을 해주었는데, 상담 내용은 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는 계속 지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했다. 긴 생머리, 하얗고 잡티 없는 피부, 크고 쌍꺼풀 진 눈, 웃을 때마다 보이는 보조개가 그의 눈에 들어온 지영의 첫인상이었다. 지영 씨는 당시 대학을 갓 졸업하고 바로 입사한 지 1년 차였다. 25살인 그녀는 그보다 4살이 어렸다. 4살 차이면 궁합도 안 본다고 하는데, 정말로 천생연분이었던 것일까. 그는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지영에게 푹 빠져 있었다. 첫 만남 이후, 그는 회계 업무 핑계를 대고 그녀가 있는 회계팀 사무실을 자주 찾았다.


  "연말정산 원천징수 영수증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이번 달 급여가 잘못된 것 같은데,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는 별의별 핑계를 대면서 그녀를 만나러 회계팀 사무실로 왔다. 그는 매번 과일 주스를 사서 그녀에게 주었다.


  "상담해줘서 고마워요, 지영 씨."

  "이 변호사님, 뭐 이런 걸 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활짝 웃어 보이며 감사를 표했다. 양쪽 볼의 보조개가 다 드러나도록.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자신의 심장이 두근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빈번하게 그녀의 사무실을 찾던 그는 수많은 밤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어느 날, 드디어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지영 씨, 저녁 식사 같이 할래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제가 아는데..."

  "네, 좋아요."


  그녀의 답은 간단하고 명쾌했다. 그들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며 저녁식사를 했고, 영화관에서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관람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신의 승용차로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오늘 하루 너무 좋았습니다, 이 변호사님. 그럼 안녕히..."


  그는 차에서 막 내리려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지영 씨, 저는 지영 씨를 좋아합니다. 지영 씨도 제가 좋다면 우리 사귈까요?"


  그의 고백을 받고서 안 그래도 큰 그녀의 눈망울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꽤나 감동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좋아요. 우리... 사귀어요."


  그들은 1년의 열애 끝에 그 이듬해 양가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순백색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지영은 그의 눈에 세상 어느 누구보다 아름답게 보였고, 그 역시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행복한 남자로 보였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결혼하고 나서 1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때는 지영이 희준의 아기를 임신한 지 9개월이 되는 때였다. 산달이 얼마 남지 않은 지영은 희준과 의논해서 7개월에 접어들었을 때부터 출산휴가를 낸 상태였다. 지영은 여느 때처럼 한 달에 한 번씩 산부인과에 가서 아기의 상태와 자신의 건강을 확인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에 무거울 대로 무거워진 몸을 실었다.


  "반포 OOOO 아파트로 가 주세요."


  택시를 탔을 때, 지영은 택시기사가 하품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운전하시느라 피곤하신 거겠지. 택시를 타고나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빨간불인데도 택시가 사거리를 통과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영은 택시기사에게 서둘러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택시는 오른쪽 도로에서 맹렬하게 달려오는 화물 트럭과 충돌했다. 택시기사와 뒷좌석에 타고 있던 지영, 그리고 지영의 뱃속에 있던 아기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구급차가 와서 지영을 태워 응급실로 옮겼지만, 지영은 전혀 숨을 쉬지 않았다. 그날, 법정에서 소송 한 건을 끝내고 나서 뒤늦게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희준은 급하게 응급실로 달려왔다. 희준이 정신없이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장인어른과 장모님, 처제들이 지영의 베드 옆에서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희준은 지영의 몸에, 얼굴까지 흰 천이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는 비틀거리면서 베드 옆으로 다가왔다.


  "지영아..."


  희준이 얼굴을 가리고 있는 흰 천을 살짝 내리자, 피로 가득한 지영의 얼굴이 드러났다. 희준은 도저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분명히 아침에 출근할 때, 잘 다녀오라며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던 그녀였다. 함께 산부인과에 가겠다고 했는데도 바쁜 남편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자기 혼자서 산부인과에 갈 수 있다고 장담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희준의 눈앞에는 이렇게 싸늘하게 식어버린 그녀의 몸만이 있을 뿐이었다.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 지영아!"


  희준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과 울음이 희준의 안에서 터져 나왔다. 마치 누가 심장에 총을 쏜 것처럼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너무나 아파서 미칠 것만 같았다. 희준은 지영의 시신을 품에 끌어안고 오열했다.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지영과 함께 산부인과에 갔어야 했다. 그래서 자신의 차로 산부인과에 가서 검진을 받고 지영을 집까지 바래다줬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희준은 그렇게 하지 않은 자신을 탓했다. 자신의 무신경함이 지영을 사지로 몰았다고 생각했다. 희준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사정없이 쳐 댔다. 장인어른이 말리기 전까지 희준은 자신의 얼굴에 계속 싸대기를 갈겼다.


