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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풀 May 25. 2020

흐르는 물과 함께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간 적이 있다. 아홉 살, 아니 열 살이었나? 집 앞 개울가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발을 헛디뎠던 것 같다. 물속은 온통 뿌연 흙색이었다. 전날 내린 비로 개울은 평소보다 불어나 있었다.  


그 장면이 떠오른 건 대학시절 책에서 본 한 장의 그림 때문이었다. 영국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 이 그림 속 여인의 모습에서 까마득히 잊고 있던 장면 하나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다. 생과 사의 경계에 놓인 여인의 표정과 습한 기운까지 생생하게 전해지는 강렬한 초록의 이미지는 단번에 나를 사로잡았다. 

ⓒ 바람풀


내가 기억하는 건 물속에 누워있는 장면과 물을 뚝뚝 떨구며 맨발로 걸어가던 내 모습뿐이다. 중간의 기억은 없다. 물속에서 발버둥 치다 일어났으니까 살아 나왔겠지만. 흙탕물 속에 누워 뿌연 수면을 올려다본 단절된 기억만이 엄마 자궁 속처럼 편안하게 각인되어 있다. 혹시 왜곡과 편집이 만들어낸 기억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또다시 물에 대한 기억이 강력 소환된 사건은 둘째 딸 지오가 막 두 돌을 넘겼을 무렵에 일어났다. 




태풍을 동반한 세찬 폭우가 쏟아진 다음 날이었다. 두 딸과 누렁이를 데리고 집 앞에 흐르는 하천으로 나가보았다. 누렁이는 정목수가 이웃 마을에서 데려온 오십일 된 골든 레트리버다. 집 짓는 현장에서 점심을 먹는데 식당 뒷마당에 골든 레트리버 가족이 있었다고 했다. 황금빛 털을 휘날리며 기품 있는 자세로 앉아 있는 아빠 개의 모습에 반했다나. 평소 소 한 마리를 키우고 싶었는데 덩치가 큰 골든 레트리버가 소와 가장 닮은 모습이니 소를 키운다 생각하고 이 녀석을 키우고 싶었다나 뭐라나. 해서 내 생각은 어떠냐며 나를 데려가 골든 레트리버 가족을 보여주었고, 그 자리에서 자기 일당을 훌쩍 뛰어넘는 거금을 주고 사 온 개가 바로 누렁이다.  강아지를 보자 동물을 유난히 좋아하는 지오가 아주 신이 났다. 누렁이랑 같이 맨발로 마당을 뛰어다니고 아침마다 동네 산책도 시켜주고 밥도 먹여주고, 저녁이면 동네 언니 오빠들과 신나게 달리기도 했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누렁이를 데리고 산책에 나선 길이었다. 아랫집 사는 여섯 살 뀬이와 옆 동네 사는 둥둥이가 다리 밑에서 놀고 있었다. 우리도 다리 아래로 내려갔다. 장맛비가 내리고 난 뒤라 물살이 제법 셌다. 빗물에 휩쓸려 내려온 흙더미가 둥근언덕처럼 쌓여 있었고 그 위에서 아이들은 맨발로 흙장난을 하며 놀았다. 

 "야, 너 그만해!" 

 누렁이가 자꾸만 아이들이 벗어놓은 신발을 물어뜯었다.  그만하라 해도 말을 듣지 않아 잠깐 주위를 돌리기 위해 자리를 뜬 게 화근이었다. 누렁이 목줄을 끌고 올라와 동네 할머니들이 앉아 계신 느티나무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공포 영화 속에서나 들어봤던 날카로운 비명이 다리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나린이 목소리였다. 


 "엄마, 지오! 지오!"


 뭔가 큰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하고 재빨리 다리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지오가 저리로 사라졌어.” 


