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낭독 녹음기
새벽 네 시, 동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푸른 허공에 유난히 큼지막한 별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동이 트려면 아직 두어 시간은 기다려야 하는 어슴푸레한 새벽, 잊고 있던 그 시린 질감을 온몸에 새겨 넣고 외출할 채비를 했다.
EBS와 브런치가 공동으로 기획한 ‘나도 작가다’ 1차 공모전에 글이 당선되었다가 취소되는 일이 있었다. 독립출판으로 발표되었다는 게 취소 이유였다. 그 후 EBS 오디오 천국에서 당선 작가들의 낭독을 들으며 마음이 쓰렸다. 누군가의 음성을 통해 전달되는 글에는 다른 질감의 감동이 있다. 한 사람의 몸을 통해 전달되는 영혼의 울림이랄까? 특히 작가가 자신의 글을 읽어줄 때면 글에 생략된 미세한 숨결까지 느껴져 평소에 팟빵으로 즐겨 듣는 편이다. 당선 취소보다 낭독할 기회가 사라진 게 더 아쉬웠다.
도전과 실패, 그 과정 속에는 나다운 행동과 나다운 선택이 깃들어 있습니다.
용기 내어 시도할 때에도, 주저 않게 될 때에도 나다운 ’ 어떤 것‘이 발동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상처를 회복하는 나만의 방법일 수도 어깨를 다독여준 말일 수도 정성스러운 음식일 수도 있습니다. 책 속 문장이나 영화 속 대사, 좋아하는 사람의 미소, 규칙적인 습관일 수도 있지요.
그러한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우리는 더 나다운 삶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지난 7월, 브런치 알림을 통해 공모전 마지막 주제가 전달되었다. 주제에 대한 설명만 읽어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를 나답게 나로서 소중히 대하고 품위 있게 만들어 주는 무언가에 대해
들려주세요.
이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자 당장 글이 쓰고 싶어 졌다. 저 문장들이 ‘당신은 소중하고 품위 있는 사람이에요.’ 하고 속삭이는 듯했다. 글 두 편을 응모했고 그중 '나무처럼 살고 싶었어'가 당선되었다. 드디어 라디오 녹음실에서 내 글을 낭독할 기회가 온 것이다.
단 십여 분 남짓의 낭독을 위해 꼭두새벽에 일어나 일산으로 가는 날이었다. 읍내에 차를 주차하고 동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동쪽 하늘이 불그스름해지며 동이 터왔다.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아침 햇살을 받은 거대한 은갈치 한 마리가 허공에 입을 내밀며 반짝이고 있었다. ‘저게 롯데월드 타워구나.’ 올림픽대교를 통과한 버스가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했다. 강변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출근시간의 2호선. 지하철이 멈출 때마다 사람들은 타고 내리길 반복했다. 이제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의 시선으로 그들을 찬찬히 바라볼 여유가 생겼다. 지하철 손잡이를 부여잡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이십 대의 내가 보였다. 하루 걸러 한 번씩 체했고, 급체로 인해 호흡곤란을 일으키며 지하철 안에서 쓰러지기도 했던 나. '무엇에 그토록 쫓겼던 거니? 왜 그렇게 무기력한 표정이니?' 중년이 된 내가 그때의 안쓰럽던 나를 꼭 안아주었다. 각자 어딘가로 향하는 모든 이들을 그렇게 안아주고 싶은 날이었다.
홍대입구역에서 내려 경의 중앙선 환승장을 통과해 일산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도심에서 멀어질수록 지하철 안은 한산 해졌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전동차 안에서 시야에 들어온 모든 것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ktx로 환승할 분은 이번 역에서 내리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행신역이다. 여기서 출발하는 기차는 어디로 가는 걸까? 시원하게 뚫린 네모창 너머로 낯선 동네의 풍경이 펼쳐졌고, 아침 햇살이 한 노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지하철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각기 다른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마스크를 벗어버리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싶었다. 드디어 일산역.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타고 집을 나선 지 다섯 시간 만에 EBS 사옥에 도착했다.
