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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섭 Jul 07. 2021

열심히 하면 뭐하냐. 어차피 다 똑같은데




 신병훈련‧유격‧혹한기‧대대종합전술 훈련‧국지도발 대응훈련 등 육군에서 행하는 훈련은 참으로 다양하다.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할까? 훈련의 종류는 많은데 가끔 한다고 해야 할까? 공병대 소속이었던 탓인지 오지에 있는 영외중대에서 복무했던 탓인지 모르겠다. 그저 체감상 실질적인 훈련 일수는 1년 365일 중에 2 ~ 3개월 정도밖에 안 된다고 느껴졌다.


 그럼 나머지 10개월은 뭐 했냐고? 별거 없다. 걍 삽질하고 노가다했다. 연병장에서 풀 뽑고, 사단 본부 어디의 공사장에 가서 페인트 칠하고, 시멘트 치고, 어디 산으로 가서 진지공사하고, 창고 정리하고, 차량 운행하고, 차량 정비하고, 막사 보수공사하고…


 이게 전부다. 한 마디로 노가다 꾼이었다. 이놈의 군대는 군사훈련 말고도 뭐 그렇게 할 게 많은지 할 일이 없던 날이 없었으니까. 필요하다면 꿀 같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주말조차 반납해야 할 정도로 말이다.



 

“치직.. 아아.. 다들 9시까지 연병장으로 집합. 9시까지 연병장으로 집합.”


 2015년의 어느 주말, 나름의 여유를 즐기고 있던 병사들을 연병장으로 집합시키는 방송이 나오자 사방에서 쌍욕이 터졌다.


“아... 좆같네.”

“시발, 주말에는 좀 놔두지.”


 꾸역꾸역 몸을 일으키는 병사들이 연병장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곧, 인원 파악을 끝낸 병사의 보고가 들리자, 사열대에 있던 당직사관이 입을 열었다.    

 

“다들 주말이라고 퍼질러 있지 말고, 최소한의 군기는 유지하면서 쉬라고 알겠지? 슬리퍼 정리도 좀 하고”

“네!”

“그리고 오늘 안으로 복도에 도장작업 끝내야 한다면서? 00아 몇 명 필요하지?”

“5명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작업할 사람 손”     


 주말 작업에 자원할 사람은 손을 들라는 당직사관. 뭐, ‘나다 싶으면 알아서 손들어라’라는 말이다.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손을 들기 시작했다.     


“이병, 김수혁! 제가 하겠습니다!”     


 당시 나는 자대배치를 받은 지 며칠 되지 않은 상황. 당연히 큰 소리와 함께 손을 들었다.     


“넌 안돼. 2주 대기기간이잖아.”     


 자대배치를 받은 신병은 2주 동안 부대에 적응하는 기간을 가진다. 이 2주 동안은 힘든 일에서 열외가 되고 선임들의 쓴소리도 듣지 않는다. 그렇기에 당직사관은 손을 들고 있는 나를 딱 잘라 거절했다. 그리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고 말했다.     


“4명 밖에 없어?”     


 내가 손을 들고 있었던 탓일까? 원래 손을 들어야 할, 일병 몇 명이 손을 들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고참들의 입에서는 당연히 한숨 소리가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몇 명의 일병은 저녁에 이발실로 불려가서 갈굼을 받게 될 터다.     


“이병, 김수혁! 할 수 있습니다.”     


 잠시 눈치를 보던 나는 재빠르게 손을 들고 다시 자원했다. 왜 그랬냐고? 그냥 잘 보이려고 그랬다. 당시의 나는 짬찌중의 짬찌였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군 생활을 위해, 선임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음, 그래.”     


 당직사관은 그런 나를 보며 고민했지만 그렇게 길지 않았다. 아무리 2주 대기기간이라 하여도 본인 스스로가 괜찮다고 하니 크게 문제 될 건 없으니까. 굳이 귀찮게 다른 사람을 뽑을 필요 또한 없기도 하고.




 결국 나는 작업에 투입됐다. 촌놈이던 나에게 있어 이런 노가다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수월하게 일을 처리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인간관계가 편해졌다. 선임들이 오랜만에 괜찮은 놈이 들어왔다고 좋아했거든. 그들은 소위 말해서 나를 S급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사람을 급으로 나눈다는 게 좀 뭐하지만 우리 부대에서는 폐급부터 S급으로 사람을 분류했다. 폐급은 말 그대로 도저히 쓸모가 없을 정도로 군 생활을 못하는 사람을 말했고, S급은 그 반대의 뜻으로 군 생활을 잘하는 사람을 뜻했다.     


 하여튼 그 이후에는 누구나 예상하는 일상이 펼쳐졌다. 힘든 작업에는 가장 먼저 자원해서 땀을 흘리는 모습 말이다. 그만큼 몸은 힘들었지만 반대로 마음은 편했다. 알아서 일 잘하는 후임을 챙겨주면 챙겨줬지 갈굴 선임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대단한 인격의 소유자가 아니었기 때문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 한편에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오로지 저급한 보상심리 하나였다.     




‘열심히 해봤자 의미 없다.’     


