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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섭 Jun 22. 2022

아니, 그러니까. 정의가 어디에 있냐고요...




‘아... 망했다.’


 2020년 9월. 거대한 강당에서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내게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상황에서 큰일이 났음을 느꼈다.     


“정의가 있다고 보십니까?”     


 뻘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그럼 왜 저딴 소리를 뱉었냐고? 변명해보자면 질문해야 하는 상황인데 할 질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나는 그 당시 법과대학 대의원회 의장이었다. 또한 강당에 있던 학생들 중에서 가장 고학번이었다. 그렇기에 학과장님이 초청하신 특별 강사님의 질문에 감초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지.     


“그럼 강연은 여기서 끝내고 질문 있으신 분들은 손을 들어주세요.”     


 바로 저 질문 말이다. 거의 졸고 있던 내 귀로 들리는 특별 강사님의 마지막 멘트. 그리고 강연장에는 침묵이 깔렸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냐? 조교님의 눈빛이 내게로 꽂혔다. 딱 봐도 ‘질문 안 하고 뭐하냐?’ 이 뜻이다.


“질문 있습니다.”


 그 시선을 받자마자 자동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그리고 질문이 있다고 우렁차게 외쳤다. 당연히 내 머릿속에는 질문이 없었다. 나는 그냥 졸고 있었거든. 무슨 주제의 강연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떻게 질문하냐. 나도 강연장에 학생들이 많게 보이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머릿수를 채우기 위한 참여 말이다.


“정의가 있다고 보십니까?”


 그래서 그런지 이딴 뻘소리를 했다. 물론, 그냥 나온 말은 아니다. 그 당시의 내가 가장 고민하고 있던 주제였다. 하지만 이 강연장에서 할 질문은 아니었다. 이 강연이 무슨 주제에 관한 강의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정의'에 관한 주제가 아님은 확실했으니까.


 한 마디로 나는 분위기 파악 못하고 혼자 딥한 주제를 꺼낸 상태였다. 아마 강연장에 있던 모든 학생들은 ‘뭐지 저 병신은?’ 이런 생각을 가졌을 거다. 그런데 어쩌랴.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학생 그런 생각은 가지면 안 돼요!”


 아니나 다를까. 특별 강사님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요즘 뉴스를 보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지만, 절대로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안 돼요!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희망찬데…”


 대충 요약하자면 그런 비관적인 생각은 가지지 말란다. 세상은 아름다우니 좋은 생각과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아니, 그러니까. 정의가 어디에 있냐고요...’


 갑자기 혼났기 때문일까? 입이 댓 발이나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저 강사님은 그냥 ‘세상이 아름답다’라는 단순한 내용만 전달하려 한 것은 아닐 거다. 세상의 어두운 부분을 나 같은 청년들이 바꿔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겠지. 좀 더 희망차고 정의로운 세상 말이다.


‘정의를 위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 한 몸 바쳤다가 토사구팽 당하라고? 내가 호구인 줄 압니까? 독립유공자의 후손이 폐지를 줍고 사는데. 아주대의 이국종 교수님도 쌍욕을 먹고 중증외상센터를 떠났는데. 어떻게 정의를 논하고 이 한 몸을 세상을 바꾸기 위해 던지겠냐’


 물론, 나도 10대 시절에는 '정의'를 추구하며 살고 싶었다. 영웅심리인지 도덕적 선민의식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굉장히 정의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착각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부정적인 요인이 눈에 더 들어오는 내 소인배 같은 기질 탓인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정의와는 반대 방향으로 저울이 기운다.


‘대체 선택적 정의 말고 진짜 정의는 어디에 있냐. 뭔 말만하면 여혐이네 남혐이네... 뭔 말만하면 친일파네 종북 좌파네... 정의 따위는 없고 그냥 내 편 아니면 다 나쁜 놈이잖아.’


 저 때 내게 잔소리를 퍼붓는 강사님의 '정의' 또한 '선택적 정의'가 아닌지 의심이 갔었다. 그때의 나는 ‘정의’를 들먹거리는 사람을 보면 ‘위선자’라는 생각을 먼저 떠올렸으니까.


 오히려 ‘정의’보다 ‘인간의 이기심’을 어필하는 사람이 더 진솔하다고 느꼈다. 어느 정도였냐면, 아무리 못된 놈이 대통령이 되든 나라만 잘 먹여 살리면 된다는 정도였다. 도덕성? 그런 건 하나도 안 봤다. 어차피 이놈이나 저놈이나 도덕성은 피차일반이라는 인식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네!”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나는 강사님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넵, 넵”거리며 맞장구만 쳤다. 당연히 속에서는 수만 가지 투덜거림이 드글거렸지만, 어떻게 그걸 입 밖으로 꺼내겠냐. 여기서 내가 입을 열면 나는 빌런 중의 빌런이 될 텐데. 한 마디로 규정하자면, ‘이상한 질문으로 강사님께 대드는 병신’ 정도라고 할까?


 이런 내게 남은 마지막 양심은 철저한 '개인주의'다. 타인에게 함부로 선행을 베풀지 않지만 피해도 주지 않는다. '정의'를 추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런데 이 마지막 양심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기는 남는 장사”라는 말이 통용되는 사회. 나 같은 소인배들이 더 흑화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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