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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섭 Jul 11. 2021

낳음 당했다

그럼 나가 뒈지세요




 한창 대학교를 다니던 2017년이었다. 평소처럼 PC방에있던 나는 무인 결제기에 만 원짜리 지폐 하나를 밀어 넣었다. 곧 지폐가 완전히 빨려 들어가며 시간이 충전됐다. 목적을 완료한 나는 친구들이 있는 자리로 터벅터벅 돌아갔다.     


“야! 루시안부터 짤라!!”     


 급박한 순간에 자리를 비웠기 때문일까? 게임이 불리해진 만큼 친구의 목소리 또한 거칠어져 있었다. 자리에 급히 앉은 나는 환한 불빛을 토해내는 기계식 키보드와 마우스를 다루기 시작했다.     


“미드 미드! 억제기 까!”

“그냥 끝내!”     


 기계식 키보드의 간결한 소음과 함께 친구의 오더(지휘) 소리가 PC방을 가득 채운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적의 기지가 박살이 나며 게임이 끝났다. 32인치 크기의 모니터에는 ‘승리’라는 두 글자가 떴다.     


“와, 시발 몇 연승이고?”

“5연승.”     


 유독 게임이 잘 풀리는 날이었기 때문일까? 친구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고 있었다.     


“왜 시험 기간에만 게임이 더 잘되냐?”

“니 내일 시험 몇 개 있는데?”

“나 두 개, 니는?”

“나도”     


 멍청한 웃음을 날리던 우리는 내일이 중간고사임을 다시 상기했다. 그 때문일까? 눈앞의 모니터만 주시하던 눈알이 주변으로 향했다.     


"타닥타닥"     


 귀를 어지럽히는 키보드와 마우스 소리. 옆과 뒤 그리고 건너편 복도까지 PC방의 모든 자리가 꽉 차 있었다. 이름 모를 저 대학생들은 키보드와 씨름을 하고 거친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 일부 인원은 라면을 시켜서 먹고 있었다.     


“개 노답들 존나 많네”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던 친구. 단순히 저 사람들을 비웃기 위해 뱉은 말이 아니었다. 시험 기간에 PC방에서 게임을 하는 우리 스스로를 조롱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제일 병신 아니가?”

“맞지.”

“몰라 시발. 달리자.”

“가즈아!”




  ‘내일의 일’은 ‘내일의 내’게 맡기고 우리는 다시 게임을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우리는 아르바이트생의 인사를 뒤로하고 PC방을 나섰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들어갔던 PC방이지만 어느덧 하늘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와, 10연승 개지렸다.”

“다이아 금방 찍을 듯”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취방으로 걸어갔다.     

“치맥 콜?”

“콜!”     


 어둑해진 하늘을 인지했기 때문일까? 항상 그렇듯이 친구 한 명이 치맥을 제안했다. 우리는 당연한듯이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고 치킨을 주문했다.     


“배달입니다!”     


 역시 배달의 민족. 자취방에 들어와서 얼마 뒹굴뒹굴하지도 않았는데 금방 도착했다. 우리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식탁에 맥주와 치킨을 세팅했다.     


 그리고 먹방 시작. 뭐, 이렇게 무식해 보이지만 사실 우리는 그렇게 많이 먹는 스타일이 아니다. 다들 입이 짧다. 배에 치킨 몇 조각만 들어가도 먹는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거든.     


“근데 내일 시험 우짜지?”

“걍 밤샐까?”     


 적당히 배가 불러왔기 때문일까? 내일 있을 시험에 대한 걱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은 PC방에서 게임을 할 때도 약간의 걱정이 있었다. 애써 그 걱정을 무시했을 뿐이다.     


 굉장히 모순이지 않은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서 공부를 하지 않음에 대한 걱정을 느낀다니 말이다. 그렇지만 별다른 괴리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항상 반복되던 모습이었으니까. 그저 벼락치기라도 할까 고민했을 뿐이다.


“몰라, 난 걍 안 할란다. 내일 당장 뒤질 수도 있는데 뭐하러 힘들게 사냐?”

“그래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정확히 언제부터 생긴 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놈들의 심리를 평안하게 해주는 무적의 논리가 인터넷에 퍼지기 시작했다. 쾌락주의의 일환인지 탈물질주의의 저급한 변형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 논리는 자기합리화의 도구로써 제 기능을 다하고 있었다.     


 이 무적의 논리를 몇 번 되뇌면 가슴 한쪽에 있던 불편함이 사라진다. 그렇게 우리는 시험 기간에 공부하지 않거나 1년 내내 비생산적인 하루를 보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뭐, 자기 선택에 따라 발생하는 결과를 책임지는 것이기에 꼭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본인이 책임지면 그만이니까. 다만, 이로 발생한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전가하는 쪽으로의 발전에 대해서는 문제점을 삼고 싶다.     




“우리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나? 낳음 당한 거지!”     


 어느 순간 커뮤니티에서 ‘낳음 당했다’라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 말은 우리가 책임져야 할 결과를 부모에게 떠넘기도록 했다.     


 이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이 세상은 고통이기에 태어난 것은 축복받을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외친다. 굳이 고통스러운 세상에 태어나서 왜 고통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부모가 우리들의 인생을 책임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의 주장을 들을 때마다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나가 뒈지세요.”     


 삶 자체가 고통이고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서 어째서 아직 살아 있는가?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개인에게 있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허나, 생명의 탄생 자체가 저주라고 주장한다면 그렇게 원하는 평안한 상태로 회귀하면 되지 않은가?     


 그런데도 살아있다는 것은 삶이 죽음보다 더 나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 마음이 편해지자고 부모를 팔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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