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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갈해리 Mar 09. 2023

어머니의 한글 공부 / 사랑하는 할머니

<따뜻한 편지 2326호>을 읽고

저에게는 두 분의 어머님이 계십니다. 저희 형제 셋을 낳아주시고 10여 년 동안 키워주신 한 분의 어머니는 몇 년에 걸쳐 암 투병을 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새어머니가 오셨는데 저는 반항은 기본이고, 거친 말도 쏟아냈습니다. 가시 돋친 말만 골라서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아버지가 새어머니와 하시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은 두 분 사이에 새 자녀를 갖고 싶었지만, 새어머니가 지금 키우는 삼 형제를 위해서라도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두 분의 대화를 숨죽여 들으면서 걷잡을 수 없이 반성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새 어머님께 너무너무 죄송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얼마나 속상하고 마음이 아프셨을지 마음이 아려왔고 저의 지난 행동이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세월이 흘러 저는 결혼을 하고, 어느덧 두 자녀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몇 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한 달에 1~2번 혼자가 되신 어머님을 찾아봬 안부를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어머님께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 있었습니다. 바쁜 업무를 마치고 걱정되는 마음으로 얼른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어머니, 무슨 일 있으세요?"

"어... 아범 바쁜데 미안하네... 괜히 큰일도 아닌데... 다름이 아니라 혹시 집에 애들이 쓰다 남은 연필이나 공책 있으면 갖다 주겠니?"


어머님 말씀을 듣고, 큰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의 마음이 들었지만, 궁금해서 다시 물었습니다.


"갑자기 연필하고 공책은 왜요?"

"그게 사실은 한글 공부를 시작해 볼까 해서..."


생각해 보니 어머님께서 한글을 잘 쓰지 못하신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님은 어릴 때 가정 형편이 어려우셔서 학교에 다니며 공부하는 대신 부모님을 따라서 돈을 벌어야 하셨다는 것을요.


80세가 다 되어 가시는 어머님은 평생 한글을 모르시는 게 한이 된 것 같습니다. 그날 퇴근길에 문구점에서 연필, 공책, 지우개 등 필요한 것을 사서 갖다 드렸습니다.


어머님의 어린 시절 공부를 못하신 한과 어려움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자식 된 도리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 전 여전히 부족한 불효자인 것 같습니다.


따뜻한 편지 2326호

어머님은 어린 시절 저에게 부유한 환경과 세상의 지식을 알려주지는 못하셨지만,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나눔을 몸소 실천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내 욕심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늘 '가장 낮은 자리'에서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웃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따뜻한 하루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마음 변치 않고 작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진심으로 어루만져 주는 언제까지나 진심 가득한 단체가 되겠습니다.



# 오늘의 명언

헌신이야말로 사랑의 연습이다. 헌신으로 사랑은 자란다.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


*출처 : 따뜻한 편지 2326호


따뜻한 편지 2326호 <어머니의 한글 공부> 편 잘 읽었습니다. 필자는 새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으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나눔에 대해서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면서 필자가 만든 단체인 따뜻한 하루에 대한 초심을 다짐하고 있군요. 그렇습니다. 헌신이야말로 사랑의 연습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헌신이 없었다면 아들인 필자가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마음을 체득할 수 없었겠지요. 정말 헌신으로 사랑은 자라나는 것 같습니다.


왼쪽부터 엄마, 할머니, 제갈해리, 아버지

저에게도 사랑과 헌신, 정성을 가르쳐 준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친할머니신데요. 친할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저를 많이 귀애하셨습니다. 물론, 예전에는 남아선호사상이 짙게 남아 있어서 여자 아이보다 남자아이를 귀하게 여겼기도 했지만, 할머니에게서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하고 컸던 아버지의 첫 자식이었기에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에게 주지 못했던 사랑을 제게 듬뿍 주셨던 할머니는 제 유년시절의 추억을 많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함께 놀이동산도 가고, 기차를 타고 시골 큰 집에 가기도 하고, 여행도 많이 다녔습니다. 방학 때는 할머니댁으로 놀러 가 아예 거기서 방학 내내 지낼 정도였습니다.


제가 어릴 때 툭하면 눈물을 자주 흘렸는데, 아버지께서는 남자가 눈물이 많다고 항상 저를 혼내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애가 울 수도 있지." 하면서 아버지에게서 저를 보호해 주신 분이 할머니셨습니다. 유년시절에 아버지가 저에게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분이셨다면 할머니는 저에게 하늘같이 높고 바다같이 깊은 하님처럼 자애로운 분이셨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천주교를 믿으셔서 종종 할머니와 함께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할머니의 세례명은 '요안나'셨습니다) 할머니가 방에서 조용히 주님과 성모님께 묵주기도를 올리실 때, 저도 할머니 옆에서 함께 기도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기차를 타고 상주의 시골 큰집에 갔던 제갈해리와 할머니.