  "자네 왜 이러나. 자네가 뭘 잘못했다고..."

  "아녜요, 장인어른. 제가 잘못한 겁니다. 제가 지영이를 죽인 거예요."

  "자네 상심이 큰 건 아네. 지영이뿐만 아니라, 아기까지 갔으니..."


  그랬다. 지영이만 떠난 것이 아니었다. 뱃속에 있는 아기까지, 두 사람이 그의 곁을 떠난 것이었다. 그의 가슴이 또 한 번 저려왔다. 초음파 사진을 보며 희준을 닮은 아들이라며 기뻐했던 지영이었다. 벌써부터 아기 옷과 신발까지 집에 사다 놓기까지 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렇게 한 날 한 시에 산모와 아기가 가 버리다니, 희준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 불행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울고 또 울고 지칠 때까지 우는 것이 희준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희준은 이제 장례 준비를 하자는 장인어른의 말에도, 죽은 택시기사의 가족에게 소송을 해야 한다는 장모님의 말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장례식장 한쪽 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지영의 사진과 아기의 초음파 사진을 품에 안은 채.


  3일간의 장례가 끝나고, 지영과 아기의 납골함은 서울 추모공원에 안치되었다. 지영의 가족, 희준의 가족, 친구들, 지인들 등 많은 사람들이 함께 따라와 고인을 추모해 주었다. 희준의 친구들이 그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그는 위로의 말을 들을 정신이 없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매일 독한 술을 퍼마시며 지영을 그리워했다. 회사에 휴직계를 내고, 폐인처럼 집에서 술만 퍼 마셨다. 자다 일어나면 지영의 사진을 바라보며 울다가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다 잠에 들었다.

  그렇게 폐인 생활을 한 지 일주일이 되자, 희준의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그의 집에 찾아왔다가 그가 기절한 것을 발견하고, 놀라서 119에 신고를 했다. 구급대가 와서 그를 구급차에 태워 응급실로 데려갔다. 응급실 베드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그를 보면서 희준의 어머니가 말했다.


  "도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거니? 간 사람은 간 거고, 넌 살아야지."

  "지영이 없으면 전 살아갈 의미가 없어요."

  "제발, 이 엄마 부탁이다. 지영이 잊고 새로 시작하자."

  "......"


  그때,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연락을 받았는지 응급실로 찾아왔다. 링거를 맞고 있는 그를 보더니, 장인어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자네, 우리 딸을 사랑해주는 건 고맙네만, 자네라도 행복하게 살아야지, 이러면 하늘로 간 우리 딸이 기뻐하겠나?"

  "장인어른..."

  "자네가 얼른 털고 일어나서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지내는 걸 지영이도 바랄 거네. 부탁하네."

  "......"


  희준은 그 일이 있는 후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선, 운동부터 시작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한강변에서 조깅을 했다. 저녁에 퇴근하고 나서 피트니스센터에 가서 근력 운동을 했다. 또, 일체 입에 술을 대지 않았다. 회사 동료나 친구들이 술 마시자고 해도 절대 마시지 않았고, 집에 술을 사 두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일 외에는 인간관계를 깊이 만들지 않았다. 사무실 내에서도 사람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고, 가벼운 인사 정도만 했다. 그는 마치 일에 미친 사람처럼 사건이 들어오면 사건을 맡아 변호했고, 또 다른 사건이 들어오면 그 건을 맡아 해결했다. 소송에서 승소를 하고 나서도 동료들과 회식을 한다거나 동료, 친구들이 새로운 여자를 소개해 준다고 해도 일절 만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일, 집, 운동밖에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의 생활 반경 곳곳에 지영의 액자가 놓여 있었다. 그가 자는 침대 옆 탁자에도, 주방 식탁에도, 심지어 화장실 벽면에도 그녀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는 그녀의 사진을 지나칠 때마다 사진 속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도 잘 지냈어, 여보?"

  "여보, 오늘은 뭘 먹을까?"

  "여보, 오늘도 일 잘할게."

  "여보, 사랑해."


  그렇게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에게 사람들은 아내를 잃어서 반쯤 미쳐 있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그런 행동이 그녀를 그리워하고, 기억하는 나름의 방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를 그리워하거나 기억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온 생활의 중심에 그녀를 두지 않고서는 그리움을, 슬픔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연애를 못 하는, 아니 안 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의 사랑은 그에게 무의미했다. 그에게 지영은 처음이자, 끝사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일에 미쳐 있고, 운동에 미쳐 있고, 사랑에 미쳐 있는 그 남자의 사연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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