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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풀 May 19. 2020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지오

      

구 년 전 봄이었다. 집 지을 때 쓸 나무를 사기 위해 정목수를 따라 삼척으로 향하던 길. 괴산을 떠나 문경, 제천, 원주를 지나는 내내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꽃들 사이로 연둣빛 새순이 바람에 팔랑거렸다. 녹음이 짙어지기 전 연초록 잎새들은 해마다 가슴을 일렁이게 한다. 아기 살결처럼 연하고 보드라운 새순에서 '폭'하고 움트는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때 내 안에도 작은 생명이 꿈틀대고 있었다.     


정목수에게 주워듣기로 소나무는 육송과 해송으로 나뉘는데 붉은색이 돌아 적송이라 불리는 육송은 예로부터 한옥의 대들보 같은 구조재로 많이 쓰였다고 한다. 특히 봉화의 춘양면에 서식하는 소나무는 춘양목, 울진과 삼척 지역 소나무를 금강송이라 칭했단다. 춘양목이니 금강송이니 하는 말은 자라는 지역이 다를 뿐 같은 소나무라는 얘기다. 수형이 곧고 목질이 촘촘해서 예로부터 궁궐 건축 목재로 쓰기 위해 지정해 놓은 곳이란다. 대관령에서 벌목한 육송을 삼척의 한 목상에서 판매한다는 정보를 듣고 본인이 처음 짓는 집을 위해 직접 목재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 바람풀

                                                                                                                     


삼척은 꽤 멀었다. 탁 트인 해안도로와 환한 꽃길을 달리며 들뜨고 신이 났다. 지치고 피곤하기도 했다. 딱 반반이었다. 너무 오랜만의 여행이라 설레었고, 7개월 된 아기를 배 속에 품고 카시트를 거부하는 세 살짜리 아이를 달래며 가기엔 몸이 너무 부대꼈다. 강도 높은 육아가 겨우 끝나나 했더니 이제 여름이 오면 두 배로 품이 드는 육아와의 대전쟁이 시작될 터였다.     


벚꽃 흩날리는 도로를 달리며 지난 여행을 떠올렸다. 남편도 아이도 없던 시절 홀로 가벼이 걸어 다녔던 수많은 길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나에겐 날개가 있었던 것 같다.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늘 부유하던 마음은 낯선 곳을 향해 자주 날개를 펼쳤다. 꽃과 바다를 실컷 구경하며 길을 달리는 것도 거의 삼 년만이었다. 시골에 살며 힘든 날도 많았지만 그 시간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자연의 은덕이었다. 산과 계곡, 하늘과 바람과 풀과 나무..... 나를 둘러싼 이 모든 환경이 든든한 위로와 백그라운드가 돼주었다.     


승차감 떨어지는 구형 트럭을 타고 달리자니 열두 시간 넘게 비포장 밤길을 달렸던 지난 시간이 떠올랐다. 그 당시 내게 절실한 게 무엇이었는지, 다시 홀가분하게 길 위에 설 수 있을지. 그때는 어떤 고민과 생각을 안고 있을지... 지나치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목재를 다듬을 제재소를 소개받고 돌아오는 길에 강릉에 들렀다. 경포대 수양벚꽃길은 봄나들이 온 가족들로 북적였다. 무거운 배를 왼손으로 받치고 오른손은 나린이 손을 잡고 걸었다. 몇 달 후면 내 왼손은 둘째 아이 손을 잡고 있겠지.


경포대를 출발해 4시간 넘게 달려 쌍곡계곡 길로 접어들었다. 조금만 더 가면 우리 집이 나온다. 언덕 위에서 잠시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까만 밤하늘에 환한 달이 떠 있었다. 알싸한 밤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언덕을 넘고 구불구불 고갯길을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3개월 뒤에 둘째가 태어났다. 밤새 요란하던 천둥 번개와 장맛비가 수그러든 다음날 아침,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된 지 두 시간 만이었다. 푹푹 찌는 2011년 여름이 출산과 함께 시작되었다. 둘째 딸에게는 지오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지오! 지구 곳곳을 자유롭게 누비고픈 내 욕망의 투사였다.   

 



“안녕, 지오야. 난 나린이 언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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