나이를 먹어 가면서 그런 할머니께 저는 어리광도 많이 부렸지만, 투정도 참 많이 부렸습니다. 중고등학생 시기에 아버지에게 혼이 나면 저는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식사를 하지 않아 제 몸이 상할까 걱정이 되셨던 할머니는 (큰집에서 저희 집으로 놀러 오셨다가 부모님이 모두 출근하시고 할머니와 저만 집에 남아 있었을 때) 찬장에 있던 짜파게티 라면을 끓여 주셨는데, 짜파게티 라면을 끓일 줄 모르셨던 할머니는 물을 보통 라면처럼 부으시고는 가래떡을 썰어 넣으셨습니다. 저는 "짜파게티에 물을 이렇게 많이 넣으면 어떡해요?" 하면서 방문을 세게 닫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한참 뒤에 방문을 열고 나와 보니, 할머니는 물이 많고 가래떡이 들어간 짜파게티를 홀로 다 드시고 설거지까지 해놓으셨습니다. 이내 저는 할머니에 대한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할머니는 노안으로 눈이 침침하셔서 라면 봉지에 조그맣게 적혀 있던 조리법을 읽을 수가 없으셨던 것이었습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삼수를 하고 있던 저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희 집에 일주일 정도 머물다가 큰집으로 가셨던 할머니께서 중풍으로 쓰러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비롯한 저희 가족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 큰집으로 향했습니다. 큰집에 도착해 보니, 할머니는 자리에 몸져누워 계셨습니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시고, 몸의 오른쪽이 마비되어 운신하기도 힘들어 보이셨습니다. 아버지는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지만, '회복하기에는 이미 많이 늦은 상태'라는 의사의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상의해 저희 집에 몇 개월 정도 할머니를 모시기로 하고, 할머니를 간병할 준비를 차렸습니다. 아버지는 전동 침대, 휠체어, 성인용 기저귀, 턱받침 등 간병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 오셨고, 어머니는 할머니가 드실 음식(잘게 다진 야채죽이나 전복내장죽)을 준비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사 오신 기구들을 설치했고, 어머니가 준비한 음식을 (손을 쓰시지 못하는) 할머니께 직접 먹여 드렸습니다. 그렇게 3개월 동안 저희 가족은 돌아가면서 할머니를 돌보았고, 3개월 후 요양원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둘째 고모 댁에서 사진을 찍은 제갈해리와 할머니.

그런 할머니께서 7년 동안 요양원에 머무시다가 2015년에 돌아가셨을 때에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 애인과 함께 안산에 있던 저는 새벽 2시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급하게 택시를 타고 왔습니다. 택시를 타고 왔을 때에는 (부모님과 고모들이 오셔서 임종을 지키셨고)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습니다. 이미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할머니의 손을 잡았지만,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습니다. 너무 충격을 받아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멍하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던 듯싶습니다. 상주인 아버지, 고모들, 친척 형들과 누나들, 동생들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왔습니다. 저는 둘째 날 할머니의 '염(殮)'을 보지 못했는데, 아마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셋째 날 할머니의 관을 운구하고 화장터에 할머니의 관이 들어가 화염이 솟구치는 모습을 보자, 속에서 참고 있던 슬픔이 터져 나와 꺽꺽대면서 통곡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정신없이 우는 모습을 본 사촌형과 사촌여동생이 저를 밖으로 데리고 나와 다독여줬습니다. 저는 아마 그때 사촌들에게 할머니께 잘못한 것들이 생각나 너무 죄송하다고, 할머니를 다시 보고 싶다고 얘기했던 것 같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8년이 지났지만, 저희 가족은 매해 할머니의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매년 (가족들과 별개로) 할머니 생신 즈음인 5월이나 6월에 꼬북이와 할머니 납골당을 찾습니다. 할머니가 계신 납골함 칸에 작은 꽃다발을 달고는 속으로 할머니께서 내세에 평안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저와 저희 가족, 친척들, 지인들을 굽어 살펴주시기를 청합니다. 할머니, 그곳에서 저희를 지켜봐 주세요. 할머니께서 주신 사랑을 전하면서 살겠습니다. 사랑합니다, 할머니.


할머니의 칠순 잔치에 모인 일가친척들. 제갈해리는 어디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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