초등학교 때 내 별명은 ‘따발총’이었다. 선생님들은 그날의 날짜를 보고 그 번호에 해당되는 학생을 무작위로 호명해 책 읽기를 시켰다. 그 시간이 내겐 지옥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읽다 보면 곧 숨이 차올랐다. 호흡은 가빠지고 얼굴은 붉어지며 온몸이 뜨거워졌다. 발음은 내 숨과 함께 꼬이고 엉켰고 말의 속도는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그런 내게 한 선생님이 저 험악하고 무신경한 별명을 지어준 것이다. 비단 책 읽기만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도 각종 회의 자리에서 내 의견을 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말을 많이 했다 싶으면 금세 목이 아파왔고 목소리 떨림 증상이 나타났다. 어눌한 말솜씨로 내 의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날에는 잠도 이루지 못했다. 잘 읽고 잘 말하고 싶었다.
난생처음 와 본 방송국. 드디어 라디오 부스에 앉았다.
“제가 큐 사인하면 낭독해 보세요.”
밀크 피디님의 친절한 안내를 받고 프린트해간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삼분의 일 쯤 읽었을 때 피디님이 들어오셨다.
“너무 잘 읽으시는데요. 지금까지 하나도 안 틀리셨어요. 속도도 적당하고요. 좀 더 누군가에게 말하듯이만 읽으면 될 것 같아요. 연습 많이 하셨나 봐요.”
칭찬을 받다니, 내 안에서 맑은 샘물이 퐁퐁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연습한 티가 났나 보다. 살짝 발음이 꼬인 두 문장만 다시 읽고 녹음이 끝났다.
“두 번 녹음하는 거 아닌가요?"
"코로나 이후로 한 번만 녹음해요."
뭔가 아쉬웠다. 옆에 게스트를 모셔서 북토크라도 이어가고픈 마음이 들었다. '뭐지? 이 기분은.' 낭독하는 동안 회전의자를 좌우로 흔들며 여유를 부리는 내 모습이 놀랍기까지 했다.
“엄마 그건 늙은 사람이 좀 젊어 보이려고 하는 말투 같아. 이렇게 해야 자연스럽지. 잘 읽는 포인트는 이런 거야.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또박또박 읽기를 잘하는 둘째 딸의 조언이 있었다. 남편은 내 입에 볼펜을 물려주었다. “엄마, 내가 글을 다 외운 것 같아.” 원고를 읽다 보면 딸이 보지도 않고 뒷문장을 술술 읽었다. 내가 낭독한 걸 휴대폰에 녹음해서 들어보기도 했다. 처음 해 본 일이었다. 녹음된 내 목소리를 혐오했으니까.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반복해서 들을수록 내 낭독이 제법 괜찮게 들리는 거였다. 호흡도 차분해지고 음성도 점점 안정되는 게 느껴졌다. 낭독이 좋다는 칭찬을 듣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 같았다.
녹음을 마치고 나와 방송국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J언니를 만났다.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으로 응모한 또 다른 글, ‘내 영혼의 도반’ 속 주인공이다. 언니의 안내를 받으며 처음으로 일산 호수 공원을 걸었다. 늘 보는 초록인데도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일렁이는 호수의 물결을 보며 자작나무와 버드나무 숲길을 걸었다. 그리고 호숫가 벤치에 앉아 언니를 떠올리며 쓴 글을 낭독해 주었다. 휴대폰에 내 음성을 녹음한 언니는 반복해서 듣고 또 들을거라 했다. 훗날 자신의 무덤에 이 글을 함께 묻어달라고 웃으며 말했다.
언니와 헤어지고 고속버스터미널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퇴근시간의 지하철 안, 지쳐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내 읽기의 두려움이 무엇에서 비롯된 건지 알 것 같았다. 대부분이 그렇듯 나의 이십 대는 애쓰며 동동거린 날들이었다. 잘하려고 애쓴 탓에 몸은 늘 경직되었고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내 자아는 계속 쪼그라들었다. 내 호흡대로 숨쉬는 방법을 몰랐다. 두려움 없이 글을 술술 읽을 수 있게 된 건 몸이 자유롭고 편안해졌다는 의미가 아닐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깊게 숨을 들이쉬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벽별과 밤하늘의 별 사이, 그 찬란했던 어느 하루. 내 시야에 들어온 모든 것에 사랑과 감사의 말을 전한 날이었다. 숨만 잘 쉴 수 있고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인생은 살만하리라.
자연 속에서 살며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해진 나.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쓰고 낭독까지 마치고 나니 나다움으로 한껏 충만해진 기분이었다. 내가 무시하고 등 돌렸던 나에 대한 새로운 발견. 뒤늦게라도 알게 되어 기쁘다. 내 낭독도 제법 괜찮다는 것을.
낭독한 글
'나의 시작, 나의 도전'에 응모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