 의무대에서 군 생활의 대부분을 보내는 선임. 에어컨이 빵빵한 행정실에서 하루종일 CCTV화면만 보고 있는 동기. 관심병사로 분류되어 위로 휴가를 나가는 동기. 전우들은 땀을 흘리며 작업을 하는데 PX에서 혼자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후임.     


 나는 항상 전투복이 땀에 젖어있었다. 그런 내가 그들을 어떻게 인식할지 말 안 해도 알겠지. 그렇다고 그들이 밉지는 않았다.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몰려왔을 뿐이었다. 내가 흘리는 땀이 의미 없다고 여겨졌고 허공에 삽질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심지어 포상 휴가는 개인의 노력 여하 따위는 상관없이 순서대로 돌아갔다. 열심히 하는 병사나 농땡이를 부리는 병사나 받게 되는 휴가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말이다. 입대하던 날, 어째서 친한 형님들이 ‘중간만 해라’라고 조언했는지 뼈저리게 느낀 시점이었다. 물론 그‘중간’이 가장 어렵지만…     


 결국 상병이 꺾일 때쯤 폭발해버렸다.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돌아오는 것 하나 없는 현실에 허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포상 휴가라도 넉넉하게 챙겨주면 이런 고민은 없었을 텐데. 당연히 그딴 건 없었다. 오히려 일을 열심히 할수록 더 힘든 일만 하게 될 뿐이었다. 폐급으로 분류된 병사는 쉬운 일을 하게 되는데 말이다.    

 

‘열심히 하는 사람이 병신이지. 대충 중간만 하자.’     


 그렇게 나는 얄팍한 허무주의에 빠졌다. ‘열심히 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라는 생각을 가졌다. 전역자들 말대로 대충 중간만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참 뭐라고 해야 할까? 중간을 잡는 게 제일 어려웠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해야 하는데 그게 굉장히 힘들다.     


 결국, 중간이고 나발이고 그냥 다 내팽겨치기 시작했다. 항상 농땡이를 부렸다. 물론, 어느 정도 짬이 찬 상태에서 농땡이를 부린 게 무슨 의미냐고 할 수 있겠지만, 병영문화 혁신으로 부조리를 없애던 시절이었다. 상‧병장이라고 작업에서 열외 되지 않았다. 간부들도 ‘마음의 편지’에 적힐까 괜히 일‧이등병을 건드리는 것을 자제했다. 진급에 문제가 생기면 아주 큰일이거든. 그렇기에 탈 없는 상‧병장과 함께 작업하길 선호했다. 한 마디로 계급 상관없이 다 같이 삽질을 해야 하는 환경이었다는 말이다.

(참고로 ‘마음의 편지’란 병영 부조리를 막기 위해, 사병이 지휘관에게 부대 내의 부조리나 고충을 신고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그 이후로 나는 참 편한 시간을 보냈다. 그늘에서 삽질하는 척만 하니 땀에 젖을 일이 없었다. 아무리 간부들이 눈치를 줘도 대충 일했다. 그러자 나를 찾는 간부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힘든 작업에 끌려가지 않았고 작업이 길어져 늦게 밥을 먹는 일도 줄어들었다. 주말에 내 개인 시간을 희생할 일도 없었다.     


 어째서 폐급 병사들이 농땡이를 피지 못해 안달이 났는지 알 것만 같았다. 이렇게 생활해도 어차피 남들 다 받는 포상 휴가는 받게 된다. 전역 날도 다가온다.     




“저 새끼 변했네.”


 그런데 뭘까? 땀에 전 선임의 전투복과는 다르게 뽀송뽀송한 내 전투복. 일과시간이 한참 지난 후 복귀한 동기와 TV를 틀어놓고 생활관에 누워 있던 나. 자연스레 작업 명단에서 제외되는 내 이름. 이제 나를 찾지 않는 간부. 나를 향해 “변했다”라고 말하는 선임들과 간부.


 분명히 몸은 편한데 마음이 불편했다. 쉬고 있어도 눈치가 보였다. 나를 찾지 않는 간부를 보면 자존심이 상했다. 내 이름이 제외된 작업 명단을 보면 기쁘지 않았다. 그늘에서 쉬고 있는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껴졌다.


 내가 명예욕이 높은 편이었나? 타인의 인정을 통해 자존감을 채웠던 타입이었을까? 주위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자존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자존감은 바닥으로 내려가고 작업을 빼기 위해 눈치를 보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이건 내가 아니다.’     


 이 모순되고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나는 몸이 힘든 것은 참아도 마음이 힘든 건 못 참는 성격이었으니까. 쓸데없이 강한 자존심이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에 대해 자괴감을 느끼게 만들었으니까. 남의 눈치를 보면서 불편하게 지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 내가 뭔 중간이냐. 그냥 하던대로 하자.’     


 나는 노예근성이 뼛속까지 박혀있었던 사람일까. 결국, 병장이 됐을 때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힘든 작업에 다시 손을 들어 자원했다. 일과시간이 끝나도 삽질을 했다. 간부들과 함께 전투복이 땀에 젖을 정도로 일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해졌다. 더 이상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도 않았고 스스로의 존재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땀을 흘리다 보니, 느릿느릿 흘러가던 시간이 점점 빨라졌다. 전역 날인 2016년 10월은 금방 다가왔다. 부대를 나서는 내게 얄팍한 허무주의는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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