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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풀 May 31. 2020

느티나무의 정령

ⓒ 바람풀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이들은 느티나무 할아버지한테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하자마자 능숙하게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는 두 딸. 여기만 오면 저 굵고 단단한 나무 사이를 세 번 이상 뛰어넘어야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마치 지켜야 할 신성한 의식처럼 아이들이 반복했던 놀이다.

느티나무는 오백 살이 넘었다. 들녘에 연둣빛 물이 차오른 사월 중순까지도 느티나무는 휑하니 가지만 남아있었다. 나무가 죽은 걸까? 좀체 새순이 돋지 않는 나무를 보며 생각했다. 이제는 안다. 뒤늦게 초록이 무성해진다는 사실을. 사월 말부터 잎을 틔우기 시작한 느티나무는 오월이면 맹렬한 속도로 초록이 번진다. 여름이면 공중에 뜬 거대한 숲이 되어 시원한 그늘을 선사한다. 매년 반복되는 그 모습을 매번 감탄하며 바라본다.


몇 년 전까지 햇살이 잦아들 때면 어린 두 딸의 손을 잡고 동네 산책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아이들은 어디든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토끼풀을 보면 풀썩 주저앉아 하얀 꽃반지를 만들어 끼고, 땅에 몸을 붙인 채 지나가는 개미 떼 행렬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강아지풀의 까슬까슬한 감촉을 살갗으로 느끼고 이 풀 저 풀 코끝에 대고 냄새 맡고, 깨알만 한 풀씨를 죄다 입에 넣어 맛을 보기도 했다. 아이들 눈 앞에 펼쳐진 자연은 경이로 가득 찬 놀라운 세상이었다. 눈이 마주친 생명에게 몸짓으로 일일이 화답해주는 아이들을 따라 내 시선도 낮게 이동했다. 흙속에서 꼬물대는 벌레와 나비와 잠자리의 날갯짓, 들풀에 맺힌 깨알 같은 씨앗들. 몸을 납작 엎드리고 가까이 다가간 뒤 한참을 기다려야만 볼 수 있는 작고 여린 것들이었다.  


느티나무는 여전히 마을 한가운데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한 자리에서 오백 살 넘게 살았음에도 그 푸르름을 잃지 않는 싱싱한 청춘이다. 이제 곧 풍성한 잎들이 이보다 더 시원할 수 없는 그늘을 만들어 주겠지? 청량한 바람과 새소리는 그 아래 머무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급 선물이다. 


오늘도 마을의 느티나무를 보며 안부를 묻는다. "느티나무야, 안녕?"  딸들은 할아버지라 불렀지만 나는 '이웃집 토토로' 같은 귀여운 요정이 저 안에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두 그루의 나무가 하나로 합쳐진 걸까? 외롭지 않기 위해. 나무 사이로 햇살과 바람이 흐른다. 이번에는 내가 둥치 사이를 뛰어넘을 요량으로 느티나무에 올라가 본다. 저 사이를 통과하는 동안 수만 년 감춰져 있던 마법의 빗장이 스르르 열리지 않을까. 숲의 요정 토토로가 나타나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진 않을까. 태곳적 신비가 가득한 세상으로. 

 "쾅" 뛰어내린 순간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이들은 폴짝폴짝 가볍게만 뛰어내리던데. 운동을 해야겠다. 다음번엔 나도 살랑살랑 뛰어야지. 느티나무의 정령이 내 안에 깃들기를 바라는 우리만의 의식이다. 오래오래 푸르고 싱싱하라는 기원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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