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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풀 Nov 01. 2020

손이 닿는 순간


ⓒ 바람풀



고모재 옛길을 걷다가 마른 잎에 붙어 있는 뭔가를 발견했다. 불룩한 모양의 연둣빛이 너무 귀여워 손바닥에 올려 한참을 보았다. 집에 와서 찾아보니 유리 산누에나방의 고치집이란다. 이렇게 아름다운 벌레집이라니! 이 안에서 자란 아이는 나방이 되어 어딘가로 훨훨 날아갔겠지?

그 후로 산책길에 꽤 자주 만났다. 가지만 앙상한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아이, 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아이. 전에는 몰라서 그냥 지나쳤다면 알고 나니 눈에 보이더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 상큼한 색과 부엉이를 닮은 귀여운 모양새.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모양의 집을 짓는데 얘들은 어쩜 이리 똑같은 형태와 빛깔의 집을 짓는 걸까?"

"개네들 유전자에 저장되어 있대요."

함께 걷던 M이 말했다. 생각해보니 벌도 새도, 다른 곤충들 모두 그들만의 집 짓는 법을 알고 있구나.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때가 되면 스스로 알아서 집을 짓는구나.




화양동 계곡을 걷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이 세상 소리가 아니었다. 두리번거리다가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망개나무 잎이었다. 잎을 크게 벌리며 가을을 노해하고 있었다. 땅으로 돌아가기 전에 부르는 마지막노래라고 했다. 태곳적 아이의 맑고 명랑한 울림이었다. 내년에도 다른 아이의 노래를 들으러 꼭 와 달라고 나에게 당부했다. 잎 옆에 조그만 하트 모양의 점이 귀엽게 씰룩거렸다. 순간, 우울했던 마음이 싹 날아갔다. 기분이 더없이 상쾌해졌다.




아그배나무에서 아기배가 열리는 줄 알았다. 사월에 본 아그배나무 밭은 흰꽃이 만발한 꽃대궐이었다. 순백의 웨딩드레스 자락을 허공에 걸어 둔 것처럼 눈부셨다. 시월에 만난 나무에는 새빨간 열매가 조롱조롱 달려있었다. 한 알 따서 살짝 배어 물었다.

"넌 아기 꽃사과구나!" 시큼 달큼한 맛이 꼭 새초롬한 사춘기 아이 같구나.

맛은 사과인데 모양새가 작은 배를 닮았대서 아기배라 했다가 아그배로 불리게 되었다지. 직박구리, 까치, 비둘기, 박새... 이 달콤한 열매는 새들의 주린 배를 즐겁게 채워준다지.



산책길에 주워 올린 것들이
내 손 안에서 특별한 존재가 된다.

손이 닿는 순간,
마법의 빗장이 스르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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