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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풀 Oct 29. 2020

히말라야 베이비

프롤로그


ⓒ 바람풀



지도를 펼치고 남한 땅 정 가운데를 손으로 짚으면 내가 사는 마을이 나온다.  나를 가운데 두고 산들이 강강술래를 하는 것처럼 어디서나 산자락에 시선이 막힌다. '나는 어쩌다 이런 산골마을에 들어와 아이 엄마로 살게 되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혼에 일도 관심 없던 까칠하고 예민한 도시 여자, 그게 바로 나였다.


산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히말라야를 떠올렸다. 나를 이 마을로 인도한 건 바로 그곳에서의 시간 때문이었으니까. 서른이 되던 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네팔로 떠났다. 거대한 빙벽에 맞선 등반가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대단히 은밀하고 매혹적이었으며, 산에서 청춘을 보낸 전설적인 산악인의 이름만 떠올려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여행은 예상보다 길어졌다. 네팔을 비롯해 티베트, 인도, 파키스탄, 중국 등 히말라야 산맥에 인접한 나라들을 떠돌다 집으로 돌아오니 한 해가 훌쩍 지나있었다. 암담했던 이십 대 끝자락에서 만난 히말라야는 내게 구원과도 같았다. 짙푸른 창공에 은빛으로 빛나던 설산은 신비로 가득했고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생에 대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아침에 일어나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하고 날마다 길을 걷는 일. 그게 전부인 나날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시커멓던 마음에 뽀얀 뭉게구름이 두둥실 피어올랐다. 이렇게 평화롭고 충만해도 되는 건지 조마조마할 정도로. 새롭게 깨어난 감각이 길 위에서 만난 모든 것과 열렬히 교감했다. 하늘과 바람과 노을과 숲. 그리고 어린이들. 내가 발견한 아름다움은 그런 것들이었다. 안나푸르나 산속에서 수줍게 꽃을 건네고 달아난 등굣길의 소녀와 흙집 마당에서 맨발로 뛰놀던 어린 남매, 풀꽃 냄새 가득한 아이들과 이들을 품어주는 작고 예쁜 고산 마을. 그곳에 머무는 동안 자연 속에서 생명을 낳아 키우고 싶다는 마음이 움트기 시작했다.


우리 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이렇게나 많단다 하고 내가 놓치며 살아온 것들을 아이들에게 알려줘야지. 변화하는 하루와 계절의 흐름을 감지할 줄 알고,
작고 여린 것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건네며 이웃의 소중함을 알게 하는 것.
내가 뒤늦게 깨달은 것들을 아이들에게 조곤조곤 들려줘야지.
한 알 한 알 구슬을 엮듯 작은 기쁨을 소중히 꿰다 보면 너만의 빛나는 순간을 만날 수 있다고, 자유롭게 네 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말해줘야지.

어쩌면 그건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아기가 태어나면 나도 아이들과 더불어 새롭게 성장하고 싶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라고 조용히 외치며 활동하는 '풀꽃세상'은 새나 돌에게 풀꽃상을 드리는 환경단체로 내가 지금의 남편을 만난 곳이다. 목수 일을 배운 남편은 시골생활의 동반자로 맞춤한 사람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우리는 산골마을에 둥지를 틀었고, 신혼여행으로 네팔 트레킹을 떠났다. 산스크리스트어로 풍요의 여신을 뜻하는 안나푸르나, 무수히 지나친 고산 마을 그 어디쯤에서 생명의 씨앗이 내 몸으로 들어왔다. 바로 히말라야 베이비였다. 배 속에 들어온 아기와 함께 나도 다시 태어난 아이가 되었다.


아이를 낳아 키우며 깨달았다. 내가 알려주고 싶은 진실을 그 어린 영혼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저 함께 있는 순간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축복된 성장을 지지해주는 것이 부모의 몫이라는 걸. 누군가 오랜시간 나를 지켜봐주며 내 말에 깊이 공감하고 격려해주는 것. 한 생을 살면서 그것보다 든든한 위로가 또 있을까? 내가 원했던 따뜻한 어른, 나 자신이 그런 부모이자 이웃 아줌마로 살면 되는 것이다.


계곡에 풀어놓으면 날다람쥐처럼 날아다니고 개울에서 헤엄치며 다슬기와 물고기를 친구 삼아 놀 줄 아는 아이들. 산딸기와 오디를 따먹고 달빛 산책도 즐길 줄 아는, 들풀처럼 야생동물처럼 자란 마을 아이들. 축복받은 자연과 모든 아이를 내 자식처럼 돌봐주는 마을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날들이었다.

 

시대가 아무리 빠르게 변해가도 자연과 어린이만은 꼭 지켜내야 한다는 믿음이 점점 견고 해지는 요즘이다. 미래 세대도 이렇게 놀 수 있기를 희망하며 지난 십 년 간 산골아이들과 함께 한 순간이 많은 분에게 가 닿기를 희망한다. 이 책에 담긴 글과 그림을 통해 내 안의 어린 나를 다독일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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