 나린이가 가리킨 곳에 지오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급류에 휘말려 이미 떠내려간 뒤였다. 불어난 흙탕물이 아이를 집어삼킨 것 같아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물속으로 들어가 무조건 뛰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십여 미터 앞에 둥둥 떠내려가는 지오가 보였다.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어서 빨리 아이를 건져 올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울퉁불퉁한 돌바닥과 급물살 때문에 쉽사리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입이 바짝 마르고 속이 타들어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위험한 공간에 어린아이들만 두고 자리를 비우다니. 이런 사고로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남은 생은 지옥이겠구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최악의 경우를 생각했다. 내 온 세포와 근육과 신경과 쓸 수 있는 기운을 탈탈 끌어 모으고, 저 우주의 기운까지 빌려와 떠내려가는 지오를 간신히 건져 올렸다. 눈을 말똥말똥 뜬 채 입술이 파랗게 질린 지오가 내 품에 쏙 들어왔다. 강을 따라 도롯가로 달려온 동네 아저씨가 풀숲으로 내려와 지오를 받아주셨다. 


 "애가 떠내려 갔대. 뉘 집 얘여?"


 강둑 위로 간신히 올라가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얼마 전 끊은 젖을 다시 물렸다. 밭일하던 마을 분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온몸에 힘이 탁 풀리고 나니 그제야 맨발에 다리 곳곳이 피와 멍으로 얼룩진 내 두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 안 있어 119 구급차가 도착해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이상은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 병원에 가서 폐 사진을 찍어 보라 했고, 몇 군데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결과 괜찮다는 진단을 받았다. 25개월 된 아가였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가볍게 물 위를 둥둥 떠내려갔기 때문에. 엄마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건져 올렸기 때문에....


지오와 누렁이    ⓒ 바람풀



"무서워. 으앙, 무서워, 잉. 언니도 무섭고 엄마도 무서워. “ 


한동안 지오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무서워하며 몸을 떨었다. 그날부터 불과 일주일 전에 간신히 끊은 모유 수유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게 어떻게 끊은 건데, 아이고, 아이고.’ 저녁 내내 몇 시간 동안 젖을 물렸다. 수유를 끊기 위해 지난 몇 달간 고생한 걸 생각하면 몹시 심란했지만, 아이를 안심시킬 수 있는 무기가 살아있어 다행이라 여겼다. 




지오가 어릴 때 가장 좋아했던 그림책은 '물 아저씨 이야기'다. 수많은 옛이야기와 새로 나온 그림책들을 아무리 보여줘도 지오는 날마다 책장에서 이 책을 가져와 읽어 달라고 했다.


 어느 날, 바닥에 고인 물방울들이 꿈틀꿈틀 움직이더니 수정처럼 투명하고 푸른 사람이 되었어. 그가 바로 물 아저씨야. 소용돌이치는 갈고리 모양의 머리카락과 괴상한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무시하고 멀리했지. 물 아저씨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밤의 고요함 속으로 사라졌어. 아저씨는 꽃들에게 물을 주고 인사하는 강아지들을 씻겨주고 메마른 빈 병에 물을 채워 넣기도 했어. 물 아저씨가 착하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도 있었지. 거리의 청소부들은 청소를 하다 목이 마르면 물 아저씨를 불렀어. 아이들도 물 아저씨에게 다가가 손을 벌렸어. 

 "아저씨, 저희에게 마실 물 좀 주시겠어요?" 그러던 어느 날 물 아저씨는 빗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어. 

 "이리 오렴! 여기로 돌아오렴! 여기에서 우리와 같이 있자. 너는 물로 만들어졌잖니. 그러니 너는 강이나 바다, 빗속에서 살아야만 해." 물 아저씨는 계속해서 걷고 걸어 어느 작은 마을에 도착했어. 그곳에 있는 낡은 분수 하나를 발견해 그 안으로 들어갔지. 그리고 물 아저씨는 색색의 물을 뿜어내는 아름다운 물이 되었단다.



 "지오야, 너 여기로 떠내려가던 거 기억해?"


며칠 전 아이 손을 잡고 산책하다가 물었다. 아이는 7년 전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나중에 커서 불시에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엔 집 앞에 흐르던 물의 감촉과 물 아저씨가 동시에 생각날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물 속으로 영영 사라질 뻔 했던 두 아이는 다행히 엄마와 딸로 만나 이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참 다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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