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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풀 Jun 11. 2020

지오의 꿈

 

"엄마, 나 라푼젤 언니처럼 머리 기르고 싶어."     


네 살 때까지 한 번도 자른 적 없는 지오의 머리 길이는 겨우 귀를 덮을 정도였다. 숱도 적은 듬성듬성한 머리는 마치 털 빠진 오리를 연상시켰다. 지오의 꿈은 어깨까지 찰랑대는 긴 머리카락을 갖는 것. 그동안 자기 눈에 긴 머리로 보이는 가발을 참 많이도 썼다. 지오의 헤어스타일 변천사를 보는 절로 웃음이 나온다.


     

ⓒ 바람풀



한동안 집안에서 분홍 털모자를 쓰고 살았다. 변화를 주고 싶으면 모자 위에 꽃 달린 머리띠를 살짝 얹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랍에서 발견한 언니의 분홍 스타킹! 이건 다양한 연출이 가능한 정말 놀라운 가발이었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양손에 잡고 지오는 저녁마다 노래를 불렀다.


 "멈춰, 고양이 한 마리 나타났는데, 고양이 한 마리 나타났어요. 안 돼! 안 돼! 엉덩이 씰룩씰룩"


 "다음엔 책상 노래를 부를 거예요. 책상 노래를 배웁시다. 랄랄라. 책상 노래를 배웁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괴산에 사는 아이예요. 오늘은 바람 노래를 부를 거예요. 바람 노래를 불러 봐. 빨리 바람 노래를 불러 봐. 으으으음. 바람 노래를 배워 봐."



‘키즈 래퍼’란 오디션 프로그램이 생긴다면 우승을 노려봐도 될 만큼 언제나 즉흥 랩과 새로운 춤을 선보였다. 이마에 땀방울 송골송골 맺혀도 결코 벗지 않았던 언니의 분홍 스타킹. 노래 한 곡이 끝나면 쪼르르 방으로 들어가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기만의 무대에서 스스로 헤어와 의상까지 챙기며 자작곡 한 노래를 뽐내는 꼬마 아티스트였다.



 

 "엄마, 아멘 할 때 쓰는 모자 어딨어?"


털모자를 쓰던 겨울이 가고 봄이 지나 여름이 왔다. 스타킹 머리가 슬슬 지겨워질 때쯤 성당에 가서  미사보의 존재를 알게 된 지오. 속이 비치는 하늘하늘한 천은 머리에 써도 덥지 않고 가벼운 데다 아름답기까지 했다. 무더운 여름에 쓰기 딱 좋았고, 우아하고 성스러워 보였다.

 

 


“엄마, 이것 좀 봐. 내 머리가 땅에 닿아!”


감물 염색한 내 스카프도 지오의 예리한 눈을 피해 갈 순 없었다.

 


“엄마, 머리가 강물처럼 흘러 가.”


심지어 새로 바꿔 달기 위해 꺼내 둔 레이스 커튼도 지오의 머리카락이 되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머리에 뒤집어쓴 걸 벗지 않는 아이가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디즈니 만화 속 미모의 캐릭터들이 조금은 미워졌다.


 '긴 머리가 그렇게나 갖고 싶었니? 하지만 걱정 마. 조금씩 조금씩 자라고 있으니까. '


시간이 흘러 열 살이 된 지금, 드디어 등을 완전히 덮을 만큼 찰랑찰랑한 머리카락을 갖게 되었다. 물론 지금까지 한 번도 자르지 않았다. 이렇게 애지중지 기른 머리는 소아암 환자들을 위해 기부하기로 했다. 간절히 긴 머리를 원했던 지오는 머리카락 기부에 흔쾌히 동의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삭발까지 해야 하는 아이들 맘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것이다. 그들에게 가발이 얼마나 절실한지도. 머리를 묶은 상태에서 25cm 이상 잘라 비닐봉지에 넣어 보내면 된다고 한다. 올 겨울 즈음에 머리카락 컷팅식을 멋지게 해 줘야지.


 '십 년간 기른 네 머리카락이 누군가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다면 정말 멋질 거야. 네 오랜 꿈의 결정체가 다른 아이에게 새로운 꿈을 안겨줄지도 모르잖아.'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 :2007~2018년까지 12년간 모발 기부 캠페인 실시. 2019년 2월 28일 자로 캠페인 종료

*어머나 운동본부(www.givehair.net): 현재는 이곳에서 머리카락 나눔 캠페인을 하고 있어요.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에서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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